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대 제임스 먼로- 2 of 2: 내치에 성공한 대통령 1817-1831
미합중국(the United States of America)이 1776년 7월 4일 탄생하면서 영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전쟁을 8년간 치르고, 임시정부를 통해 헌법을 제정한 후 정식으로 출범한 1789년까지의 과정에 참여한 지도자들을 우리는 ‘건국의 아버지들’ (Founding Fathers)이라고 부릅니다. 이들 중에서 다섯 분이 초창기 대통령을 지냈습니다. 초대 죠지 워싱턴 (George Washington), 2대 쟌 에담스(John Adams), 3대 토마스 재퍼슨(Thomas Jefferson), 4대 제임스 메디슨(James Madison) 그리고 5대 제임스 먼로(James Monroe)가 그들입니다. 1758년생인 제임스 먼로(이하 제임스)는 다섯 번째 대통령으로 미국을 이끈 지도자인 동시에 건국의 아버지들 대열에서 마지막으로 대통령으로 봉직한 사람이었습니다. 제임스는 또한 ‘버지니아 왕조’(Virginia Dynasty. 첫 다섯 명의 대통령 중 네 명이 버지니아 주 출신이라는 뜻에서 부쳐진 별칭)의 마지막 대통령이기도 합니다. 다른 분들이 부족했다기보다 세대가 바뀌었다고 봐야겠지요. 제임스 다음 차례인 6대 대통령이었던 ‘쟌 퀸지 에담스’(John Quincy Adams)가 1767년에 태어났지만 정작 대통령으로 당선될 차례가 온 것은 1825년으로 57세가 되어서였으니 건국을 위해 애썼던 앞세대 ‘아버지’가 제임스를 끝으로 거의 무대에서 사라졌으리라 생각됩니다.
1817년부터 1825년까지 두 번의 임기인 8년간 대통령직을 수행한 제임스는 육군 소령, 민병대 대령, 변호사, 정치가, 외교관, 행정가 등 다양한 인생수업을 거치고 다지면서 미국이 추구해야 할 방향을 제시한 지도자였습니다. 특히 동생의 사망이라는 슬픔에서도 전쟁에 처한 국가를 위해 휴학을 하면서까지 군에 입대한 그는 전투 중 중상을 입고 사경을 헤매었던 기억을 갖고 있는 애국자 중 한 명이기도 합니다.
1825년 3월 4일 퇴임한 제임스는 전임자들과 마찬가지로 경제적 어려움으로 무거운 여생을 보냈고, 1831년 7월 4일 73세를 일기로 사망하면서 쟌과 토마스와 같이 독립선포일에 사망한 세 번째 대통령으로서 기념비적 역사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知源] 마침내 제5대 제임스 먼로 대통령이 탄생했네요.
[海月] 제임스의 대통령 취임은 1817년 3월 4일 이루어졌는데 미국 출범 후 최초로 전쟁 없는 평화시대가 열렸다는 것과 반대정당의 소멸, 그리고 경제적으로 안정된 시기에 치르게 되었다는 의미를 갖지. 역사는 이 시기를 ‘우호의 시대’(Era of Good Feelings)라고 이르고 있어. 제임스도 당파적 성향을 벗어난 탕평책을 펴고 인재를 두루 등용하여 썼고, 전국을 돌며 화합과 단결을 강조했지. 각료를 포함한 행정부에 지역을 안배하여 사람을 등용하면서 북부사람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메사추새츠 주 출신의 ‘쟌 퀸지 에담스’(John Quincy Adams. 6대 대통령이 됨)를 국무장관에 임명했어. 2대 쟌 에담스 대통령의 장남인 그는 1807년에 토마스의 외교정책을 지지하면서 연방주의당색을 버렸고 국무장관에 임명되면서 일찌감치 제임스의 후계자 상위에 안착하게 되었어. 이 당시에 국무장관 자리는 그만큼 중요했거든.
