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대 제임스 먼로-1 of 2: 부단한 기회의 조리사 1758-1816
미합중국(the United States of America)이 1776년 7월 4일 탄생하면서 영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전쟁을 8년간 치르고, 임시정부를 통해 헌법을 제정한 후 정식으로 출범한 1789년까지의 과정에 참여한 지도자들을 우리는 ‘건국의 아버지들’ (Founding Fathers)이라고 부릅니다. 이들 중에서 다섯 분이 초창기 대통령을 지냈습니다. 초대 죠지 워싱턴 (George Washington), 2대 쟌 에담스(John Adams), 3대 토마스 재퍼슨(Thomas Jefferson), 4대 제임스 메디슨(James Madison) 그리고 5대 제임스 먼로(James Monroe)가 그들입니다. 1758년생인 제임스 먼로(이하 제임스)는 다섯 번째 대통령으로 미국을 이끈 지도자인 동시에 건국의 아버지들 대열에서 마지막으로 대통령으로 봉직한 사람이었습니다. 제임스는 또한 ‘버지니아 왕조’(Virginia Dynasty. 첫 다섯 명의 대통령 중 네 명이 버지니아 주 출신이라는 뜻에서 부쳐진 별칭)의 마지막 대통령이기도 합니다. 다른 분들이 부족했다기보다 세대가 바뀌었다고 봐야겠지요. 제임스 다음 차례인 6대 대통령이었던 ‘쟌 퀸지 에담스’(John Quincy Adams)가 1767년에 태어났지만 정작 대통령으로 당선될 차례가 온 것은 1825년으로 57세가 되어서였으니 건국을 위해 애썼던 앞세대 ‘아버지’가 제임스를 끝으로 거의 무대에서 사라졌으리라 생각됩니다.
1817년부터 1825년까지 두 번의 임기인 8년간 대통령직을 수행한 제임스는 육군 소령, 민병대 대령, 변호사, 정치가, 외교관, 행정가 등 다양한 인생수업을 거치고 다지면서 미국이 추구해야 할 방향을 제시한 지도자였습니다. 특히 동생의 사망이라는 슬픔에서도 전쟁에 처한 국가를 위해 휴학을 하면서까지 군에 입대한 그는 전투 중 중상을 입고 사경을 헤매었던 기억을 갖고 있는 애국자 중 한 명이기도 합니다.
1825년 3월 4일 퇴임한 제임스는 전임자들과 마찬가지로 경제적 어려움으로 무거운 여생을 보냈고, 1831년 7월 4일 73세를 일기로 사망하면서 쟌과 토마스와 같이 독립선포일에 사망한 세 번째 대통령으로서 기념비적 역사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知源] 건국의 아버지들 대열에서 제일 마지막으로 대통령을 지내셨다니까 왠지 신생 미국의 살아있는 증인 같은 느낌을 주는 분이시네요. 그분의 선조들은 어떤 분이셨어요, 선생님?
[海月] 지원이의 말대로 미국의 산 증인임에 틀림없지. 동시대 분들처럼 제임스의 선조들에 대한 기록도 영 시원치 않아. 오래전 기록들이 훼손되거나 분실되었기 때문이겠지만 가족관계를 증명하는 확실한 자료가 없기 때문에 일단 추정하는 자세로 들여다볼 뿐이야.
우선 미국으로 건너온 제임스의 선조는 현존하는 토지대장의 소유자 내역과 지역모임 참석자 명부 그리고 역사가들의 연구서 등을 통해 1620년경 '스카트렌드'(Scotland)에서 태어나 1637년경 호기심으로 미국으로 건너온 청년 ‘엔드류 먼로’(Andrew Monroe. Munro라고도 하는데 후에 Monroe로 변경된 것 같음)인 것으로 알려져 있어. 제임스의 고조부로 알려진 그의 부모가 누구인지는 알 길이 없고, 엔드류는 1637년에 메릴렌드 주에 있는 ‘캔트 아일렌드’(Kent Island)에 도착해서 정착했지. 이곳은 버지니아 주 식민지 주무장관이자 '제임스타운'(Jamestown)의 공식측량사였던 ‘윌리엄 클레이본’(William Claiborne)이 1627년에 버지니아 주지사로부터 토지조사 허가를 받고 진출해 1632년 지역의 ‘써스캐하낙’ (Susquehannock) 원주민으로부터 땅을 사들여 자리를 잡기 시작하였던 곳이었지.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 영국왕 찰스 1세가 1632년 ‘켈버트’(Calvert) 가문에 ‘메릴렌드’(Maryland)라는 식민지주 창립을 명하고, 1634년에 이들 가문 사람들이 ‘세인트 메리스’(St. Mary’s)로 이주해 오면서 무력충돌이 생겼어. 클레이본이 소유권을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했지만 결국 재판에서 패소하고 버지니아로 돌아갔고, 엔드류 먼로는 이들 사이에 끼어서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던 거야. 그러면서 버지니아 주라는 곳을 알게 되기도 했지.
