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 제임스 메디슨- 2 of 2 : 민생 대통령 1809 - 1836
제임스 메디슨(James Madison. 1751.3.16 – 1836.6.28) 제4대 대통령을 평하는 말은 정치가, 외교관, 건국의 아버지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헌법의 아버지’(Father of Constitution)라는 호칭일 것입니다. 전 세계 여러 나라에서 가장 모범이 되는 ‘미국 헌법’의 초안을 만들고 그 헌법이 채택되도록 널리 알리면서 후에 ‘권리장전’(Bill of Rights)이라 불리는 10가지 개헌도 진두지휘한 공로가 있기 때문입니다.
5피트 4인치(164cm)의 자그마한 체구인 제임스 메디슨은 국가 건설을 위한 기초 쌓기에 광범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헌법에 입각한 정부의 수립과 발전을 누구보다 일선에서 성공적으로 이끌어 낸 장본인입니다. 비록 파당의 기초가 되는 정당으로서의 ‘민주적-공화당’(Democratic-Republican Party) 설립을 돕고 그 당을 대표한 대통령으로도 봉직했지만 그의 전설은 바로 헌법을 창조했다는 데에 있고, 현대적 지방정부를 포용하는 확장된 연방 국가질서를 발현하고 이론체계를 확립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가 구축한 ‘자유보장 입헌정부' 모델은 세계 정치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의 사상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가와 정치학자들 사이에서 제임스 메디슨의 가치는 역대 대통령들 사이에 늘 상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다수의 지배'라는 공화정치의 개념과 '소수의 권리보장'이라는 정치이념 사이에 균형을 지키려 애썼던 공화국의 계몽가이자 '실패한 대통령' 제임스 메디슨(이하 제임스)에 대해 같이 살펴보겠습니다.
[甫宣] 토마스 제퍼슨 3대 대통령 시대가 열리는가 보네요!
[海月] 쟌이 미국 역사상 몇 명 안 되는 재선실패 대통령이 되고 토마스가 정당 대 정당 성격의 미국 대선에서 승리하면서 정권교체를 완성했지. 이때 제임스는 외교경험이 없음에도 토마스의 최측근으로 국무장관(Secretary of State) 직을 맡게 되었어. 프랑스와 영국의 지속된 전쟁에는 중립을 지키면서 프랑스로부터 이민온 사람들을 불편하게 했던 ‘이민자와 치안방해법’을 폐지하고, 내국세 징수를 금지시키는 한편 육군과 해군력을 대폭 축소시켰어. 제임스는 토마스와 함께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에나 매입’(Louisiana Purchase)을 완성시켜 미국의 영토를 거의 두배로 확장시키는 쾌거를 이루었지. 그러나 영국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영국을 압박할 목적으로 추진한 ‘수입금지법’(Non-importation Act)과 ‘수출금지법’(Embargo Act of 1807) 등을 만들었지만 이들로 인해 오히려 국내 사업자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키면서 인기가 많이 떨어지기도 했어.
[보선] 영국과의 무역거래를 중단하는 것이 미국 상인들로서는 전쟁하는 것보다 힘들었나 보네요.
[해월] 제임스는 상품수출을 금지하면 영국에서 더 이상 미국상선을 나포하거나 선원들을 괴롭히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지만 생각처럼 진행되지 않고 오히려 이 법들은 비효과적으로 인기도 없고 특히 실행하기가 어려웠었지. 판단이 잘못된 것이었어. 의회가 곧 '금지법'을 폐지하고, 영국과 프랑스를 제외한 다른 국가와는 교역을 허락한 ‘불개입법’(Non-intercourse Act)을 제정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어.
[보선] 수입과 수출을 모두 금지시킨다면 경제 운영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잖나요?
