4대 제임스 메디슨 -1 of 2 : 헌법의 아버지 1751 - 1800
“2024년 甲辰년 원단 힘차게 인류를 감싸며 하늘을 치솟아 오르는 청용(靑龍)의 웅장한 자태를 마음으로 상상하며 도성한담(賭城閑談)의 주제로 ‘미국의 대통령들’이라는 제목의 시리즈를 선정했다.
초대 죠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대통령을 시작으로 46대 조셉 바이든(Joseph Biden) 대통령에 이르는 긴 여정이다. 1789년 건국한 이래 235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미국 및 세계를 이끌어 온 46명의 대통령을 대상으로 한 분 한 분의 삶을 되살려 보고자 한껏 욕심을 부려본다.
지루하지 않도록 글을 읽는 분들과 함께 대화하면서 진행하려 하니 주저 없이 소통해 주기를 바라고, 짧지 않을 시간 끝까지 아낌없는 격려와 지원을 희망한다. 대부분의 대통령에 대해서 1~2 편으로 정리하겠지만 초대 죠지 워싱턴과 16대 에이브러햄 링컨 그리고 32대 후랭클린 루즈밸트 대통령 등 3인에 대해서는 그들의 막대한 역할에 비례해 여러 번에 걸쳐 소개하게 될 것이다.
진행하는 과정에서 인명과 지명 그리고 중요한 고유명사의 경우 참조를 돕기 위해 영어표기를 첨가할 것이며, 한글 발음표기는 현지발음으로 표기하여 한국에서 사용하는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양해 바란다. ”
제임스 메디슨(James Madison. 1751.3.16 – 1836.6.28) 제4대 대통령을 평하는 말은 정치가, 외교관, 건국의 아버지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헌법의 아버지’(Father of Constitution)라는 호칭일 것입니다. 전 세계 여러 나라에서 가장 모범이 되는 ‘미국 헌법’의 초안을 만들고 그 헌법이 채택되도록 널리 알리면서 후에 ‘권리장전’(Bill of Rights)이라 불리는 10가지 개헌도 진두지휘한 공로가 있기 때문입니다.
5피트 4인치(164cm)의 자그마한 체구인 제임스 메디슨은 국가 건설을 위한 기초 쌓기에 광범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헌법에 입각한 정부의 수립과 발전을 누구보다 일선에서 성공적으로 이끌어 낸 장본인입니다. 비록 파당의 기초가 되는 정당으로서의 ‘민주적-공화당’(Democratic-Republican Party) 설립을 돕고 그 당을 대표한 대통령으로도 봉직했지만 그의 전설은 바로 헌법을 창조했다는 데에 있고, 현대적 지방정부를 포용하는 확장된 연방 국가질서를 발현하고 이론체계를 확립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가 구축한 ‘자유보장 입헌정부' 모델은 세계 정치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의 사상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가와 정치학자들 사이에서 제임스 메디슨의 가치는 역대 대통령들 사이에 늘 상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다수의 지배'라는 공화정치의 개념과 '소수의 권리보장'이라는 정치이념 사이에 균형을 지키려 애썼던 공화국의 계몽가이자 '실패한 대통령' 제임스 메디슨(이하 제임스)에 대해 같이 살펴보겠습니다.
[甫宣] 제임스의 집안도 영국에서 이민온 분이 가문을 이루셨겠지요, 선생님?
[海月] 그렇지. 그 당시 건국의 아버지들의 선조들은 대부분 비슷한 이유와 경로를 통해 식민지 땅으로 이주했고, 제임스의 웃어른도 그랬을 텐데 기록이 시원치 않아! 미국 내 메디슨 가문의 시조라고 여겨지는 5대 조부(현조부)는 ‘아이젝 메디슨’(Isaac Madison)이라는 분으로 1590년에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어. 1608년에 버지니아 주 최초의 식민지 마을 ‘제임스타운’(Jamestown)이 설립된 지 1년 만에 이 지역을 탐험하고 지도를 작성하기 위해 신임 주지사 ‘토마스 데일 경’(Sir “Thomas Dale)에 의해 고용되어 도착했지. 토마스 경이 영국으로 돌아간 뒤에 아이젝은 ‘찰스 시티’(Charles City) 카운티에 있는 ‘West and Shirley Hundred’ 농장 책임자가 되었어. 잠시 영국으로 돌아간 아이젝이 1618년 ‘메리 카운슬러’(Mary Councilor. 1595 - 1625)를 부인으로 맞이하고 버지니아로 다시 돌아왔을 때 영국정부에서는 배편과 토지 그리고 하인까지 붙여주었지. 버지니아에서 경험을 많이 쌓은 아이젝은 덕분에 다시 정부일을 보게 되었는데, 특히 원주민들과의 교류에 관여하다가 1624년 경에 ‘찰스 시티’(Charles City) 카운티에서 사망했다는 기록이 전부야.
[보선] 그래도 제임스 가문을 미국에서 제일 먼저 일군 분에 ‘아이젝’이란 분이 있었다는 사실은 확인된 것이잖아요?