[지원] 공화주의 정당의 성격을 연방주의 정책과 섞어 국정을 이끌어간 그의 모습에 국민이 모두 찬동했기를 바랍니다.
[해월] 그가 펼친 주요 정책은 아래에서 살펴보겠지만 그의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한 1820년의 아홉 번째 대통령 선거에서는 대통령이 소속되어 있는 공화주의 당의 후보추천위원회에서 제임스에 도전하는 후보를 추천하지 않기로 함으로써 당내 도전자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본선에서도 연방주의당이 무너지는 바람에 연방주의당 후보가 없었을 뿐 아니라 다른 당의 입후보자도 아예 없었기 때문에 도전자 없이 단독으로 대통령에 출마하게 되어 ‘죠지’(George Washington)에 이어 두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거의 만장일치로 대통령에 당선된 영광을 안았지.
[지원] 죠지 워싱턴이 두 번이나 만장일치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는데 또 한 사람이 있었네요.
[해월] 선거인단 중에서 유일하게 ‘뉴 헴프셔’(New Hampshire) 주 출신인 ‘윌리엄 프루머’(William Plumer)만 출마하지도 않은 ‘쟌 퀸지 에담스’에게 지지표를 던졌는데, 나중에 알려진 이유는 “죠지를 만장일치로 선출된 유일한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역사적 결단을 내렸다는 것이었어.
[지원] 과연 제임스의 정치세계는 난해하네요. 그리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이네요.
[해월] 선임 대통령들에 비해선 덜 알려진 건 사실이지. 그러나 시대를 누구보다 현명하게 조리한 사람이었던 것 같아. 현명한 것 하고 카리스마하고는 다른 특성인 것이지. 제임스는 만장일치로 당선될 만큼 당 안팎으로 폭넓은 지지를 받은 대통령이었지만 그에게 열정적으로 충성하는 지지자는 적은 편이었고 따라서 의회에 대한 그의 영향력은 그리 크지 않았었어.
[지원] 카리스마가 없는 지도자이지만 대중의 지지도가 높아 내정을 잘 이끈 대통령이었다는 말씀이지요?
[해월] 그렇지. 5대 대통령 제임스가 지지도를 십분 활용해 전개한 정치력은 한마디로 내부 결속을 하면서 영토의 외적 확장으로 요약할 수 있어. 우선 영국과 평화를 유지하고 1817년에 ‘러쉬-베것 조약’(Russh-Bagot Treaty), 1818년엔 ‘1818년의 조약’(Treaty of 1818)을 체결하면서 북부에 있는 ‘그레잇 레익스’ (Great Lakes)와 ‘레익 쳄프린’(Lake Champlain)에서 영국해군의 무장을 축소하는 동시에 케나다와의 국경에 비무장지대를 설치하면서 현재와 비슷한 북위 49도선으로 유지하기로 했어. 또한 북서부의 ‘오래곤 컨트리’(Oregon Country)라 불리던 광활한 지역을 양국이 향후 10년간 공동으로 관리하기로 함으로써 북부에서의 불필요한 대치상태를 해소하고 양국 간의 교역을 확대시키는 계기를 마련했지.
[지원] 영제국과는 두 번씩이나 전쟁을 치렀지만 아직도 북부에서는 양국 영토에 대한 국경문제가 남아있군요.
[해월] 그때까지도 영국이 케나다뿐만 아니라 서부의 광활한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지. 한편 러시아 제국과는 북서태평양연안 경계 문제로 대치중에 있었는데, ‘센 후렌시스코 만’ (San Francisco Bay) 지역인 북위 51도 지점에 교역소를 설치해 놓고 지역을 관리하던 러시아와 협상하여 제임스의 2차 임기 말인 1824년에는 ‘1824년 조약’(Treaty of 1824)을 체결하면서 지금의 ‘엘라스카 남쪽 끝자락’(Alaska Panhandle)인 북위 54도 40분까지 러시아 쪽 경계를 올려놓았지.