[해월] 그렇겠지. 제임스의 인기도 함께 떨어진 가운데 1808년 대통령 선거가 다가왔지. 내가 보기에는 제임스가 8년 동안 국무장관직을 수행했지만 크게 이루어 놓은 일은 없었던 것 같아. 그래서 3대 대통령 토마스의 8년 임기 동안 연방주의당의 지지도가 바닥으로 떨어져 그들들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겠지만 토마스가 지지하는 제임스의 정적은 사실 내부에서 자생했어. 제3열에 속하는 ‘쟌 렌돌프’(John Randolph)와 현직 부통령 ‘죠지 클린턴’(George Clinton)이 제임스에게 강적으로 나타났지. 그러나 대통령 후보지명 전당대회에서 제임스가 승리했고 클린턴은 다시 부통령에 지명되었는데, 이 둘은 1808년 11월 4일부터 12월 7일까지 치러진 본선에서 연방주의당의 ‘찰스 핑크니’(Charles Cotesworth Pinckney)와 ‘루훠스 킹’(Rufus King) 후보팀을 선거인단 수 122대 47, 그리고 국민투표에서도 64.8%라는 높은 지지를 획득하면서 제4대 대통령과 부통령에 당선되었지. 토마스의 실정이 장관이었던 제임스에게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던 것 같아.
[보선] 제임스 메디슨이 전국적으로 상당히 높은 지지와 인기를 얻은 대통령이었네요.
[해월] 사실 제임스에 대해 많이 얘기하지는 않지만 그가 8년 임기를 마치고 떠났을 때 상당히 인기가 있었어. 2대 대통령 쟌이 제임스의 퇴임에 이르러 그의 공로를 치하하며 “제임스는 그의 전임 3명의 대통령인 죠지, 토마스 그리고 쟌이 함께 이루었던 것보다 더 영광스럽고 더 확고한 국가를 만든 대통령”이라고 평가했을 정도야. 1809년 3월 4일 토마스가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가운에 연방하원 의사당에서 ‘마샬’(John Marshall) 대법원장에게 대통령 선서를 마침으로서 정식 취임했고, 부통령에 당선된 죠지 클린턴도 미국 역사상 최초로 두 명의 대통령과 함께 일한 부통령이 되었지. 그는 역사상 두 명 중 현직 부통령이 차기 부통령으로 당선된 사람이기도 해.
[보선] 높은 인기를 안고 업무를 시작한 제임스이니까 대통령으로서의 직무를 무난히 수행할 수 있었겠지요?
[해월] 好事多魔라 안 그래? 토마스에 비해 제임스는 시작부터 안, 밖으로부터 시달림을 당했지. 정치를 시작한 처음부터 동지였던 제임스 몬로와 죠지 클린턴이 정적이 되어버렸고, 수출금지법을 만드는 바람에 연방주의자들이 다시 힘을 얻기 시작했어. 내각구성 문제부터 몬로와 클린턴의 반대로 가장 신뢰하던 ‘엘벗 겔라틴’(Albert Gallatin)을 국무장관에 임명하려는 뜻에 실패하고 대신 엉뚱한 ‘로벗 스미스’(Robert Smith)를 임명했다가 2년 뒤에 가까스로 사임시키기도 했어. 대통령이 같이 일할 수 있는 사람을 내각에 못 넣었으니 말이 안 되잖아. 제임스는 그래서 각료회의를 열기 싫어했다고 해. 대신 할 수 없이 재무장관에 다시 임명한 겔라틴과의 대화만 자주 가지면서 국정을 이끌어나간 모양새가 되었지.
[보선] 어째 불안한 것이 앞으로 4년이 지레 걱정되네요!
[해월] 하하! 크게 걱정할 건 없어! 제임스가 현명하게 잘 풀어나갈 테니까! 제임스는 토마스의 정책 중 세금을 적게 거두고 국가 부채를 줄이는 정책을 유지하면서 마찰을 줄이고, 1811년에는 전부터 설립을 반대했던 ‘일차 미국연방은행’(First Bank of the United States)의 허가기간이 만료가 되자 폐기되도록 조치를 취했어. 제임스의 통치기간 동안 가장 큰 문제라면 1812년 영국과의 두 번째 전면전쟁을 치르는 일이었어. ‘1812년의 전쟁’(War of 1812)이라 불리는 이 전쟁을 통해 미국은 많은 어려움과 교훈을 얻게 되지.
[보선] 1812년의 전쟁은 역사적으로 매우 유명한 전쟁이잖아요. 영화도 있고 소설과 음악 그리고 ‘1812’라는 이름이 들어있는 상품도 있는 것으로 알아요.