[해월] 미국에서 메디슨 가문이 1608년 경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하다고 봐. 그 이후 직계 4대 조부(고조부)가 ‘쟌 메디슨 시니어’(John Madison Sr. 1625 – 1683)였다고 하는데 이 분 또한 확실한 기록은 없어. 다만 버지니아 주 ‘뉴 캔트’(New Kent) 카운티에서 태어나 1653년 캔트에서 ‘메리 엠브로스’ (Marie Ambrose)와 결혼해 ‘쟌 주니어’(John Jr.), ‘핸리’(Henry) 그리고 딸 ‘엔’(Ann)을 두고, 민병대 중령을 지냈으며 1683년경 ‘뉴 캔드’(New Kent)에서 58세로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지.
[보선] 증조부부터는 좀 더 상세한 기록이 있나요?
[해월] 3대 증조부는 ‘쟌 메디슨 주니어’(John Madison Jr. 1655 – 1726)로 1655년 경 버지니아 주 ‘킹 엔 퀸 카운티’(King and Queen County)에서 태어나 1690년 경 ‘이사밸라 마이너 타드’(Isabella Minor Todd. 1663-1726)와 결혼해 ‘케서린’(Catherine), ‘토마스’(Thomas), ‘메리’(Mary), ‘엠브로스’ (Ambrose), ‘앨리너’(Eleanor), ‘핸리’(Henry) 그리고 ‘롸저’(Roger) 등 4남 3녀를 두었어. 제임스의 할아버지와 증조부의 성함을 확실히 알게 된 것은 제임스가 직접 손으로 작성한 연대표에 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를 적어 넣었기 때문이었지.
[보선] 제임스 스스로 가족 연대표를 작성했다니 그나마 다행이네요. 직접 표현했으니 확실하겠지요?
[해월] 그렇게 볼 수밖에 없지? 조선시대 ‘족보’라는 연대표를 만들어 후대에 전해 준 집안의 사람들은 다행이지만 상당수의 가족들은 그 같은 연대표를 갖고 있지 못할 거야. 신대륙 식민지에 이주해 온 사람들의 후손들도 가족의 역사를 아는 방법은 많지 않겠지.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당시 주정부나 카운티 정부의 토지거래 신고서 내용이나 사망신고서 등을 통해서 미약하나마 추정이 가능한 것이지.
[보선] 제임스의 할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나요?
[해월] 위의 형제분들 중 제임스의 직계 할아버지는 ‘엠브로스’라는 분으로 1696년 1월 17일 버지니아 주 ‘오렌지 카운티’(Orange County)에서 태어났어. 남부 켈리포니아 주에도 한국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어 잘 알려진 오렌지 카운티가 있지만, 엠브로스는 버지니아 주에 있는 오렌지 카운티에서 토지를 구입해 담배농장을 운영했지. 엠브로스는 1721년에 동네 유지인 ‘제임스 테일러’(James Taylor)의 딸 ‘후렌시스 테일러’(Frances Taylor. 1700-1761)와 결혼했지. 이들은 제임스 테일러의 도움으로 땅을 구입하고 농장을 운영하며 이를 ‘마운트 플래전트’(Mount Pleasant)라 부르며 살았어.
[보선] 할아버지 대에 와서는 여유로운 삶을 살았나 보군요?
[해월] 담배농장을 운영했다면 경제적으로 상당한 여유가 있었을 거야. 이들 부부는 아들 ‘제임스 시니어’ (James Sr. 1723-1801)와 두 딸 ‘앨리자배스’(Elizabeth)와 ‘후렌시스’(Frances)를 낳고, 땅을 구입하여 집도 짓고 농장도 운영하면서 1732년엔 이사까지 마쳤는데 엠브로스가 왠지 시름 앓더니 그해 8월 27일 36세를 일기로 사망했어. 갑자기 사망했기 때문에 사인을 규명하던 경찰과 가족들은 노예 중 세 사람이 그를 독살했다고 결론지었지. 이 사건은 식민지 버지니아 주에서 노예에 의해 농장주가 살해당한 첫 번째 케이스가 되었어.
[보선] 아니 농장주가 노예에 의해 독살을 당하다니요?! 예전 한국동란시절 소작인들이 빨갱이에 세뇌되어서 상전으로 모시던 지주들에게 대들었다던 역사가 생각나네요!
[해월] 보선이는 별 걸 다 기억하고 있구나! 남편 엠브로스가 사망한 뒤 후렌시스는 아직 젊었음에도 불구하고 재혼하지 않고 근처에 사는 친정식구들의 도움과 큰 아들 ‘제임스 시니어’와 힘을 합쳐 농장을 운영해 수입도 늘려갔지. 아들 제임스 시니어는 21살 성인이 되던 해인 1744년에 4,000 에이커 농장과 29명의 노예를 상속받고 계속 땅을 더 사들여 나중에 아들 제임스(4대 대통령)가 물려받을 때는 약 5,000 에이커(약 612만 평)에 달하는 규모가 되었지. 이 농장을 ‘홈 하우스’(Home House)라 불렀던 제임스 시니어는 오렌지 카운티에서 가장 큰 규모의 농장주가 되었고 사망할 때에는 108명에 달하는 노예도 소유하고 있었어.
[보선] 제임스 시니어는 자제를 많이 두었나요?