[지원] 제임스의 고조부 엔드류 청년이 미국에서 먼로집안을 창설하는 선조가 된 것이 1637년부터인 셈이네요.
[해월] 현재로선 그렇게 알아. 역사가들이 찾은 기록에 의하면 엔드류는 1642년 7월에 세인트 메리스 카운티에서 담배 50 파운드를 전쟁자금조로 정부에 바쳤다고 되어있고, 8월 22일에도 또 세금을 바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메릴렌드 주에서 토지를 소유한 ‘자유인’이 되어 있었고, 9월 5일에 열린 ‘지역회의’에 참석자로 등록된 확인도 있지. 엔드류는 1645년에 찰스 카운티에서 1629년에 태어난 성명미상의 여인과 결혼해 ‘죠지’라는 아들을 하나 두었는데 부인은 1651년에, 아들은 1668년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있어. 1645년에는 일단의 반정부 폭동에 가담하였다가 재산이 몰수당하고 현상금이 목에 걸리기도 했는데 1647년에 일행과 함께 메릴렌드에서 버지니아로 강을 건너 도주(?) 한 것 같아. 나중에 모두 사면령이 내려져 풀려났다고 해.
[지원] 고조부가 반정부 폭동에 가입했다가 도주를 했다니 좀 이상하게 느껴지네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요.
[해월] 그런 기록이 있다고 하니 어쩔 수 없지. 그래도 1650년대 이후 들어 엔드류는 버지니아 주 여러 곳에서 당시 규정에 따라 토지를 무상으로 분양받았지. 1650년 6월 8일 ‘노섬버렌드 카운티’(Northumberland County)에 200 에이커, 1652년 11월 29일에도 같은 카운티에 440 에이커, 1662년 3월 18일에도 440 에이커를 분양받았고, 1666년 10월 26일에는 ‘웨스트모어렌드 카운티’(Westmoreland County)에 920 에이커 땅을 분양받았지. 분양받았다는 것은 정부에서 경작을 조건으로 무상으로 신청자에게 소유권을 이전해 주는 것인데, 그때는 영국정부에서 주민을 정착시키기 위해 신대륙에 널브러진 땅을 공짜로 주는 제도가 있었기 때문이야.
[지원] 와! 저도 그때 태어났으면 땅부자가 되었겠지요?
[해월] 왜 아냐? 위에서 밝혀져 있는 것만 해도 2,000 에이커인데 근 250만 평의 대지를 무상으로 받았으니 땅부자지. 정부의 너그러운 토지제도 덕분에 땅부자가 된 엔드류는 한편 1651년에는 두 번째 결혼을 하게 돼. 민병대 대령으로 일한 것으로 알려진 ‘쟌 알랙산더’(John Alexander.)의 딸 ‘앨리자배스’(Elizabeth. 1635 -
1707)와 결혼하고 그녀와 사이에 3남 3녀를 두었어. ‘메리’(Mary. 1655-1661), ‘엔드류 2세’(Andrew II. 1661-1714), ‘앨리자배스’(Elizabeth. 1662-1708), ‘윌리엄 1세’(William I. 1666-1737. 엔드류의 증조부), ‘죠지’(George. 1668-1679), ‘스잔나’(Susannah. 1668-?) 등이야. 고조부 엔드류는 1668년 버지니아 주 웨스트모어렌드 카운티 ‘닥터스 포인트’(Doctor’s Point)라는 곳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지원] 증조부 윌리엄은 어떤 분이세요?
[해월] 윌리엄은 1666년 버지니아 주 웨스트모어렌드 카운티 ‘먼로 크릭’(Monroe Creek)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고, 두 살 때 아버지가 사망해 ‘윌훠드’(Willford)를 대부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어. 윌리엄은 1689년 3월 22일 버지니아 주 ‘노던 낵’(Northern Neck)에서 ‘마가랫 보우칵’(Margaret Bowcock)을 부인으로 맞이하였지. 윌리엄에 대한 그 이상의 기록은 현재로선 카운티에 등록되어 있는 유언장 내용이 전부인데, 그에 따르면 그의 이름이 ‘윌리엄 젠트 먼로’(William Gent Monroe)로 ‘gentleman’이라는 뜻의 'gent'가 들어있는 것으로 보아 사회적 지위가 높았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지. 유언장에는 아들 넷, 딸 셋, 그리고 손주 여러 명이 기록되어 있어. 연대에 대한 기록은 없고 자식들의 이름은 ‘엔드류’(Andrew. 제임스의 할아버지), ‘토마스’(Thomas), ‘제인’(Jane), ‘죠지’(George), ‘메리’ (Mary), ‘세라’(Sarah)와 ‘윌리엄 2세’등이 있어. 윌리엄은 1737년 4월 26일 웨스트모어렌드 카운티 ‘워싱턴파’ (Washingtonpar)에서 71세를 일기로 사망했지.