[해월] 맞아! 영국을 상대로 독립전쟁을 치르고 1783년 평화조약을 맺으면서 승리는 했지만 영국은 평화조약상의 내용들을 의도적으로 이행하지 않았어. 미국 내 영국군 진지를 완전히 철수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은 국토를 완전히 인수하지 못했지. 프랑스와의 전쟁을 계속하게 된 영국은 프랑스와 교역을 하러 대서양을 건너온 미국상선들을 공격하거나 나포하고 선원들을 영국군으로 징집하는 등 피해를 계속 입히고 있었어. 또한 프랑스도 영국군 못지않게 미국을 괴롭혔지. 영국과 전쟁을 벌이면서 미국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쟌이 이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프랑스는 미국에 배신감을 가지고 미국과 거의 전쟁 직전까지 갔었잖아. 프랑스와 영국 양국으로부터 시달림을 받던 토마스는 통상금지법을 만들기까지 했지만 실패했고, 제임스 대에 와서 영국은 더욱 심하게 미국을 괴롭혔지.
[보선] 영국은 당연히 미국의 일거수일투족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거예요?
[해월] 당연했겠지. 제임스는 프랑스의 나폴레옹을 통해 프랑스와 관계정상화를 꾀하는 한편 영국과의 정상화도 이루는 지렛대로 사용하려 했지만 결국 영국이 동조하지 않으면서 실패하고 말았어. 미국상선을 공격하지 않는 쪽과 통상을 하겠다고 유도책을 써보았지만 양국 모두 받아들일 수가 없는 정책이었지. 결국 제임스는 영국과 전쟁을 치르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안이라고 결정하고 1812년 6월 1일 의회에 전쟁선포를 요구했어. 중립국인 미국의 상선 및 화물을 공해상에서 나포하면서 중립국가의 명예를 훼손한다는 설명과 함께였지. 당시 상황에 많은 미국인들이 ‘제2의 독립전쟁’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의회도 매파들을 선출하면서 연방주의파들과 일부 민주-공화주의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가까스로 전쟁을 선포하게 되었지. 이때가 6월 18일이었는데 앞에서도 설명한 바 있지만 미국은 전쟁을 치를 입장이 전혀 아니었잖아. 토마스가 제임스와 함께 수년 전부터 미군의 전력을 대폭 줄여버렸기 때문에 전쟁을 선포한 시점에는 정규군의 전력은 훈련받지 못한 지방 민병대가 전부였어. 그나마 북부 뉴 잉글렌드 지역은 협력을 거부한 상태였고.
[보선] 맞아요. 토마스는 힘센 연방군대의 존재자체를 부정했었잖아요. 군대를 거의 해산한 상태였는데 전쟁을 선포했으니 독립전쟁 초기와 별 다를 것이 없었겠어요.
[해월] 제임스의 판단으론 영국이 나폴레옹과 전투를 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이 영국의 지배하에 있는 케나다 (Canada)를 공격하면 쉽게 정복할 수 있고 따라서 영국이 전의를 상실하여 곧 전투를 끝낼 수 있을 것으로 보았어. 제임스는 대서양을 운항하는 상선을 보호하기 위해 영국군이 주둔하고 있는 케나다를 세 갈래로 공격해 들어갔지.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뉴욕 북부 ‘나이에가라 요새’(Fort Niagara)를 강화하고 동시에 인근의 ‘디트로이트 요새’(Fort Detroit)를 보호하면서 영국군의 보급을 끊기 위해 ‘몬트리얼’(Montreal)로 공격하는 전략이었어. 물론 성공하면 영국의 기선을 끊고 미국상선을 보호하는 길이었긴 하지만, 미국의 정규군이 없는 데다 주 민병대만으로 진격해야 했고, 그나마 북부주 주지사들이 협력하지 않는 상황이라 전황이 어떻게 전개되었을까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을 거야.
[보선] 군병력과 보급선이 약한데 침공이 뜻대로 이루어질지 걱정이네요.