[해월] 제임스 시니어는 1749년 9월 13일 ‘킹 죠지 카운티’(King George County) ‘포트 칸웨이’(Port Conway)에서 농장을 운영하던 ‘후렌시스 칸웨이 시니어’(Francis Conway Sr.)의 딸 ‘엘러너 로즈 낼리 칸웨이’ (Eleanor Rose Nelly Conway. 1731.1.9 – 1829.2.11)와 결혼했는데, 그들은 우리의 주인공 ‘제임스 메디슨 주니어’(James Madison Jr. 1751-1836)를 장남으로 모두 12명의 자녀를 두었지. 그중에서 다섯 아이는 아주 어려서 사망했고 일곱 아이들만 성인으로 자라났는데, 제임스의 형제들은 ‘후렌시스 테일러’(Francis Taylor. 1753-1800), ‘엠브로스’(Ambrose. 1755-1793), ‘앨러너 칸웨이’(Eleanor Conway. 1760-1802), ‘윌리엄 테일러’ (William Taylor. 1762-1843), ‘세라 케트렛’(Sarah Catlett. 1764-1843), 그리고 ‘후렌시스 테일러’(Frances Taylor. 1774-1823) 등이 있어. 이 중에서 윌리엄 테일러 메디슨은 미국 독립전쟁 때 아버지와 함께 독립군 중장으로 참전했고 ‘1812년 전쟁’ 때에도 영국군과 싸운 장군이었지.
[보선] 부친 제임스 시니어도 독립전쟁에 참전했었나요?
[해월] 물론이지. 독립전쟁을 준비하던 시절에 ‘대륙의회’(Continental Congress)는 독립운동을 지휘할 임시정부의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위원회’(Committee)라는 이름의 지방정부 조직을 구성했어. 이들 위원회는 정부정책을 타 지역 위원회와 공유하며 행정업무를 수행하는 ‘공보위원회’ (Committee of correspondence)와 정부정책수행을 교육하고 감독하면서 징세와 징병업무도 수행하는 ‘감독위원회’ (Committee of inspection), 그리고 비상시 주민을 관리통제하고 법과 규칙을 수행하는 ‘안전위원회’ (Committee of safety) 등이었지. 아버지 제임스 시니어는 오렌지 카운티 ‘안전위원회’ 의장을 맡아 봉직했고, 버지니아 주 민병대 대령으로 전투에도 참전했었지.
[보선] 제임스 시니어도 농장을 가꾸면서 정부일을 보셨던 분이셨네요.
[해월] 그랬지. 일대에서 가장 큰 농장 중 하나를 운영하던 제임스 시니어는 1764년에는 ‘홈 하우스’에서 약 반마일 떨어진 곳에 나무가 아닌 브릭으로 2층짜리 새집을 짓고 이사하면서 이 집을 ‘몽필리어’(Montpelier)라고 불렀는데 제임스가 사망 때까지 살던 가족의 보금자리였었어.
[보선] 아버지가 멋있는 집을 지으시고 5,000 에이커 규모의 농장도 운영하면서 나라일도 보고 또 훌륭한 아들들을 두었으니 행복하셨겠어요.
[해월] 행복이란 상대적인 개념이겠지만 9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커다란 농장을 운영하면서 가산을 늘려놓았으니 그 스스로가 훌륭한 가장이었다고 봐. 1801년 2월 27일 77세를 일기로 몽필리어 자택에서 사망했을 때 유산을 물려받을 자손들이 많이 있었으니 그 또한 행복한 일이었겠지. 특히 큰 아들 제임스가 이미 50줄에 들어서 있고 버지니아 주정부 일을 보다가 새로 출범한 국가에서 큰 일을 보기 시작했으니까 뿌듯한 마음으로 영면했을 거야.
[보선] 5대 조부부터 아버지까지 살펴보셨으니 이제부턴 제임스에 대해 말씀주시 지요.
[해월] 그러자! 어머니가 친정인 포트 칸웨이의 ‘밸리 그로브’(Belle Grove) 농장에 가서 해산을 하는 바람에 부유한 외할아버지 ‘후렌시스 칸웨이’의 사랑을 많이 받던 제임스가 가족들과 함께 ‘마운트 플래전트’로 이사 들어갔지. 11살에서 16살까지 버지니아 남부에서 농장주 사이에 소문난 개인교사 ‘도널드 로벗슨’ (Donald Robertson)을 찾아가 수학과 지리학 그리고 고전 및 현대 언어들을 수학했지. 제임스는 특히 라틴어(이테리어)에 소질을 보였다고 해. 16살 때 집 몽필리어로 돌아온 제임스는 ‘토마스 마틴’ 목사 밑에서 대학입학을 위한 공부를 했지. 당시 버지니아 주에서 윌리엄스버그에 있는 ‘윌리엄 앤 매리 대학’(College of William and Mary)에 대부분 진학했지만 제임스는 그곳 기후가 잘 맞지 않아 혹시 병에라도 걸릴까 두려워 대신 ‘뉴 저지대학’(College of New Jersey. 지금의 Princeton University)으로 1769년 진학했어.
[보선] 쟌 에담스는 하바드, 토마스 재퍼슨은 윌리엄 앤 매리 그리고 제임스는 프린스턴! 와! 일류대 아니면 안 가는 거예요?