[지원] 증조부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군요. 할아버지에 대한 기록은 많이 남아있나요?
[해월] 할아버지에 대한 기록도 신통치 않아. 조부 엔드류는 1692년 웨스트모어렌드 카운티에서 태어나 1727년 같은 카운티에서 ‘크리스천 타일러’(Christian Tyler)와 결혼했고, 1731년에는 동 카운티에서 치안담당관’(Sheriff)으로 일했었지. 이들 두부는 2남 3녀를 두었어. 큰 아들이 ‘스팬스’(Spence. 제임스의 아버지)였고, 딸 ‘앨리너’(Elinor), ‘세라’(Sarah), ‘제인’(Jane) 그리고 ‘엔드류’(Andrew) 등이야. 그는 1735년에 태어난 카운티에서 43세를 일기로 사망했어.
[지원] 아버지 스팬스에 대한 정보가 많았으면 좋겠네요.
[해월] 웬일인지 아버지 스펜스에 대한 정보도 남아있는 것이 많지 않은 것 같아. 1727년 웨스트모어렌드 카운티에서 태어난 그는 아버지로부터 약 550 에이커에 달하는 농장을 상속했고, 1752년에 ‘킹 죠지 카운티’ (King George County)에 자리 잡은 영국 웨일즈 출신 부유한 집안의 여인 ‘앨리자배스 존스’ (Elizabeth Jones. 1730-1772)와 결혼해 ‘앨리자배스’(Elizabeth), ‘제임스’(James. 5대 대통령), ‘스팬스’(Spence), ‘엔드류 오거스틴’(Andrew Augustine)과 ‘조샙 존스’(Joseph Jones)등 4남 1녀를 두었지. 1774년 2월 16일 웨스트모어렌드 ‘먼로 홀’(Monroe Hall)에서 47세를 일기로 일찍 사망하면서 ‘후래대릭스버그’ (Fredericksburg)에서 판사로 봉직하던 외삼촌 ‘조샙 존스’ (Joseph Jones)가 아버지를 대신해 아이들을 보호하게 되었지. 기록이 너무 적은 것으로 보아 당시 버지니아 주가 독립전쟁의 중심에서 격렬한 전투를 치르면서 많은 문서가 훼손되었던 것으로 보이네.
[지원] 1774년이면 제임스가 16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어린 시절이 많이 어려웠을 것으로 보이네요.
[해월] 16살이면 실제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는 미성년이었는데 1772년 어머니가 막내를 출산하고 나서 바로 돌아가신 후 아버지마저 2년 후에 그들의 곁을 떠났기 때문에 제임스는 슬퍼할 겨를도 없이 가장이 되었지. 만약 그들 형제들 곁에 아버지 같은 외삼촌이 없었다면 훗날의 제임스는 없었을지도 모르지.
[지원] 다행히 외삼촌이 계셨네요. 그리고 판사로 재직하셨다니 제임스 형제들로서는 매우 듬직했겠어요.
[해월] 요즘 '아빠찬스', '엄마찬스'라는 용어가 말해주듯 부모덕을 본 사람들을 일컫는데 어린 제임스와 그 형제들이 '외삼촌찬스'라는 기회를 잘 보았으리라 생각해. 제임스는 열한 살 때인 1769년 카운티에 유일한 학교이면서 버지니아 내에서 명문이었던 ‘켐블타운 아카데미’ (Campbelltown Academy)에 등록했는데, 그나마 아버지 농장에서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1년에 11주밖에 공부를 못했다고 해. 그래도 학교에서 배운 라틴어와 수학이 높은 수준이었기 때문에 나중에 외삼촌이 입학시켜 준 ‘윌리엄 앤 메리 대’(College of William and Mary)에서 바로 수업을 받을 수 있었지. 그리고 이 학교에서 그의 영원한 친구가 된 ‘쟌 마샬’(John Marshall)이라는 미래의 대법원장을 만나게 되었어.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는 바람에 졸지에 고아가 된 동생들을 돌보아야 할 입장이라 열여섯 살에는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었지. 그래도 외삼촌 조샙 존스 판사가 그를 대학에도 입학시켜 주고 제임스에게 미래의 정치적 후원자들인 ‘페트릭 핸리’(Patrick Henry)와 ‘토마스 재퍼슨’ (Thomas Jefferson) 그리고 ‘죠지 워싱턴’ (George Washington)에게도 인사시켜 주었어.
[지원] 제임스에게는 외삼촌의 도움이 엄청 컸네요. 운명적인 만남으로 보여요.