[해월] 게다가 영국군은 잘 조직된 직업정규군이고 더욱이 북부에서 조직이 잘된 ‘테컴사’(Tecumseh) 추장이 이끄는 원주민들이 영국군을 돕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군은 힘 한번 제대로 못쓰고 무너지기 시작했지. 8월 16일 디트로이트 요새를 침공한 영국군과 원주민의 기세에 술에 취해있던 ‘윌리엄 헐’(William Hull) 소장은 허겁지겁 백기를 내걸고 무조건 항복을 해 버렸지. 헐 소장은 나중에 군사재판을 받고 총살형이 내려졌지만 웬일인지 제임스는 그를 구해주었어. 10월 13일에는 케나다 ‘퀸스턴 하잇츠’(Queenston Heights) 전투에서 영국군 사령관 ‘아이젝 브락’(Issac Brock) 소장이 전사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군이 뉴욕의 ‘알바니’ (Albany)로 퇴각해 버려 열악한 위치에 있던 몬트리얼의 보급선 장악에도 실패하고 말았지. 게다가 전쟁자금이 없어 뉴욕시와 필라댈피아에 있는 금융업계에서 융자를 받아 사용했다니 한심하기까지 했어. 중앙은행은 없애버리고 정부가 사금융에 의존해서 전쟁을 하고 있으니 말이야.
[보선]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요. 국가 망신 아닌가요? 제임스의 인기가 뚝 떨어졌겠어요.
[해월] 당연히 그랬겠지만 전쟁 중에 7번째 대통령 선거를 맞이하는 바람에 천운으로 살아남았지. 1812년 10월 30일부터 12월 2일까지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제임스는 재선 되었어. 아직까지 전해 내려 오는 말로 ‘전쟁 중에는 지도자를 바꾸지 않는다’는 역사가 이때부터였지 않았나 해. ‘죠지 부시’(George Bush) 대통령도 인기가 바닥이었음에도 ‘9.11’ 사건이 발생하고 이락과 전쟁을 하면서 재선 되었었잖아. 제임스는 대선 때 클린턴 부통령이 사망하자 메사추세츠 주지사 ‘엘브릿지 게리’(Elbridge Gerry. 1744-1814)를 부통령후보로 선임해 반대파들이 내세운 클린턴의 조카 ‘드윗 클린턴’(DeWitt Clinton) 뉴욕 부지사와 ‘제레드 잉거솔’(Jared Ingersoll) 변호사 팀과의 대선에서 선거인단 128표를 얻어 89표를 얻은 그들을 물리쳤지.
[보선] 정치운은 대단하네요.
[해월] 재선의 기쁨은 뒤로하고 제임스는 러시아가 종전중재를 제의하자 얼른 그가 신임하는 겔라틴 재무장관과 쟌의 장남인 ‘쟌 퀸지 에덤스’(John Quincy Adams. 6대 대통령)를 평화협상 대표로 급파했어. 이때 잠시 전장으로부터 희소식도 날라 들었지. 1813년 9월 10일 북쪽 케나다와 접경하는 ‘이어리 호수’(Lake Erie)에서 미해군이 영해군을 격파했다는 소식이 들어오고, 1813년 10월 5일에는 케나다 북쪽 ‘테임즈’ (Thames)에서 ‘윌리엄 핸리 헤리슨’(William Henry Harrison) 장군이 이끄는 미육군이 영국군과 테컴사의 원주민 연합부대를 섬멸하고 테컴사가 전사하면서 원주민들이 북쪽 케나다로 완전히 퇴각하고 말지. 또한 1814년 3월에는 남쪽 알라베마쪽에서 ‘엔드류 젝슨’(Andrew Jackson. 7대 대통령) 소장이 ‘홀스슈 밴드’ (Horseshoe Bend) 전투에서 승전고를 전해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군의 공격은 식지 않아 미군의 케나다 침공을 막아내고 나이에가라 요새도 점령하며 1813년 후반에는 버팔로(Buffalo) 시를 불태우고 있었어.
[보선] 막강한 영국군과 전투를 하겠다고 나섰으니 각오를 단단히 해야 했겠지요?