[지원] 러시아와의 국경문제도 있었네요. 엘라스카 끝자락이라면 지금 엘라스카의 주도 ‘주노’(Juneau)가 있는 곳이겠네요?
[해월] 그렇지. 주노와 ‘스케그웨이’(Skagway), ‘캐치칸’(Ketchikan) 그리고 ‘내해 항로’(Inside Passage)로 크루즈선박이 항해하는 지역을 포함하는 곳이지. 미국으로서는 러시아를 멀리 쫓아낸 모양이 된 셈이야. 제임스는 스페인과도 영토 협상을 잘 진행하여 스페인이 관리하던 ‘후로리다’(Florida) 지역을 미국의 영토로 영입하는 데 성공하면서 남쪽 국가경계를 확정시켰어.
[지원] 후로리다 지역이 아직 미국영토가 아니었네요?
[해월] 아직이지. 1810년에 이르러 중미와 남미 여러 민족이 미국과 프랑스에서의 혁명에 자극되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외치며 폭동과 전쟁에 이르는 상황이 벌어지고, 미국 남부 해안지역에서 해적들의 침투가 잦았어. 게다가 후로리다 지역 안에 거주하고 있는 ‘새미뇰’(Seminole) 원주민들에 의한 피해 또한 커지자 제임스는 ‘엔드류 젝슨’(Andrew Jackson) 장군에 명하여 후로리다에 진입하여 원주민을 공격토록 했지.
무차별 공격을 가하며 원주민을 소개한 앤드류는 스페인 영토인 후로리다의 수도 ‘팬사코라’ (Pensacola)까지 내친김에 정복하고 말았어. 제임스는 자신이 명령을 내렸으니 문제가 없었지만 미 의회는 이를 선전포고 없는 전쟁이라고 비난하고 나섰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에서의 전투에 지친 스페인 정부는 같은 시기에 독립을 외치며 폭동을 일삼는 중미와 남미 식민지의 통치가 어려워지게 되는데, 설상가상 후로리다에서 미군이 진격해 오니 미국과 전투를 벌일 의욕을 상실하고 있었지. 결국 1819년 2월 22일에 스페인의 ‘루이스 드 오니스’(Lewis de Onis) 대사와 미국 국무장관 쟌 퀸지 에담스가 쟌의 워싱턴 사무실에서 일명 ‘에담스-오니스 조약’(Adams-Onis Treaty)에 서명하고 후로리다 전역은 물론 북서부 ‘오래곤 컨트리’ 내 스페인관활 지역까지 포기하고 미국은 보상으로 5백만 달러를 지불키로 합의했지. 텍사스에서 북위 42도 태평양연안에 까지 닷는 ‘뉴 스페인’(New Spain)의 땅을 미국영토와 경계 짓는 외교적 승리의 날이지. 이 조약으로 맥시코와의 국경도 맥시코전쟁 때까지 일차 확정된 것이야.
[지원] 토마스의 ‘루이지에나 매입’으로 당시 영토의 배가 되었다더니 이번에는 스페인과의 협상을 성공시켜 북서부는 물론 남부까지 얻는 대확장을 가져왔네요.