[해월] 지원이도 이젠 ‘운명’이란 말의 뜻을 이해한 것 같구나. 외삼촌이 만나게 해 준 그 사람들이 바로 운명적 만남이었겠지. 어쨌든 제임스의 어린 시절이 힘들게 가고 청년으로 접어드는 대학시절이 그를 한창 유행하던 ‘운동권학생’으로 이끌어갔지. 알다시피 이 시기는 영국정부가 무리한 징세정책을 실시하고, 식민지에 실시한 여러 정책이 주민들의 심각한 반발을 일으키고 있었잖아. 당시 버지니아 주지사였던 ‘던모어 4대 백작’ (4th Earl of Dunmore) ‘쟌 머레이’(John Murray)가 의회의원들의 항의가 심해지자 의회를 해산시키고 영국해군을 통해 민병대가 가지고 있던 무기들을 압수해 버렸어. 그러자 민병대 대원들과 제임스를 포함한 대학생들이 주지사가 압수해 간 화약등 무기를 반환하라는 항의데모를 했지. 여기에 페트릭 핸리가 이끄는 윌리엄스버그 민병대원까지 합류하자 주지사는 할 수 없이 돈으로 보상하겠다고 했어. 그러나 이에 만족지 못한 대학생들이 학교에서 군사훈련을 지속했고, 끝내 1775년 6월 24일에 민병대원들과 대학생들이 윌리엄스버그에 있는 주지사궁을 침입해 수백 정의 총과 칼을 탈취했어. 이때 제임스도 함께했지.
[지원] 이건 운동권학생이 아니라 반정부 게릴라 아닌가요? 무서운 학생이었네요!
[해월] 체포될까 두려웠는지 제임스는 1776년 초 18세에 학교를 휴학하고 신설된 ‘미국군’(Continental Army) 버지니아 제3연대에 입대했어. 바로 직전에 동생 스팬스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망했는데도 학교를 그만두고 군에 입대한 것을 보면 절박한 상황이 있었다고 봐야겠지. 군대에서는 대학까지 다녔던 제임스에게 중위계급을 주었어. 수개월 훈련을 마친 그는 연대소속으로 뉴 욕과 뉴 저지 전투에 참전했고, 그해 12월에는 죠지가 이끌었던 ‘트랜턴 전투’(Battle of Trenton)에도 참전했지. 영국의 독일용병과 벌인 이 전투는 적 사령관과 고위 지휘관들이 전사하면서 미국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제임스는 어깨에 심각한 동맥 손상을 입어 사경을 헤매기도 했어. 총사령관 죠지는 그의 용맹스러움을 포상해 대위로 승진시켰어.
[지원] 부상으로 죽을뻔한 군인으로 죠지와 만났으니 깊은 인상을 남겼을 것 같네요.
[해월] 총사령관 죠지와 지방연대 중위와의 만남이 일상적이기도 하겠지만 우연은 아니었으리라 생각해. 두 달 동안 치료를 받고 회복한 제임스는 다시 외삼촌의 도움으로 전방으로 나갔고 여러 번의 전투를 거치면서 1777년 말에 육군 소령으로 진급되었고, 1778년 6월에 ‘먼머스 전투’(Battle of Monmouth)에 참전한 뒤 12월에 군직을 사임하고 외삼촌이 있는 필라댈피아로 갔어. 가정형편이 너무 빈약해 동생들이 많이 어려웠던 것 같아.
[지원] 정부자체가 예산부족이었다면서요? 군인들 급료가 원활하게 지급이 되었을까요?
[해월] 재정의 어려움이 총사령관 죠지에게 항상 힘든 점이었으니 장병들이 피해를 입었을 것으로 보여. 제임스는 외삼촌의 추천으로 버지니아에 있는 ‘윌리엄 앤 메리’ 대학교에서 법학공부를 시작했는데, 이때 버지니아 주지사로 있던 토마스의 제자가 되었지. 토마스는 그와 가까이 지내기 시작한 제임스에게 정치에 입문할 것을 권하고, 제임스는 주 수도를 윌리엄스버그에서 ‘리치먼드’(Richmond)로 이전할 때 토마스를 따라갔어. 영국군이 죠지아 주를 포함해 남부를 공격하자 수도를 이전한 것인데 토마스는 제임스를 군사위원에 임명해 남부육군과 민병대와의 연락업무를 관장토록 했지. 1780년 말 영국군이 버지니아에 쳐들어오자 민병대 대령으로 한 연대의 지휘를 맡았지만 자원자가 부족해 할 수 없이 고향으로 돌아와 그 이후로는 군작전에 참여하지 않았어.
[지원] 토마스를 스승으로 모시면서 법공부도 하고 행정일도 보게 되었으니 20대 초반의 제임스로서는 미래를 향한 많은 준비를 하고 있었네요.
[해월] 제임스는 토마스와 인연을 맺고 법공부를 계속하면서 1782년에는 버지니아 주 하원의원에 당선되었어. 1783년 11월에는 연방 임시정부 위원에 당선되어 3년 동안 직무를 수행했지. 위원자격으로 북서부 지역을 탐사하면서 ‘북서부 영토’(Northwest Territory)를 건설하는 법안인 ‘북서부 영토법’(Northwest Ordinance)을 작성하고 통과시키게 돼. 미국의 영토를 서부로 확장해야 한다는데 동조한 그는 토마스와 의견을 같이하고 그의 소개로 '제임스 메디슨'(James Madison)을 만나게 되지.