[해월] 일류대라서 간 것이 아니라 그때는 그런 대학교 밖에 없어서 간 거지! 하하! 대학에서 라틴, 희랍어, 종교학 그리고 유럽에서 한창 전개되고 있던 ‘계몽주의’(Enlightenment)에 대해 공부했지. 특히 발표와 토론에 대한 열정이 대단해서 요즘 유행하는 토론반(debate team) 성격의 ‘American Whig-Cliosophic Society’의 회원이 되었어. 이때 친하게 지낸 친구로 후에 법무장관이 된 ‘윌리엄 브레드훠드’(William Bradford)와 부통령을 지낸 ‘에런 버’(Aaron Burr)가 있지. 이들 친구들과 죽이 맞아 공부를 열심히 한 제임스는 3년 코스인 인문학사(Bachelor of Arts)를 2년 만에 마치고 1771년에 졸업했어. 졸업 후 법공부를 할까 생각해 보다가 그냥 대학에 남아 ‘쟌 위더스푼’(John Witherspoon) 학장 밑에서 유태어와 정치철학 공부를 더하고 1772년에 몽필리어로 돌아갔지.
[보선] 많은 사람들이 법공부를 해서 변호사가 되던데 제임스는 다른 길을 택했군요?
[해월] 법공부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우선 철학과 도덕성 그리고 계몽주의에 입각한 자유주의에 심취한 것 같아. 사람에게는 행복할 권리가 있다든가 정치적 자유를 얻는 방법이 무엇인가에 대해 연구한 것이지.
집에 돌아온 제임스는 일정한 직업이 없었고 동생들에게 공부를 시켜주다가 뒤늦게 친구 브레드훠드의 도움으로 법에 관련된 서적을 받아 고대 민주주의 등을 공부하면서 앞으로 다가 올 ‘헌법회의’(Constitutional Convention)에 대비하는 생활을 했지. 판사 밑에 가서 일을 한다거나 변호사 자격을 따려 하지는 않았어.
가끔 정신적 불안감을 호소하기도 하고 스트래스로 인한 일시 무력감 등으로 건강에 문제가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무난하게 생활할 수 있었지.
[보선] 변호사 자격을 갖지 않음으로써 본인 스스로 얽매이지 않고 자유스러운 입장이 되려 했나 본데요?
[해월] 그런지도 모르지. 알다시피 1760년대와 1770년대 식민지에는 영국 의회가 제정한 여러 징세법으로 무척이나 시끄러웠잖아? 결국 그 때문에 독립운동과 전쟁이 발발했지만. 제임스는 당시 상황을 이론적으로 대항하면서 풀어나가려 했던 것 아닌가 해. 당시 13개 주 식민지사람들이 대체로 영국왕당파(Loyalists)와 중도파 (Neutralists) 그리고 애국주의파(Patriots) 등 세 가지 부류로 나뉘었는데 제임스는 애국주의파로 식민지 정부에 합류하면서 나름의 길을 찾기 시작했어. 1774년에 아버지가 몸담고 있는 ‘안전위원회’ 위원이 되었으며 1775년 10월에는 오렌지 카운티 민병대 대령으로 발령받았지. 비록 전투에 직접 참전한 적은 없지만 버지니아 정치가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던 거야.
[보선] 아버지의 길을 정확히 따라가는 것을 보면 그것이 출세의 길이었나 봐요.
[해월] 계획적이라기보다는 하다 보면 그렇게 되는 수도 있는 것 아닐까? 제임스가 가는 길은 그의 아버지와는 많은 차이가 있어. 그는 곧 제5차 버지니아 회의(정부의 개념임)에 대의원으로 참가하게 되고 버지니아의 최초 주헌법을 만들게 돼. 이때 제임스는 참석한 대의원들에게 1776년 5월 20일에 발표된 ‘버지니아 권리선언’(Virginia Declaration of Rights)을 수정할 것을 권하면서 종교문제에 있어 단지 관용만 할 것이 아니라 ‘동등권한’을 내세울 것을 주장했지. 한마디로 종교로부터의 자유를 설파한 것이야. 버지니아 헌법이 채택되면서 제임스는 버지니아 주 하원에 입성했고 곧이어 버지니아 주지사의 ‘주위원회’(Council of State)에 선출되었지. 당시 주지사가 ‘토마스 재퍼슨’이었기 때문에 제임스는 바로 토마스의 측근이 되었고 1776년 7월 4일 발표한 ‘독립선언문’ 작성에도 일익을 담당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보선] 제임스와 토마스의 만남은 우연이 아닌 거지요. 주지사가 주재하는 주 최고결정기관인 주위원회에 선출되었다는 사실은 그 이후 미국 역사에 대한 토마스의 역할로 보아 두 사람이 새로운 역사의 창조자가 되었음을 말하는 듯하네요.