[해월] 미국영토가 확장되는 과정에서 동북부에서 동남부까지 온전히 미국땅으로 영입되는 모습을 지켜봤지. 미국이 독립을 선언하고 프랑스가 공화국 설립을 위한 혁명을 일으키자 이에 자극을 받은 남미의 여러 나라들도 1810년경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스페인과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어. 메디슨행정부뿐만 아니라 제임스도 처음에는 예의 중립적 입장을 고수하면서도 뒤로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려는 나라들을 동정하고 있었어. 특히 프랑스가 혁명전쟁을 할 때 미국이 돕지 못한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강했지. 그렇지만 미국이 군사개입을 하면 유럽열강도 스페인에 무력지원할 가망성을 염두에 두고 자제하고 있었지. 스페인에 승리한 남미의 나라들이 미국에 사절을 보내기 시작하고 외교적 승인과 통상을 요구해 오는 와중에 스페인에서 1820년 왕정에 대항하는 군사혁명이 일어나고 민주정부가 들어서고, 1821년에 스페인과 ‘에담스-오니스 조약’이 체결되자 미국은 태도를 바꾸어 ‘알젠티나’(Argentina), ‘패루’(Peru), ‘콜럼비아’(Columbia), ‘칠래’(Chile), 그리고 ‘맥시코’(Mexico) 등 신생 독립국가들을 공식적으로 승인하면서 외교관계를 맺기 시작했지. 그들 나라들은 미국에 자국의 공화정을 지지해 주고 최혜국 대우로 통상조약을 체결할 것을 요구했고, 미국은 그들 나라들에게 유럽과는 차별화된 ‘미주대륙간 상호지원’ 체계를 발전시킬 것을 천명했지.
[지원] 중미와 남미에서 스페인의 지배를 받던 신생 독립국들이 미국의 위상을 받아들이고 정치와 경제 양면으로 손을 잡는 모양이네요.
[해월] 이 지정학적 변화가 미국 정부에게 획기적 기회를 가져다주었어. 곧 제임스의 대외적 업적으로 알려진 ‘먼로 독트린’(Monroe Doctrine)이라 부르는 대외선언으로 나타났지. 1821년에 국무장관 쟌이 처음으로 북미와 중미 그리고 남미 대륙에 외국이 무력으로 식민지를 설립하지 못하도록 하자는 의견을 제출했었는데 제임스가 이 안을 받아들였어. 뉴 스페인이 1821년 맥시코 등 남미 여러 나라와 조약을 맺으며 식민지를 떠나면서 유럽 열강들이 미주대륙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것을 아는 제임스는 1823년 12월 2일 연방의회에 보낸 일곱 번째 연두교서를 통해 “미국은 유럽에서의 전쟁과 분쟁에 중립을 지키며, 유럽열강들의 미주 대륙에서의 재 식민지 설치를 용인하지 않겠다. 유럽 열강들은 더 이상 미주대륙에서 새로운 식민지 설립을 고려해서는 안 된다”는 미국의 대외정책 선언을 발표했지. 미국영토는 물론이고 중미나 남미에 유럽 국가들의 진출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것이고 특히 러시아를 겨냥해 북태평양 연안에 식민지 건설을 하지 말 것을 경고한 것이기도 했어. 1823년 ‘먼로 독트린’ 이 발표된 시점부터 중미 및 남미지역에 미국의 또 다른 제국주의가 전개된 것이라고 이해하면 될 거야.
제임스 먼로 대통령의 연두교서 중 "먼로 독트린"에 관련된 선언문 발췌:
...At the proposal of the Russian Imperial Government, made through the minister of the Emperor residing here, a full power and instructions have been transmitted to the minister of the United States at St. Petersburg to arrange by amicable negotiation the respective rights and interests of the two nations on the northwest coast of this continent. A similar proposal has been made by His Imperial Majesty to the Government of Great Britain, which has likewise been acceded to. The Government of the United States has been desirous by this friendly proceeding of manifesting the great value which they have invariably attached to the friendship of the Emperor and their solicitude to cultivate the best understanding with his Government. In the discussions to which this interest has given rise and in the arrangements by which they may terminate the occasion has been judged proper for asserting, as a principle in which the rights and interests of the United States are involved, that the American continents, by the free and independent condition which they have assumed and maintain, are henceforth not to be considered as subjects for future colonization by any European powers. . .