[해월] 기쁜 소식도 잠시, 전투상황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지. 영국 주력부대가 1814년 8월 14일에 버지니아 남쪽 해안인 ‘체사픽 만’(Chesapeake Bay)을 통해 상륙해서 북상하더니 메릴렌드 주 ‘블라댄스버그’(Bladensburg)로 침공해 왔어. 일찍이 제임스가 그곳에 있는 ‘윌리엄 윈더’(William Winder) 장군이 이끄는 부대를 격려차 방문한 적이 있는데 8월 24일 블라댄스버그가 뚫리고 나니 영국군은 워싱턴 디씨까지 순식간에 쳐 들어갔지. 질주해 들어오는 영국군에 쫓겨 제임스는 그대로 말을 타고 버지니아로 도주하고 말았지. 하마터면 영국군에 잡힐 뻔했던 제임스는 워싱턴으로 질주해 들어온 ‘로버트 로스’(Robert Ross) 소장이 이끄는 4,500명의 영국군이 백악관과 국회의사당 등 연방정부 건물을 불태웠다는 소식을 멍하니 들을 수밖에 없었어. 제임스의 부인 달리(Dolley Todd Madison. 1768 - 1849)도 겨우 죠지 워싱턴의 입상 초상화만 챙겨서 부리나케 수도를 버리고 버지니아로 도피했어. 치욕의 순간이었지.
[보선] 불로 까맣게 탄 백악관과 국회의사당을 바라보는 상상만 해도 끔찍하네요. 어떻게 그 치욕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요?
[해월] 그 치욕의 순간이 미국인들 마음속에 남아있겠지만 태평양전쟁이 벌어지던 1941년 12월 7일 일본군이 하와이 ‘진주만’(Pearl Harbor)을 공격해 엄청난 피해를 입혔을 때를 기억하는 것만큼은 아닌 것 같아. 그때 이후로 영국과 미국은 피를 나누는 전쟁을 함께 해 나가고 있으니까 말이야. 다시 워싱턴으로 돌아온 제임스는 ‘쟌 테일러 3세’(John Tayloe III) 대령의 저택인 ‘옥타곤 하우스’(The Octagon House)를 대통령 임시거처로 삼고 전투를 지휘했지. 천만다행인 것은 이때부터 미국 내 전투는 영국의 패전으로 이어져 가고 있었어. 워싱턴 디씨를 함락시킨 영국군은 북쪽 ‘볼티모어’(Baltimore)로 이동했는데 미국군에 패퇴하고 말았고, 남쪽에 있는 영해군은 9월에 체사픽만을 떠났어. 9월 11일에는 케나다에서 내려온 영국군이 뉴욕의 ‘플라츠버그’(Plattsburgh)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역시 미국군에 패하고 말았지. 이때부터 영국 내의 국민들이 종전을 주장하기 시작했는데, 1815년 1월 8일에는 남쪽 ‘뉴 올리언즈’(New Orleans)에서 엔드류 잭슨 소장이 이끄는 미국군이 영국군의 항복을 받아내면서 끈질긴 영국군의 남부 공략에 종지부를 찍고 말았지. 그 후 제임스는 특사로 나가있던 쟌 퀸지 에담스로 부터 종전에 합의를 본 ‘갠트 조약’(Treaty of Ghent)이 1814년 12월 24일에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어.
[보선] 드디어 종전협상이 결실을 거두었군요.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해월] 다행이지. 제임스는 곧 이 조약을 상원에 보냈고, 상원에서는 1815년 2월 16일 비준하면서 마침내 미국 내 전면전쟁이 끝이 났지. 전쟁에 따른 말은 많았지만 그래도 전쟁을 승리로 이끈 제임스의 정치적 입지는 높아졌고, 미국 원주민들은 대부분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그들이 지켜왔던 땅과 독립성을 상실하고 말았어. 한 가지 더 역사적인 사건은 나폴레옹의 프랑스가 1815년 6월의 ‘워러루 전투’(Battle of Waterloo)에서 영국에게 패하면서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고 오랫동안 미국의 교역을 위협하던 양국의 적대행위도 종료했다는 사실이야.
[보선] 와! 해상에서의 자유를 얻었으니 미국민의 생활이 많이 좋아졌겠어요!