[지원] 세 사람이 연장자 순으로 대통령이 되었으니 훌륭한 팀이 짜진 것 같은데요?
[해월] 세 사람의 영웅들이 만나 미국을 이끌었으니 의견은 조금씩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멋있는 팀이었겠지. 제임스는 1786년 2월 16일 뉴욕시 상류층 가정 출신의 ‘앨리자배스 코트라잇’(Elizabeth Kortright. 1768-1830)과 '멘해튼'(Manhattan)의 ‘트리니티 처치’(Trinity Church)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돼. 그녀의 선조들은 '내덜렌즈'(Netherlands)에서 이민 온 사람들인데, 뉴욕주 수도 올바니 인근에 있는 ‘댈라웨어 카운티’(Delaware County)에 가면 이들이 땅을 매입하면서 그들의 성을 딴 마을이 있어. 앨리자배스의 아버지 ‘로랜스’(Lawrence)는 상인으로 부를 이루었고, 부인과 사이에 여섯 자녀를 두었는데 막내를 낳고 부인이 병이 들어 막내와 함께 일찍 사망했어.
[지원] 초창기 미국에는 평온한 가정이 없는 것 같네요. 모든 집안에 이런저런 어려움이 있어요.
[해월] 그 당시는 전 세계 인류에게 마찬가지 어려움이 있었을 거야. 특히 질병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제임스는 앨리자배스와 결혼하여 장인댁에서 임시정부 위원 임기가 끝날 때까지 지내다가 1786년에 버지니아 외삼촌 댁으로 이사했고, 그 해 12월에 큰 딸 ‘앨리자’(Eliza)를 낳았어. 그리고 곧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여 변호사 자격을 획득했지. 아들 ‘제임스’(James)를 1799년에 그리고 막내 ‘마리아’(Maria)를 1802년에 얻었지.
[지원] 제임스도 다른 대통령들처럼 변호사 자격을 갖추고 정치인이 된 사람이군요.
[해월] 맞아! 변호사는 되었지만 정치에 먼저 뛰어든 것 같아. 1787년에 버지니아 하원의원에 또 당선되었고, 1788년에는 ‘버지니아 주 헌법비준회의’에 위원으로 선출되어 참여했어. 새로 만들어진 미국 헌법에 거는 국민의 기대가 컸는데 그 스스로는 여러 이유로 반대표를 던졌지. 1789년에는 미국 최초의 상원의원 선거에 친구이자 경쟁자인 ‘제임스 메디슨’과 동시에 버지니아에서 출마했지만 워낙 강한 제임스 메디슨에게 패배하고 가족과 함께 ‘후래대릭스버그’(Fredericksburg)를 떠나 '샤롯츠빌'(Charotsville)로 내려갔다가 1799년에는 토마스의 ‘몬티샐로’(Monticello) 저택 인근에 1,000 에이커에 달하는 농장과 집을 마련하고 이사했어. ‘하이렌드’(Ash Lawn-Highland)라고 이름 진 이 집에서 향후 25년간을 살게 돼.
[지원] 왜 하필이면 제임스 메디슨하고 선거에서 경쟁을 했을까요?
[해월] 그게 또 하나의 운명이지 않을까? 정치세계에서 영원한 친구가 가능할까? 그래도 제임스의 정치세계는 기회의 연속이었어. 어려움을 딛고 이겨나가면 또 다른 기회가 주어지는 제임스의 정치세계. 그 기회가 찾아온 것은 얼마 안 가서지. 1790년에 버지니아 주 출신 연방상원 의원 ‘윌리엄 그레이슨’(William Grayson)이 사망하자 공석이 생기게 되었는데, 버지니아 주의회에서 제임스를 전 상원의원의 남은 임기를 채우는 후임 상원의원으로 선출했지. 그가 미연방 상원의원으로 등극하는 순간이었어.
[지원] 연방하원 의원을 넘어 이제는 상원의원이 되었으니 정치인으로서는 한껏 기량을 펼치게 되었겠지요?
[해월] 상원 내 ‘민주-공화주의당’(Democratic-Republican Party)의 신참 리더의 한 사람이 된 제임스는 토마스와 제임스 메디슨과 함께 ‘연방주의자’(Federalist)들을 공격하는데 앞장섰는데, 특히 ‘알랙산더 헤밀턴’(Alexander Hamilton)과의 악연은 미국 역사 최초의 ‘성추문’(sex scandal)을 낳았지. 사건의 발단은 1791년 여름 알랙산더 헤밀턴 앞에 나타난 ‘마리아 래이놀즈’(Maria Reynolds)라는 스물세 살 먹은 유부녀의 간청으로부터 시작하지. 생활이 어렵다고 하소연한 그녀가 알랙산더에게 재정적 도움을 청하자 매정하게 뿌리치지 못하고 나중에 도움을 주겠다고 주소를 받은 알랙산더의 순수한 배려가 낳은 실수였어. 돈을 들고 그녀의 주소지를 찾은 알랙산더가 그녀에게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건네자 그녀가 그를 침실로 유도하면서 유혹하는 꼬임에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말았지. 그로부터 수개월 동안 유부녀와 유부남 간의 불륜관계가 진행되고 이 사실을 알게 된(?) 남편 ‘제임스 래이놀즈’(James Reynolds)는 정상적이라면 알랙산더에게 당시 유행하던 ‘총의 결투’(duel)를 신청했을 텐데 그 대신 돈을 요구했지. 한동안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전 대통령이 이와 비슷한 사건인 ‘입막음 돈(hush money) 지급사건'으로 2024년 4월에 형사사건 피의자로 재판받은 적이 있잖아.