It was stated at the commencement of the last session that a great effort was then making in Spain and Portugal to improve the condition of the people of those countries, and that it appeared to be conducted with extraordinary moderation. It need scarcely be remarked that the results have been so far very different from what was then anticipated. Of events in that quarter of the globe, with which we have so much intercourse and from which we derive our origin, we have always been anxious and interested spectators. The citizens of the United States cherish sentiments the most friendly in favor of the liberty and happiness of their fellow-men on that side of the Atlantic. In the wars of the European powers in matters relating to themselves we have never taken any part, nor does it comport with our policy to do so. It is only when our rights are invaded or seriously menaced that we resent injuries or make preparation for our defense. With the movements in this hemisphere we are of necessity more immediately connected, and by causes which must be obvious to all enlightened and impartial observers. The political system of the allied powers is essentially different in this respect from that of America. This difference proceeds from that which exists in their respective Governments; and to the defense of our own, which has been achieved by the loss of so much blood and treasure, and matured by the wisdom of their most enlightened citizens, and under which we have enjoyed unexampled felicity, this whole nation is devoted. We owe it, therefore, to candor and to the amicable relations existing between the United States and those powers to declare that we should consider any attempt on their part to extend their system to any portion of this hemisphere as dangerous to our peace and safety. With the existing colonies or dependencies of any European power we have not interfered and shall not interfere. But with the Governments who have declared their independence and maintain it, and whose independence we have, on great consideration and on just principles, acknowledged, we could not view any interposition for the purpose of oppressing them, or controlling in any other manner their destiny, by any European power in any other light than as the manifestation of an unfriendly disposition toward the United States. In the war between those new Governments and Spain we declared our neutrality at the time of their recognition, and to this we have adhered, and shall continue to adhere, provided no change shall occur which, in the judgement of the competent authorities of this Government, shall make a corresponding change on the part of the United States indispensable to their security.
The late events in Spain and Portugal shew that Europe is still unsettled. Of this important fact no stronger proof can be adduced than that the allied powers should have thought it proper, on any principle satisfactory to themselves, to have interposed by force in the internal concerns of Spain. To what extent such interposition may be carried, on the same principle, is a question in which all independent powers whose governments differ from theirs are interested, even those most remote, and surely none of them more so than the United States. Our policy in regard to Europe, which was adopted at an early stage of the wars which have so long agitated that quarter of the globe, nevertheless remains the same, which is, not to interfere in the internal concerns of any of its powers; to consider the government de facto as the legitimate government for us; to cultivate friendly relations with it, and to preserve those relations by a frank, firm, and manly policy, meeting in all instances the just claims of every power, submitting to injuries from none. But in regard to those continents circumstances are eminently and conspicuously different.
It is impossible that the allied powers should extend their political system to any portion of either continent without endangering our peace and happiness; nor can anyone believe that our southern brethren, if left to themselves, would adopt it of their own accord. It is equally impossible, therefore, that we should behold such interposition in any form with indifference. If we look to the comparative strength and resources of Spain and those new Governments, and their distance from each other, it must be obvious that she can never subdue them. It is still the true policy of the United States to leave the parties to themselves, in hope that other powers will pursue the same course....
[지원] 먼로 독트린이라는 미국의 대외정책이 한마디로 미주대륙을 미국의 영향하에 두겠다는 것이네요?
[해월] 정확한 말이야.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 유럽열강들의 중, 남미 진출을 차단하고 나면 미국이 그들 여러 국가들에게 직접적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되지. 실제 이들 중, 남미 국가들이 스페인 등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면서 미국으로부터 국가승인이 나기를 기다렸지. 중립을 지키겠다는 미국의 속셈은 이들 나라들을 승인함으로써 개입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제국주의적 확장을 펼쳐나가게 되지. 현대에 이르러 미국의 대외 영향력은 경제적이나 정치적 그리고 군사적으로 그 어느 나라보다 강력한 것을 목격할 수 있잖아.
[지원] 미국의 ‘큰 형’ 역할이 이때부터 시작되었군요? 오늘날 미국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나라는 없잖나요?