[해월] 정확이 봤어. 두 사람은 여러 면에서 거의 일심동체 같은 모양새를 갖추었지. 1777년 11월 새 정부 ‘대륙회의’에서 미국헌법의 전신인 ‘연합법’(Articles of Confederation) 제정을 위한 토론에 참석한 제임스는 또다시 종교의 자유 문제에 대해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어. 제임스는 1777년에서 1779년까지 주위원회에 선출되었고 2차 대륙의회에 위원으로 선출되면서 정부일에 계속해서 참여하게 돼. 1780년부터 1783년 까지는 대륙의회가 걷잡을 수 없이 높아가는 물가고로 재정이 어려워지고 독립전쟁에 물자를 조달하기 조차 어려워지는데 주정부에서 필요물자를 제공하는데 협조하지 않자 제임스는 연합법을 개정하여 대륙의회가 수입품에 대한 관세를 징세하여 세입을 늘릴 수 있는 권한을 갖게 하자는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지. ‘죠지 워싱턴’ 총사령관과 ‘알랙산더 헤밀턴’ 위원 등 많은 사람이 찬성했지만 결국 13개 주 전체의 비준을 얻는데 실패하면서 무위로 돌아가기는 했지만 그의 존재를 알리는 데 성공했다고 봐. 그리고 종전협상을 하면서 미국이 서부로 영토를 확장하는데 지장이 없어야 하고, 미시시피강 항해권을 보장하고, 동부지역 영토에 주권을 갖는다는 등의 내용을 넣도록 주장했어. 죠지가 바라는 바를 대신 피력한 것이지. 대륙의회 위원생활을 마치면서 1784년에 바로 ‘버지니아 주 하원’(Virginia House of Delegates) 의원에 당선되었지.
[보선] 토마스와 힘을 합치는 모습을 보이는 제임스가 알랙산더와 죠지가 추진하는 정책을 옹호하는 제스처를 하는 것이 어째 이중적 처신을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네요.
[해월] 제임스가 가졌던 신념과 이상은 어쩌면 양쪽을 다 아우르는 계몽사상에서 발로한 것이었다고 생각해. 그들 모두가 ‘나가 아닌 우리’를 위해 일한 것이었을 테니까. 제임스는 영국의 종교인 성공회의 주교 등 성직자들이 식민지 주에 들어와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모습이 몹시 거슬려 종교의 자유, 즉 종교로부터의 자유를 제창하고 토마스와 같이 1779년에 버지니아 주 의회에 ‘버지니아 종교자유법’(Virginia Statute of Religious Freedom)을 상정했지. 제임스는 한편 ‘직접 민주주의’가 사회적 붕괴를 가져오고 ‘공화주의 정부’가 파당과 분열을 억제하는데 효과적이라고 믿었지. 당시 프랑스 대사로 나가있는 토마스가 보내주는 계몽주의 서적을 통해 법과 정치 이론을 심도 있게 공부하고 특히 고대 및 현대 ‘내더렌드 공화국’과 ‘스위스 연방’ 등의 헌법을 공부하면서 미국이 과거 공화주의가 겪은 경험보다 훨씬 진보된 국가로 발전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어.
[보선] 제임스가 미국 헌법의 아버지라고 불릴 만한 일을 시작했나 보네요.
[해월] 맞아! 대륙의회 정부가 1787년 헌법제정을 토론하기 전에 제임스는 버지니아 주 동료 의원인 ‘애드먼드 렌돌프’(Edmund Randolph)와 ‘죠지 메이슨’(George Mason)과 함께 ‘버지니아 플렌’(Virginia Plan)이라는 연방헌법의 기초 안을 작성하기 시작했어. 버지니아 플렌에는 이미 채택된 ‘연합법’을 폐기하고 새로운 ‘연방헌법’을 제정하자고 되어있어. 신설될 연방정부에 의회(legislative), 행정 (executive), 그리고 사법(judicial)을 다루는 3개의 부를 설치하고, 의회는 상원(Senate)과 하원 (House of Representative)의 양원체제를 갖추며 의회를 통과한 법에 거부권(veto)을 행사할 수 있는 '연방수정위원회'(Federal Council of Revision)를 두는 것으로 되어있었지. 대통령이 행정부 수반으로 전권을 행사하는 것을 선호하고 이 새 헌법에 대한 주정부 비준은 주의회가 아닌 별도의 ‘비준회의’를 열어서 하는 것으로 주장했지.
[보선] 드디어 연방헌법 초안이 임시정부에 의제로 발제되고 토론이 시작되었군요?
[해월] '제헌회의'(Constitutional Convention)가 1787년 5월 25일 개최되고 참석한 의원들 중에 무게 있는 죠지와 ‘밴자민 후렝클린’ 같은 이들이 훌륭한 방안이라고 동의하면서 순탄하게 추진되었어. 한 가지 조정한 것은 각주의 비준을 쉽게 얻기 위한 방안으로 의회구성에 있어 하원은 각 주의 규모와 인구수에 따라 의원수를 정하고, 상원은 규모가 작은 주를 위해 의원수를 규모에 상관없이 주마다 동수(2명)로 하기로 했지.
[보선] 비준을 위한 과정이 남았지만 준비를 잘해서 문제없이 통과되었겠지요?