[해월] ‘제2의 독립전쟁’에서의 승리가 두 번째 임기를 이어가는 제임스와 미국민에게 소위 ‘좋은 기분의 시대’ (Era of Good Feelings)라는 국가적 분위기를 창출했지. 국가정책에 반대성향만 보이던 연방주의파가 국가단결을 외치는 많은 주에서 따돌림을 받게 되고 제임스는 그동안 스스로 반대하던 여러 가지 프로그렘을 슬쩍 받아들임으로써 연방주의자들의 쇠퇴를 부추겼어. 전쟁자금 마련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알랙산더 헤밀턴이 주창하던 ‘연방중앙은행’의 필요성이 강하게 부각되었고, 육군과 해군 양성의 필요성, 미국 제조업 보호를 위하면서 국가재정에 도움이 되는 관세의 증대, 미국 내 도로와 운하 등을 포함한 사회간접자본의 확충에 연방정부가 투자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헌법개정의 필요성 등 새로운 정책을 펼치게 되었고 이에 박수로 화답하는 정적들이 생기기 시작했지. 1815년의 14차 연방의회는 이에 화답하여 ‘2차 연방은행’ (Second Bank of the United States)의 설립을 허가하며 25년이라는 긴 존립기간을 주었지. 또한 ‘1816년의 관세법’(Tariff of 1816)이 제정되어 외국제품에 대한 고관세가 책정되기 시작했고, 미국의 동부와 서부를 잇는 최초의 고속도로 개념의 ‘컴버렌드 국도’(Cumberland Road)라는 도로 건설에 대한 연방 투자가 시작되었지. 이후로 여러 곳에 도로와 철도 그리고 교량들의 건설이 시작되었어. 마찻길과 도보길이 교체되면서 미국 경제발전에 획기적 변화가 오기 시작한 거야.
[보선] 국가가 발전하려면 제일 먼저 할 일은 정파의 이해득실을 떠나 화합하고 단결하여 국민과 국가를 우선으로 정책을 추진해야 하잖아요? 다행히 뒤에서 발목을 잡는 정파가 힘을 잃고 정부는 중심을 잡고 일을 추진하니 미국의 미래가 지극히 희망적이라 보이네요. 물론 아직은 초창기니까 쉽지 않았겠지만요.
[해월] 보선이가 정확이 본거야. 정작 해야 할 일은 놔두고 딴전만 한다면 발전할 국가가 없고 행복할 국민은 없겠지. 제임스는 바로 그런 주제에 중점을 둔 정책을 펼친 것이지. 1816년 11월 1일부터 12월 4일까지 전개된 미국의 8번째 대통령선거에서 제임스와 토마스는 ‘제임스 몬로’(James Monroe. 1758 – 1831) 현직 국무장관을 대통령 후보로 추천하여 후보선출 전당대회를 무난히 통과하게 했지. 제임스 몬로는 본선에서 점점 쇄약 해져가는 연방주의당에서 출마한 뉴욕 상원의원 ‘루훠스 킹’(Rufus King)을 선거인단 183 대 34로 가볍게 물리치고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어. 부통령에는 남북 균형을 위해 선택한 뉴욕 주지사 ‘데니얼 탐킨스’(Daniel D. Tompkins)가 당선되었지. 이로서 제임스는 8년간의 임무를 마치고 같은 버지니아 출신인 제임스 몬로에게 바통을 넘기고 명예로운 은퇴를 하게 되었어. 제임스 몬로는 미국 대부분 주에서 승리했고 국민투표에서는 68.2%라는 지지를 받아 상큼한 출발을 하게 되었지.
[보선] 8년이란 세월 동안 전쟁까지 치르면서 수도를 적에게 내어준 역사를 만든 제임스였던 만큼 솔직히 물러나는 입장이 그리 심적으로는 화려하진 못했을 것 같네요.
[해월] 승전고를 울렸다고는 하지만 보선이 말처럼 아무 일 없었던 듯 가벼운 마음은 아니었겠지. 권좌에서 물러난 제임스에게는 권력의 무상함도 있었겠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주머니 사정이 말이 아니었던 것이야. 죠지나 토마스도 경제사정이 형편없었는데 원인을 보면 대농장 주인으로 부동산 자산은 많이 있었지만 농장운영에서 자그마치 8년씩이나 떠나 있어야 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대신 운영해서 동산을 만들어 줄 만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지. 살펴보면 세 사람 모두 자신의 뒤를 돌봐 줄 친아들이 없었어. 결국 퇴직하고 고향인 몽피리어에 돌아온 제임스도 부인의 아들을 입양했지만 무능력자에다 알코올중독자였고 그 스스로가 엄청난 빚을 져 이를 갚아주느라고 땅까지 처분해야 했지.