[해월] 최대이며 최강국이 되었으니 생활의 여러 분야에 깊게 관여되어 있는 셈이지. 외교관계를 무난히 해결해 낸 제임스의 임기중 국내적으로 가장 이슈가 된 것은 서부확장을 하면서 대두된 노예승인 문제였어. 루이지에나 부속령이 나중에 미조리 부속령으로 이름이 바뀌고 이 지역으로 사람들이 이주하면서 주로 승격될 만큼 커지게 되었지. 지역이 팽창하고 경제활동도 증가해지자 이들 지역으로 이주한 남부 사람들이 농사를 짓는 과정에 노예가 필요하게 되었지. 노예를 데려다 농사를 짓고자 하는 사람들과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북서부 지역에는 노예를 금지하자는 사람들의 대결이 심각한 문제로 발전하게 되었어. 후에 노예문제는 남북전쟁의 가장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로 발전하지. 제임스는 노예문제에 관해서 노예를 금지하려는 시도를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지. 본인도 노예를 소유하고 있고, 노예의 노동력이 있어야 경제를 유지할 수 있는 남부사람들의 애로점을 이해하는 입장이라고 볼 수 있어.
[지원]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상업과 공업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 간의 팽팽한 기싸움에서 어느 편을 드느냐가 정치의 갈림길이었겠어요.
[해월] 남부의 농장주인들이 서부로 자리를 넓혀가는 과정에 도출되는 문제였지. 의회에서도 새로이 설립되는 주들을 연방으로 편입할 것인가 토론을 하면서 이들 양진영이 노예를 허락하느냐 안 하느냐로 팽팽히 맞섰지. 1820년 초 들어 연방의회에는 미조리(Missouri)와 메인(Maine) 등 두 곳을 주로 승인할 것인가를 두고 토론하면서 미조리는 노예를 허가하는 주로, 그리고 메인은 노예를 승인하지 않는 주(free state)로 연방에 편입시키자는 협상이 이루어지지. 동시에 미조리 부속령에서 미조리 주로 영입하기로 정한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영토 중 북위 36도 30분 이북지역에 노예를 금지시키자는 법안이 통과되면서 제임스가 차선책이라고 믿고 서명하면서 ‘미조리 합의’(Missouri Compromise)라는 역사가 3월 6일 이루어지지. 정치적 판단에 따른 임시방편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 ‘미조리합의’로 정가가 잠시 조용해지기는 했어. 미국이 건립된 이래 노예를 승인한 주가 그렇지 않은 주에 비해 더 많이 존재해 왔는데, 1820년에 이르러 미국에는 위에 말한 두 곳의 주가 연방에 편입되면서 모두 24개 주가 되었고, 노예승인주와 노예금지주가 각각 12개 주 동수가 되었어. 노예금지를 주장하는 주가 늘어나면서 노예를 필요로 하는 남부주들이 불안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원인이야.
[지원] 제임스 임기 중 달성한 타협은 결국 임시 해결책이 된 셈이군요.
[해월] 그 후로도 미국영토에는 새로운 주가 들어섰고 남부사람들도 이들 지역으로 계속 진출했기 때문에 노예문제는 계속 존재할 수밖에 없었지. 제임스는 미국 내 경제활동을 활성화하기 위해 물자운송을 위한 도로 등을 확충해야 한다고 믿었지만 헌법이 연방정부에 그런 권한을 주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의견이 많아 의회에게 개헌을 요청했지. 그러나 의회는 헌법이 이미 그 같은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고 믿었어. 다시 말해 미국헌법상 연방정부가 주정부 영역을 침범하여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느냐 하는 판단을 당시 사람들은 매우 심각하게 생각했던 거지. 제임스는 비록 도로망이라도 연방정부예산으로 주 영역에 건설할 수 없다고 생각한 거야.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 1824년 대법원의 판결인데 연방정부가 주정부 간 상업행위를 규제할 권한이 있다고 결론 낸 것이지. 이로서 대통령이 공공의 이득을 위해 도로나 운하를 미국 내에 건설할 수 있도록 조사할 권한을 부여한 법인 ‘통상측량법’(General Survey Act)가 통과되었고, 오하이오 강, 미시시피 강 그리고 미조리 강 등을 정비하여 운항을 용이하게 하는 법도 제정되었어.