[지원] 알랙산더에게 그런 사건이 있었어요?
[해월] 정치세계는 예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나 봐! 이 사건의 내용이 제임스에게 전해지고 제임스는 동료의원들과 의회차원의 조사에 들어갔지. 알랙산더는 이들 부부의 의도적인 협박에 넘어가 당시 급료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돈을 불륜관계를 발설치 않는 것을 조건으로 건네주었다고 해. 제임스가 이끌던 의회조사에서 계획적 범행으로 판정하고 범죄협의가 없다고 종결짓고 대중에게 발표하지 않기로 하면서 사건이 종결되는가 했어. 그러나 몇 년 뒤에 제임스가 별생각 없이 이 사건의 내용을 친구이자 스승인 토마스에게 얘기하고 토마스는 이를 정적이자 원수 같은 알랙산더 공격용으로 이용하는 바람에 알랙산더는 노발대발, 제임스를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하면서 그에게 결투를 신청했지. 이들 두 사람 사이의 결투는 제임스의 친구인 ‘에런 버’(Aaron Burr)가 개입하면서 이루어지지는 않았어. 그러나 역사의 아이러니가 뜻하지 않게 벌어지지. 오히려 나중에 알랙산더는 에런과 결투를 갖는 일이 발생하게 되고, 결국 총상을 입으면서 사망하고 말지. 미국 건국 영웅의 안타까운 죽음이 1804년 7월 11일의 아침에 발생했어. 3년 전 자신의 셋째 아들 ‘필립’(Philip) 이 같은 결투를 벌이다 사망하게 된 뉴 저지 주 ‘위호큰’(Weehowken) 동네 근처에서 일어난 역사의 한 순간이었지.
[지원] 정치인의 여성과의 부적절한 관계가 법치국가 미국에 이르러 치명적인 사건으로 비화된 첫 사례인가 보네요?
[해월] 우리가 더 논할 문제는 아닌 것 같지?! 친프랑스 파였던 제임스는 미국이 영국과 프랑스 두나라와의 관계가 악화된 시점인 1794년에 전쟁발발을 막아보려는 죠지의 뜻을 받고 프랑스에 대사로 파견되었어. 동시에 친영국파인 ‘쟌 제이’(John Jay)는 영국대사로 나가 ‘Jay Treaty’라는 화친조약을 맺기도 했지. 제임스는 프랑스혁명으로 신설된 국회에 나가 ‘공화정’(republicanism) 건립 축하연설을 하면서 기립박수를 받기도 하고, 프랑스가 가두어 둔 미국인들을 석방시키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지. 나아가 미시시피 강 항해권을 프랑스로부터 따 내는 등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했어. 그런데 죠지의 내각에서 유일한 친프랑스 파였던 ‘애드먼드 렌돌프’(Edmund Randolph) 국무장관이 친영국파인 ‘티모시 픽커링’(Timothy Pickering)으로 교체되자 신임 국무장관 티모시와 헤밀턴의 주도로 대사로서는 부적합한 인물이라는 누명을 쓰면서 저들의 회유에 넘어간 대통령 죠지의 명령으로 1796년 11월에 본국으로 소환되고 말았어. 정부에서는 제임스가 당시 진행 중이던 대통령선거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일부러 소환장을 늦게 발송하기도 했지.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온 그는 공무에서 떠나 농부와 변호사 일을 하기 시작했고, 1797년에는 죠지행정부를 비난하는 저서를 발간하기도 했어.
[지원] 친프랑스파를 프랑스대사로 파견해서 좋은 결과가 나왔는데 왜? 정치세계란 五里霧中일 때가 많아요.