[해월] 9월 17일 제헌회의가 마무리되고 각 주에서 비준을 위한 토론(ratifying convention)이 시작되었지. 이때 헌법안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연방주의자’(Federalists)라 불렀는데 제임스도 이 쪽에 서있었어. 그리고 반대하는 사람들을 ‘반 연방주의자’(Anti-Federalists)로 부르게 되었는데 양쪽의 힘겨루기가 시작되었지. 이때만 해도 연방주의자의 시조인 알랙산더 헤밀턴과 ‘쟌 제이’ 그리고 제임스는 한 파로서 ‘연방주의자 논문’ (The Federalists Paper)을 만들어 익명으로 발표하면서 ‘연합법’의 문제점과 ‘연방헌법’을 지지해야 하는 이유를 설파했어. 제임스는 이 논문을 통해 ‘대의 민주주의’(representative democracy)와 큰 규모의 공화정부 수립, 삼권분립을 통한 권력집중억제와 균형 및 견제를 이루는 정부체계확립을 주장했어. 또한 행정부의 의회법 거부권 행사는 물론 주정부법에 대한 거부권 행사 권한도 옹호하고 나섰지. 한편 버지니아 주에서의 토론에서는 반연방주의 파인 ‘페트릭 핸리’(Patrick Henry) 전 주지사의 비준반대 선동에도 불구하고 ‘애드먼드 렌돌프’ 대의원의 강력한 지지발언에 힘입어 1788년 6월 25일 89 대 79표 차로 통과되고, 다른 9개 주에서도 통과되면서 새 헌법이 채택됨과 동시에 새로운 형태의 정부가 출범하게 되었지. 죠지가 다음 해 1월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역사가 시작된 거야.
[보선] 제임스가 미국헌법 초안을 만들고 채택되는 과정에서 큰 일을 한 공로를 인정받아 ‘헌법의 아버지’라 부르게 된 것이군요.
[해월] 그것은 나중에 역사가들이 지어 준 명칭일 뿐 당시에는 해야 할 일이 태산 같았지. 제임스는 그 후 버지니아 주 상원에 출마했지만 실패했고, 반대파인 페트릭 핸리와 지지자들이 ‘2차 제헌회의’ 개최를 준비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이를 막을 방책으로 연방하원에 출마했어. 여기서 눌리면 정치생명도 끝난다고 생각한 그는 그들의 낙선공작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전략을 바꾸어 “필요하다면 정당한 방식으로 헌법개정을 하도록 노력하겠다”라고 허를 찌르는 공약을 발표하면서 1789년 2월 2일 벌어진 버지니아 주 제5지구 선거에서 57퍼센트 지지로 2년 임기의 연방하원 의원에 당선되었지.
[보선] 제임스가 초대 연방하원에 입성하면서 죠지와 같이 미국을 출발시켰네요.
[해월] 1789년 3월 4일 출범한 초대 미국 정부에 거는 국민의 바람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을 거야. 건국의 아버지들이 총출동한 정부였으니까! 죠지는 헌법의 중요성을 알고 헌법제정을 추진한 제임스를 높이 사기 시작했지. 그에게 첫 취임연설문 작성을 부탁할 정도로 신뢰했어. 제임스는 죠지의 취임연설에 응답하는 의회의 답신도 작성한 장본인이 되었어. 그러면서 초대 내각의 조각에도 깊이 관여해 초대 국무장관(Secretary of State)에 ‘토마스 재퍼슨’이 등용되도록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어. 물론 토마스의 능력을 죠지가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보선] 제임스가 헤밀턴에 버금가는 죠지의 최측근이 되었네요.
[해월] 그런 모양새로 출발은 잘했지. 제임스가 첫 의회에서 전에도 제안했던 ‘관세징수 안’을 제출했고 의회에서 ‘1789년의 관세법’이라는 법으로 통과되었지. 이 법은 우선 미국 내 제조업 보호라는 목적을 가지고 있으니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없었고 또한 미국 정부의 재정을 채워주는 ‘직접국세’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니 정부운영에 반드시 있어야 할 당위성을 가졌지. 미국의 첫 의회가 통과시킨 첫 번째 법이 되었어.
[보선] 제임스가 나서서 징세법을 통과시켰으니 연방주의자 정부에서 대단히 좋아했겠어요.
[해월] 좋아했지. 그런데 다음 해 재무장관직을 가진 알랙산더가 야심 찬 경제정책, 즉 연방정부가 연방채권을 발행해 주정부 부채를 인수하겠다는 제안을 하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어. 북부지역 사람들은 이 안에 찬성하였지만 남부지역, 특히 이미 빚을 전액 되갚은 버지니아 주에서는 반갑지 않은 소식이지. 제임스와 토마스는 이 안에 극구 반대하면서 난관에 봉착했었는데 1790년 이들 세 사람이 극적으로 타협안을 찾으면서 탈출구를 마련했어. ‘1790년의 타협’(Compromise of 1790)으로 불리는 이 해결책은 토마스와 제임스가 알랙산더의 경제정책을 받아들이는 대신 미국의 수도를 남부 포토맥 강 인근 죠지타운 지역에 건립한다는 것이었지. 이들이 북쪽의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1790년의 자금투자법’(Funding Act of 1790)이 제정되었고 동시에 ‘연방정부건립법’(Residence Act)이 채택되면서 남쪽에 영구히 연방수도를 건립하는 것으로 타협이 이루어져 현재의 ‘워싱턴 디. 씨.’(Washington, District of Columbia)가 탄생하게 된 것이야. 이곳에 행정부와 입법부 그리고 사법부가 모두 한 곳에 자리를 잡게 되었지.
[보선] 새 연방정부가 자리를 잡아가는 모습이 보이네요.