[지원] 연방정부가 예산을 세워 국민을 위해 도로와 항만 등에 투자하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주정부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라 판단되는 시절이 있었다니 믿기지가 않네요.
[해월] 지금도 연방정부와 주정부 사이에 엄연하게 독립적 조치를 유지하는 것이 많이 있지만 당시에 가장 두드러진 것이 주정부가 독립적으로 취한 조치 중 하나가 화폐발행이었고 그 폐단이 ‘1819년의 공황’ (Panic of 1819)으로 나타났지. 세계경제는 1812년의 전쟁과 나폴래옹 전쟁을 끝내고 평화가 찾아옴으로 재조정으로 들어갔지만, 제임스의 1차 임기말의 미국경제는 수입과 수출의 감소 그리고 농산물 가격의 하락으로 공황상태로 접어들고 있었어. 미국경제가 하강을 그리고 있을 때 분별없는 은행들의 화폐남발로 인해 공공대지에 대한 투기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지. 연방정부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경제침체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가 없었는데 이는 당시 은행들이 주정부의 관할하에 있었기 때문이었지. 결국 정부는 예산을 삭감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곧 국방예산의 삭감으로 이어져 1819년 5월에는 군병력의 수를 12,656명에서 6,000 명으로 줄이게 되었고, 1820년에는 군부대 규모를 70 퍼샌트나 줄이게 되었지. 1821년도 국방예산이 1818년에 비해 반토막이 난 500만 달러로 대폭 줄어들었어.
[지원] 미국의 경제공황이 일찍 찾아왔네요. 1819년이면 200년도 더 된 옛날인데요.
[해월] 무역불균형에 시달리는 산업들이 늘어나자 이를 걱정하는 일부 경제계 지도자들이 의회에 관세인상을 요청하기도 하고 제임스도 경기침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면서 관세인상이 자국의 산업을 재건시키는 방책이라고 설명하기도 했지만 정작 의회가 관세를 인상키로 한 것은 ‘1824년의 관세법’(Tariff of 1824)을 통과시키면서 이루어졌어. 경제공황으로 인해 실업자들이 양산되고 파산하는 기업체가 늘어나고 차압되는 사업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지. 결국 주정부가 관리하는 은행제도와 기업체 관련제도에 대해 서서히 거부반응이 발생하기 시작했어.
[지원] 경제공황을 겪으면서 잘 이겨내고 내치에 성공한 제임스가 대통령 재임선거에 승리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네요. 그리고 두 번째 임기를 지내면서 영토를 확장하고 국내 도로망 등도 정비하는 등 많은 일을 처리했으니 국민들로부터 존경받는 지도자였음은 자명하네요. 임기를 마친 제임스는 어떤 삶을 살았나요?
[해월] 1825년 3월 4일 퇴임한 제임스는 고향집이 있는 버지니아 주 라우든 카운티 올디(Aldie)로 돌아가 5년을 살았어. ‘오크 힐’(Oak Hill)이라 불리는 저택에 살면서 유럽에 대사로 나갔을 때 구입해 모은 장서 3,000 권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살았지. 조용히 독서로 세월을 보내다 책을 한번 써 볼까 생각은 했지만 끝내 이루지 못했어. 제임스 앞에 닥친 가장 큰 문제는 경제적 어려움과 부인의 건강문제였지. 대사로 나가있는 동안 정부의 쥐꼬리 만한 월급으로 직무수행에 어려움을 느낀 그가 미국에 있는 부동산을 담보로 돈을 빌려 썼는데 농사일에서 전혀 수입이 좋지 않아 부채가 많았었지. 대사직을 수행하면서 의회에 근무수당을 요청하기도 했고 임기말에도 요청한 바가 있었지만 모두 실패했지. 그래 결국 가지고 있던 ‘Highland 농장’을 중앙은행에 처분하고 빚 갚는데 쓰고 말았어. 그 집과 농장은 나중에 ‘윌리엄 앤 매리 대학’에 넘어가 사적지로 일반에 공개되고 있어.