[보선] 아! 퇴임한 대통령이 자기 관리하나 할 수 없을 정도로 현금이 말랐다는 말씀은 속을 쓰리게 하네요. 연금이나 사회보장제도도 당연히 없었을 테니까 재정상태가 불안정한 상황이었으니 갑갑하기만 합니다.
[해월] 퇴임 후 제임스가 한 일은 별로 없었어. 그는 될 수 있으면 정치에 간섭하지 않으려 했고, 1826년 토마스가 사망하자 그를 이어 제2대 버지니아 대 총장(Rector) 직을 맡아 1836년 본인이 사망할 때까지 일을 보았을 뿐이야. 말년에 이르러 자신이 미국역사에 어떻게 비칠까를 염려한 제임스는 소장하고 있던 문서나 편지 등을 다시 꺼내 혹시 오해가 될 만한 것이 없나 점검하고 수정하는데 시간을 보냈지. 필요하면 토마스의 필적도 고쳐서 내용을 바꾸기도 했다고 해. 끝내는 마음의 불안이 몸 건강을 해쳐 툭하면 몸져눕는 날이 많아졌지.
[보선] 그 시대에 80대 중반까지 살아오면서 많은 생각과 일을 해왔으니 몹시 피곤했을 거예요?
[해월] 나도 동의해! 1836년 6월 28일 아침상을 받은 제임스가 음식을 삼키지 못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던 사랑하던 질녀가 “왜 식사를 못하세요, 아저씨?” 하고 물어보니 제임스가 “그래, 그냥 마음을 바꿨을 뿐이야!” 하고 간단히 대답하고 상을 물렸는데 이것이 그의 마지막 순간이었지.
[보선] ‘이 세상을 떠나겠다고 마음을 바꿔먹었다’는 하직의 말씀 같네요.
[해월] 그렇게 조용히 떠났어. 그의 유해는 몽피리어 농장 내 가족묘에 안장되었고, 유언을 만들면서 재산의 상당 부분을 흑인인권단체인 ‘미국 식민지 소사이어티’(American Colonization Society. 제임스는 이 단체의 회장을 맡았고, 이 단체는 노예였던 흑인들을 아프리카의 라이베리아로 보내주는 역사를 했습니다)와 모교인 프린스턴대 그리고 총장을 지냈던 버지니아대에 남겼어. 부인에게는 생각보다 적은 당시 돈 3만 달러를 남기고 36명의 노예도 넘겨주면서 그들이 승낙하기 전에는 팔지 말라고 했지. 너무 적은 유산을 받은 부인 달리는 남편 제임스가 소유했던 각종 문서들을 정부와 의회에 팔아 생활했는데 끝내 가난을 이겨내지 못했어. 달리는 그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너무 가난하고 빚이 많아 노예도 모두 처분하고 몽피리어 농장도 팔아버리고 말았지. 워싱턴 디씨에서 여생을 살던 그녀는 남은 것들을 모두 아들 페인에게 남기고 1849년 7월 12일 81세를 일기로 사망하고 이듬해 남편 제임스가 있는 몽피리어로 이장해 옆에 잠들어 있어.
[보선] 역사의 한 장이 접어지는 순간이네요. 4대 대통령 제임스를 기념하는 유적에는 어떤 것이 있어요?
[해월] 우선 몽피리어 농장이 ‘국가사적지’(National Historic Landmark)로 지정되어 있지. 국회도서관 일부가 ‘제임스 메디슨 기념빌딩’(James Madison Memorial Building. 첫머리 사진 참조)으로 이름 지어져 공식 기념관이 되어있어. 1986년에 의회에서 미국헌법 200주년을 기념하여 ‘제임스 메디슨 기념 연구 재단’(James Madison Fellowship Foundation)을 설립했고, 도시 이름으로는 위스컨신 주 메디슨 시와 알라베마 주 메디슨 카운티가 있기도 해. 그 외에 뉴욕의 ‘메디슨 스퀘어 가든’(Madison Square Garden), 버지니아 주에 ‘제임스 메디슨 대학교’(James Madison University)와 미해군 전함 ‘제임스 메디슨호’(USS James Madison) 등이 그를 기리고 있지.
* 4대 대통령 제임스 메디슨의 공식 서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