[해월] 모든 것이 처음 하는 일이라 시행착오라는 것이 생기게 마련일 거야. 하나씩 잡아가는 게 인간사이겠지. 제임스가 취한 다음 일은 그가 하원의원 출마했을 때 공약을 내세운 헌법개정이었어. 공약이기도 했지만 헌법자체를 부정했던 무리들이 추진하고 있던 ‘2차 제헌회의’를 사전에 방지하고 의회와 주정부의 개인권한 침해를 막기 위한 방안을 찾고자 했지. 비준회의 당시 돌출된 수많은 수정안들을 공부한 제임스는 종교의 자유, 발표의 자유, 평화적 집회의 권리, 언론의 자유, 개인재산보호, 형사사건 배심원 재판 등을 망라한 헌법개정을 만들게 되었어. 그의 두 번째 개정안(second amendment)에는 ‘주 민병대와 개인들에게 총기를 소지할 수 있는 권한(right to bear arms)을 부여’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지. 제임스와 공화주의자들이 희망하는 정부는 연방정부 소속 군대의 힘이 아닌 국민의 합의로 유지되는 연약한 정부였었지. 1789년 6월 7일 의회에 제출한 이 헌법개정안을 통칭 ‘권리장전’(Bill of Rights)이라고 부르고 있어. 하원에서 순탄히 통과된 원안이 상원에서 약간의 수정을 거치면서 마침내 10개 개헌안이 1791년 12월 15일 비준완료되면서 역사적 권리장전이 탄생되었지.
[보선] 정부가 세워지고 헌법도 국민의 권리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개정되면서 나라가 안정되어 가는 모습이네요.
[해월] 당연히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만 인간세계이니까 싸움이 없으면 심심하겠지? 1791년 알랙산더 재무장관이 ‘연방은행’을 만들어 국가통화관리를 하면서 신흥 산업에 투자를 제공해 육성하겠다는 정책을 발표하면서 나라가 두쪽이 나기 시작했어. 지지하는 쪽은 연방주의파(Federalist Party), 반대하는 파는 ‘민주적-공화주의파’(Democratic-Republican Party)라고 부르면서 파당이 형성되고 말지. 연방은행 설립은 제임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의회를 통과해 죠지가 1791년 2월 서명하면서 ‘1차 연방은행’(First Bank of the United States)이라는 파란만장한 금융기관이 탄생하게 되었지. 이것이 지금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은행’ (Federal Reserve Bank)의 전신인 거야. 그러면서 1792년 치른 두 번째 대통령선거에서 토마스와 제임스가 주축이 되어있는 ‘민주적-공화주의파’가 내세운 후보가 선거에 지고, 알랙산더와 치열한 싸움을 벌여왔던 토마스가 내각을 떠나면서 제임스가 실질적 당의 지도자가 되었지. 여기서 한 가지 알 것은 Democratic-Republican Party가 현재의 공화당의 전신이 아니라 사실은 민주당으로 변질되어 가는 성격의 정당이었어.
[보선] 정치인이 싸우지 않으면 정치가 아니지 않나요. 항상 싸우는 것만 봐서요.
[해월] 그럴 거야. 대외 전쟁 중에서도 싸워야 직성이 풀리는 직업군이니까. 1793년에 프랑스와 영국이 전쟁을 시작하면서 또 한판의 싸움이 벌어지게 돼. 알랙산더는 영국을 지지하고, 제임스와 토마스는 프랑스를 지지하는 가운데 양국에서 모두 미국상선을 나포하고 영국에서는 미국선원들을 강제징용까지 하게 되자 제임스는 영국하고 전쟁을 치르게 되면 오히려 미국에 유리하게 될 것이라는 판단을 하게 되지. 그러나 죠지는 측근인 대법원장 ‘쟌 제이’(John Jay)를 파견하여 1794년 영국과 타협하면서 ‘제이 조약’(Jay Treaty)을 맺도록 했어. 제임스와 그 파들은 일제히 그에 강력히 반대하면서 저항하게 되지. 이때가 제임스와 죠지 간의 우정이 깨지며 영원히 결별하는 순간이 되었어.
[보선] 죠지가 토마스를 잃더니 끝내 제임스까지 잃게 되네요.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는 것이 정치라더니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어요.
[해월] 맞아! 그래서 정치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거지. 목적달성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하는 비정한 세계. 그런데 여기서 정치얘기 잠깐 쉬고 행복한 얘기 한번 할까? 제임스가 1751년 생이니까 1794년이면 이미 43세나 되는데 아직 숫총각을 면하지 못하고 있는 거야. 이때 친구 ‘에런 버’(Aaron Burr)가 잘 아는 여자 한 사람을 소개하지. 이름이 ‘달리 페인 타드’(Dolley Payne Todd)고 26살에 아들이 하나 있는 미망인이었어. 달리는 1768년 5월 20일 아버지 ‘쟌 페인 주니어’(John Payne Jr.)와 어머니 ‘메리 콜스’ (Mary Coles) 사이 4남 5녀 중 3번째이자 장녀로 노스 케롤라이나 주 ‘뉴 가든’(New Garden. 지금의 Greensboro)에서 태어났지. 부모가 원래는 버지니아에 살았었는데 결혼하고 나서 1765년에 뉴 가든으로 이주했었어. 어머니 메리가 ‘퀘이커’(Quaker) 집안사람이라 가족 모두가 퀘이커 생활을 해오다가 다시 1769년에 버지니아로 되돌아와서 ‘새다 크릭’(Cedar Creek)의 조그마한 농장을 일구며 살았지. 그러다 아버지가 사업을 하겠다고 1783년에 당시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였던 필라댈피아로 이사했는데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가 1792년 10월에 사망하고 말았어. 사망하기 직전에 아버지가 달리를 결혼시키겠다고 필라댈피아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던 ‘쟌 타드’(John Todd)를 소개했고 둘은 1790년 1월 7일에 퀘이커 교회에서 결혼을 했지.