[해월] 정치인의 세계는 바둑의 세계와 같이 전후좌우 살펴야 할 것이 많은 세상이니 아무나 덤벼들면 안 되지. 새로운 기회가 봄제비 오듯 다시 찾아왔어. 제임스는 1799년 반연방주의자들이 다수당인 버지니아 주 의회에서 12대 주지사에 선출되어 1802년까지 봉직하지. 버지니아 주법상 매우 빈약한 권한을 가진 주지사였지만 의회를 설득해 행정부가 관여할 수 있는 영역을 교통, 교육 및 민병대 훈련 분야 등으로 넓혀나갔어. 처음으로 주지사가 의회에 나가 ‘연두교서’(State of the Commonwealth address)를 발표하는 전통을 만들었고, 주 첫 번째 교도소를 설립하기도 했지. 1800년에는 주 수도 인근에서 수백 명의 노예들이 주지사를 살해하겠다고 폭동을 일으켰는데, 제임스는 민병대를 동원해 폭동을 진압했고 주동자들을 반역죄로 모두 교수형으로 다스렸어. 그리고 1800년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에서 토마스를 지지하면서 주 선거관리위원들을 측근으로 임명하고 민병대를 동원해서 선거에 유리한 길을 모색하기도 했지. 토마스가 3대 대통령에 선출되고 제임스 메디슨을 국무장관으로 임명해 정부를 구성하였는데 제임스는 토마스 주도 정당의 주요 지도자이자 미국 내 가장 큰 규모인 버지니아 주의 주지사로서 메디슨과 함께 차기 대통령 후계자 두 명의 반열에 서게 되었지.
[지원] 토마스의 대통령 당선으로 일등공신이 된 제임스의 미래가 열리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요.
[해월] 그의 활약이 시작되는 발동이 걸린 것이지. 대통령 토마스는 주지사 임기가 끝난 그를 프랑스에 특사로 파견하여 대사로 나가있는 ‘로벗 리빙스턴(Robert Livingston)과 함께 미국 중부지역 매입을 성공시키게 돼. ‘루이지에나 매입’(Louisiana Purchase. 첫 사진 참조)이라고 알려진 이 중서부지역 매입은 당시 자금으로 1천5백만 달러를 들인 국토매입인데, 이로서 미국의 국토가 거의 배로 늘어나게 되고 곧 서부로 서부로 확장하는 전초가 되었어. 그리고 1803년에는 영국의 대사로 파견되어 영국정부가 강행하던 미국상선의 나포와 선원들의 강제징용을 막아보려 했으나 별 진척은 없었지. 토마스는 제임스가 새 영토가 된 ‘루이지에나 부속령’(Louisiana Territory)의 초대 주지사를 맡아주기를 원했지만 제임스는 이를 거절하고 계속 영국대사로 남아 만료가 된 1795년의 ‘쟌 제이 조약’의 갱신을 위해 노력했어. 미국은 이 조약으로 지난 10년 동안 영국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어. 1806년 12월 동료 외교관 ‘핑크니’(Pinkney)와 함께 영국과 사이에 ‘먼로-핑크니 조약’(Monroe-Pinkney Treaty)을 체결함으로써 연장에 성공했지만 현실적으로 몇 가지 결함을 극복하지 못하면서 영국을 싫어했던 대통령 토마스가 이를 인정치 않고 의회에 제출도 하지 않음으로써 이들 관계에 금이가고 끝내는 1812년에 영국과 전쟁이 벌어지는 결과를 가져왔지.
[지원] 토마스를 지지하는 제임스 메디슨과의 관계도 나빠졌겠네요?
[해월] 결과는 1808년의 대통령선거에서 나타나지. 제임스는 자기가 추진한 영국과의 조약의 갱신에 대한 비준을 토마스가 거부한 것은 이번 대통령선거에서 메디슨을 능가하는 실적을 제임스가 쌓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라 판단했고, 따라서 캠페인에 동참하지 않으려 했지. 그런데 버지니아 주의 당내 소속원 중에 분파가 생겨 제임스에게 대통령에 출마할 것을 권유하는 파가 생기는 바람에 자기 세를 과시도 할 겸 대통령에 출마하고 말았어. 결과적으로 당의 후보지명은 메디슨에게 돌아갔고, 메디슨이 4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지. 선거가 끝나자 제임스는 바로 토마스와 관계복원을 모색했지만 토마스는 이듬해 열렸던 의원선거에서 제임스를 지지하지 않는 것으로 응답했어. 당에서도 따돌림당한 제임스는 일단 모든 것을 접고 메디슨과 연락도 끊은 채 향후 수년간 집에서 농사에 전념하는 모습을 보였지. 이때 새로운 농법을 공부해 가격이 폭락해 가는 담뱃잎 농사대신 밀(wheat) 농사를 짓기 시작했어.
[지원] 정치인이 낙향해서 농부가 된다는 것은 보기보다 쉽지 않을 텐데 제임스가 농부로 성공했다는 말은 없지 않나요?