[지원] 건국에 아버지들은 다섯 분 모두 퇴임한 후에 한결같이 빚더미에 고생하네요.
[해월] 그러게! 다들 부동산은 넉넉히 지녔지만 현금이 없어 고생했지. 그때나 지금이나 부동산을 가지려고 애들은 쓰지만 현금을 활용할 줄 알아야 노후가 편해지는 것이지. 조그마한 나라에서 ‘내 땅, 내 땅’ 하면서 사는데 이 커다란 미국을 다녀보면 그것만큼 허망한 희망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한 청렴결백한 지도자들의 참모습이 아닐까?! 어쨌든 제임스는 경제적 어려움에다 부인의 건강이 악화되어 어려움에 시름을 더했지. 평소에 건강이 좋지 않은 부인이 은퇴 후 살던 집 벽난로에서 넘어지는 바람에 깊은 화상을 입었었는데 상처가 악화되고 심한 고통을 받는 바람에 설상가상 치료비가 많이 들었어. 부인은 결국 1830년 9월 23일 62세를 일기로 사망했지.
[지원] 어려울 때 괴로움이 꼭 보태지니 인간사는 고통 그 자체인 것 같아요.
[해월] 말년에 닥치는 어려움이 더 힘들기만 하지. 제임스는 퇴임 후 잠시 버지니아 주 헌법회의 대의원으로 일한 때도 있고 버지니아 대학교 감독위원회에서 일하기도 했지만 늙고 병이 드는 바람에 오래 하진 못했어. 부인이 사망하기 이틀 전에 같이 살고 있던 사위이자 지방판사인 ‘죠지 헤이’(George Hay)가 사망했는데 부인마저 곁을 떠나자 심각한 정신적 고통을 받은 제임스는 뉴욕에 사는 작은 딸 마리아(Maria)를 찾아가 의탁하다가 1831년 7월 4일 월요일 아침에 심장마비와 결핵 합병증으로 73세를 일기로 사망했지. 미국 독립선언문 반포 55주년을 기념하는 날에 사망함으로써 토마스와 쟌에 이어 미국의 ‘독립기념일’ (Independence Day)에 사망한 세 번째 대통령이 되었어.
[지원] 독립기념일에 사망한 세 번째 대통령이라는 타이틀로 또 하나의 역사를 기록한 분이네요.
[해월] 사망 후 뉴욕시에 있는 사위네 가족묘에 묻혔다가 1858년에 가서 버지니아주 수도 리치먼드에 ‘할리웃 공동묘지’ (Hollywood Cemetery)로 이장되었어. 이 묘지는 알링턴 국립묘지(Arlington National Cemetery)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10대 대통령이었던 ‘쟌 타일러’(John Tyler)를 포함해 전직 대통령 두 분을 모신곳으로 남북전쟁 당시 남부군과 관련된 1만 1천 명의 많은 사람들이 안장되어 있는 곳이기도 해.
그를 기념하는 기념물로는 버지니아대학교 안에 ‘먼로상’(Statue of Monroe)이 있고, 흑인 노예를 해방시키면서 데리고 갔던 ‘라이베리아’(Liberia)가 수도를 그의 이름을 따 ‘먼로비아’(Monrovia)로 이름을 지면서 미국 수도인 워싱턴 디씨를 포함해 미국 대통령의 이름을 따서 지은 두 번째 수도가 되었지. 그의 이름을 딴 도시는 미국 여러 주에 걸쳐 있고, 1954년 발행된 5센트 우표를 포함해 화폐에도 그의 흉상이 들어있어. 제임스는 사진을 찍지 못한 마지막 대통령이 되었으나 죠지와 같이 전쟁에 참여함으로써 괄목할 만한 화가의 작품으로 그의 모습이 전해지고 있어.
제임스의 서명을 보면 그의 올곧은 성품을 살필 수 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