[보선] 제임스 결혼얘기하시는 줄 알았는데 사람이 바뀌는 것 같네요, 선생님!
[해월] 미안해! 바뀐 것이 아니라 이 달리가 제임스와 결혼한 달리가 맞지만 그만 인연이 후순위였다는 얘기를 하는 거야. 달리와 타드는 부자동네에서 아들 ‘쟌 페인’(John Payne)과 ‘윌리엄 탬플’(William Temple)을 낳고 잘 살았는데 비운의 운명이 1793년 그들을 덮쳤지. 황열병(Yellow Fever)이란 전염병이 도시 전체를 지옥으로 만들면서 5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어나갔는데 이때 달리 가족도 피하지 못했던 거야. 남편과 아들 윌리엄 그리고 시부모가 1793년에 사망하고 곧이어 두 오빠마저 잃고 말았어. 남편이 약간의 현금을 유산으로 남겼는데 유산집행인인 시동생이 돈을 건네주지 않아 재판까지 해야 했지. 친정아버지가 사망한 후 어머니가 생계수단으로 한 동안 집을 기숙사로 바꿔 운영한 적이 있는데 그때 잠시 기숙했던 ‘에런 버’가 안면식이 있던 달리의 사정을 듣고 무료로 재판진행을 맡아주었던 인연이 있었어.
[보선] 총각친구와 미망인의 만남을 주선했으니 에런은 양쪽에 좋은 일 한 사람이네요.
[해월] 제 머리 제가 못 깎는 사람들이니 좋은 일 한 것이지. 1794년 5월 정식으로 만난 두 사람은 17년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종교까지 바꿔가면서 9월 15일에 결혼식을 올렸어. 그리고 필라댈피아에서 3년 더 살면서 제임스는 달리의 아들 쟌 페인을 아들로 입양한 후 하원의원에는 더 이상 출마하지 않고 1797년 은퇴하면서 고향집인 몽필리어로 돌아가지.
[보선] 1797년이면 두 번째 대통령인 쟌 에담스가 취임한 해이잖아요?
[해월] 맞아! 1796년 대통령 선거에서 제임스가 토마스를 설득해 대통령에 출마토록 했는데 결과적으로 쟌이 토마스를 누르고 2대 대통령이 되고 토마스는 부통령이 되었지. 토마스는 쟌에게 프랑스 대사로 제임스를 추천했는데 쟌은 이에 동의했지만 내각의 다른 사람들이 극구 반대하면서 실패했어. 제임스는 쟌의 임기동안 직책을 갖지는 않았지만 ‘민주적-공화주의당’의 대표적 리더로 존재하면서 쟌행정부에 대항하는 일을 했지. 대표적으로 프랑스에 저항하는 정책을 편 쟌행정부가 ‘이민자와 치안방해법’(Alien and Sedition Acts)을 제정하면서 프랑스출신 이민자들을 구속하고 추방시키자 토마스와 함께 이에 대한 저항을 전개했지. 토마스는 연방법이 헌법에 위배할 경우 무효화시킬 권한이 주정부에 있다는 '무효론'(Nullification)을 펼쳤고, 제임스는 이에 반대의견을 내면서 주정부가 연방법이 위헌이라고 선언할 수는 있지만 집행자체에는 관여하지 않는 ‘불개입’ (interposition) 이론을 주장했지. 토마스의 무효론은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서 당에도 안 좋은 영향을 미치게 돼.
[보선] 연방주의파와의 전쟁이 쟌행정부에 들어서도 계속되었군요?
[해월] 정쟁이 끝날수가 있나? 野人의 어려움을 느꼈는지 제임스는 1799년에 버지니아 의회에 출마하여 선출되었고, 공직자 입장에서 1800년 대통령선거에 토마스를 다시 출마시켜야 한다는 결심을 한 것 같아. 정, 부통령이 동반출마자가 아니기 때문에 토마스는 다시 출마해도 문제 될 것이 없었지. 제임스는 선거전략으로 위에 말한 ‘이민자와 치안방해법’을 이용하면서 ‘1800년의 보고서’(Report of 1800)를 발표했지. 제임스는 이 논문에서 미의회는 헌법에 규정한 내용으로만 법을 제정할 수 있고, 치안방해법에 근거한 처벌은 발표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역설했어. 토마스는 제임스의 이 논문을 보고 ‘얼씨구나’ 하면서 자기 당의 비공식적 대선강령으로 채택했지. 연방주의당 내에서 쟌과 알렉산더 지지자 간의 분열이 발생하고, 프랑스와의 종전협상이 타결되었다는 소식이 선거일보다 훨씬 늦게 전해지면서 토마스와 애런 버가 동반출마한 1800년의 4번째 대통령 선거에서 쟌은 재선의 실패를 맛보게 되었어.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