[해월] 한마디로 농부 스타일은 아니지! 정치 맛을 들인 사람들은 그 문간을 떠나지 못하고 늘 맴돌기 마련이야. 제임스는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은 1810년에 버지니아 주 하원 의원에 출마해 당선되고, 1811년에는 16대 주지사에 다시 당선되지. 그런데 사이가 틀어진 4대 대통령 제임스 메디슨이 그에게 물러난 국무장관의 후임으로 자리를 권하자 관계복원도 할 겸 그에 응하고 상원에서 만장일치로 그의 임명을 승인하지. 그럼으로써 두 사람의 우정도 되살아나게 되었어. 버지니아 주 주지사로 두 달간 임무를 수행하다 연방 국무장관으로 자리를 옮긴 제임스는 프랑스와 협상을 해 미국상선에 대한 공격을 완화시켰지만 영국하고는 계속 대화를 진행했음에도 불구하고 평행선을 그리다가 결국 다른 이들과 함께 주전파로 돌아서지. 하원의장 ‘핸리 크레이’(Henry Clay)등 主戰派가 세를 불리자 대통령 메디슨은 의회에 전쟁을 선포할 것을 요청하고 1812년 6월 18일 영제국에 전쟁을 선포함으로써 두 번째의 전면전인 ‘1812년의 전쟁’(War of 1812)이 시작되었어.
[지원] 영국과 가까이 지내자는 연방주의파 세력이 약해지고 프랑스파가 권력을 잡자 결국 전쟁이 발생하네요.
[해월] 프랑스와 영국 간의 전쟁이 유럽에서 계속되는 한 전쟁의 우려가 사라지지 않았지. 전쟁이 발발하고 제임스의 주장대로 해군이 동원되어 몇몇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기도 했어. 그러면서 전쟁장관이 사임하는 바람에 제임스에게 그 자리도 맡으라는 대통령의 요구가 있었지. 그러나 상원에서 이에 반대해 ‘쟌 암스트롱’ (John Armstrong) 소장을 장관에 임명했는데 둘 사이에는 의견의 충돌이 잦았어. 영국의 전함이 포토맥 강어귀에 출현하자 제임스는 수도를 방어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채사픽 만'(Chesapeake Bay)에 군정보부대를 설치하자고 했지만 신임 전쟁장관 쟌은 필요 없다고 일축해 버렸지. 1814년 8월 24일 그곳으로 쳐들어온 영국군이 수도로 밀려들어와 국회의사당과 백악관을 불태우자 대통령 메디슨은 즉시 암스트롱을 해임하고 9월 27일부로 제임스를 그 자리에 임명했어. 제임스는 10월 1일에 국무장관 직을 사임했지만 후임자가 선임되지 않아 두 장관직을 겸임하게 되었지.
[지원] 국무장관에 전쟁장관까지 꽤찬 제임스에 대한 정부와 국민의 신뢰가 대단했겠네요!
[해월] 전쟁을 수행했던 책임자였고 결국 승리로 이끌었던 사람이었으니 인지도가 강화되었겠지. 전쟁 초기에 전황이 시원찮게 진행되자 영국에서는 조속한 종전을 희망한다고 전했고, 미국 정부에서는 쟌 퀸지 에담스를 협상대표로 임명하여 벨지움의 ‘겐트’(Ghent)로 파견하여 종전협상을 진행했어. 그 후에 영국은 이중플레이를 진행한 거야. 미국의 허점을 찌르며 수도를 공략해 미국의 자존심을 짓밟어 버렸어. 제임스는 이에 맞서 ‘엔드류 젝슨’(Andrew Jackson) 장군에게 남부 '뉴 올리언즈'(New Orleans)에서 영국군에 항전토록 하고 인근 여러 주정부에게 민병대를 파견하여 엔드류를 돕도록 요청했지. 또한 의회에는 10만 양병을 요구하면서 장병의 대우를 높여주도록 했으며, 전쟁자금을 마련하는 방안으로 ‘제2 연방은행’(Second Bank of the United States) 건립을 주창했어. 전쟁장관에 취임한 몇 달 후 ‘겐트조약’(Treaty of Ghent)이 체결되었고, 엔드류 잭슨의 승전소식과 더불어 미국을 기쁨의 도가니로 넣었어. 유럽에서 12년 동안 전개 되었던 ‘나폴레옹 전쟁’(Napoleonic Wars)도 종전되어 영국도 더 이상 미국을 괴롭히지 않게 되었지. 종전 후 연방은행이 설립되어 재정이 안정되고, 1815년 3월에 전쟁장관을 사임한 제임스는 국무장관으로 복귀하여 차기 대통령 후보로서의 입지를 강화하게 되었어.
[지원] 제임스는 여러 어려움 속에서 시기를 잘 활용한 정치인이었던 것 같아요.
[해월] 맞아.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최선을 다해 좋은 결과로 이끌었던 사람이었어. 미국 내 8번째로 치러진 1816년의 대통령 선거에 출마를 결심한 제임스는 당의 대선후보선출 전당대회에서 대통령후보로 별문제 없이 선출되고, 본선에서는 소멸되어 가는 연방주의당의 ‘러훠스 킹’(Rufus King) 후보를 선거인단 투표에서 183대 34표로 가볍게 누르고 당선됨으로써 독립전쟁에 참전한 현역 군인으로 그리고 대륙회의 대의원으로 참가한 ‘건국의 아버지’ 대열에서 마지막으로 당선된 대통령이라는 역사를 쓰게 되었어.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