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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준 David Kim Nov 24. 2024

[도성한담]  미국의 대통령들  Ep15

6대 쟌 퀸지 에담스- 1 of 2:  2세대 선두주자 1767-1824

미국의 여섯 번째 대통령 ‘쟌 퀸지 에담스’(John Quincy Adams)는 두 번째 대통령 '쟌 에담스'(John Adams)의 장남이었습니다.  1767년 7월 11일 토요일 메사추새츠 주의 조용한 마을 ‘브레인트리’ (Braintree.  현재명은 Quincy임)에서 쟌 에담스와 '에비게일 스미스 에담스'(Abigail Smith Adams)의 3남 3녀 자녀 중 두 번째 아이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가 그녀의 할아버지였던 ‘쟌 퀸지’(John Quincy) 대령이 증손자가 태어난 지 이틀 만에 돌아가시자 그를 기리는 뜻으로 그의 성을 넣어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나중에 퀸지대령의 이름은 이 증손자가 태어난 도시의 이름으로 탈바꿈되어 ‘대통령의 도시’(City of Presidents)라는 이름으로도 전해집니다.


쟌 퀸지 에담스는 변호사로서 주 상원의원, 연방 상원의원, 연방 하원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가였으며, 연방 국무장관(Secretary of State)을 지낸 행정가였습니다.  그는 또 미국을 대표하는 외교관으로서 내덜렌드 대사, 프러시아 대사, 러시아 대사 그리고 영국 대사 등을 역임했습니다.  소위 ‘건국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혁명의 세대가 지나가고 그다음세대의 선두주자로 1825년부터 4년 동안 6대 대통령으로 봉직하다 퇴임한 후 1831년 연방 하원에 입성하여 미국 최초이자 ‘엔드류 쟌슨’(Andrew Johnson) 17대 대통령과 함께 전직 대통령으로서 연방 하원의원이 되어 1848년 2월 23일 사망할 때까지 퇴임 후 쉼 없이 17년간을 국가를 위해 봉사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지금부터 ‘노예제도폐지론자’(Abolitionist)라는 별명을 달고 살던 쟌 퀸지 에담스(이하 퀸지)에 대해 같이 살펴보겠습니다.


쟌 퀸지 에담스의 백악관 공식 영정




[珍稀]  아버지가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었으니 풍요로운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겠지요, 선생님?

[海月]  18세기 중엽 영국의 식민지에서 변호사 일을 한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퀸지가 영국의 문물을 접했을 것은 분명하고, 아버지 쟌이 유럽 여러 나라 대사로 나갔을 때 어린 아들을 동행했었으니까 모르긴 해도 그때 비슷한 연령의 다른 아이들보다 유럽에서 더 많이 발전된 문물을 경험했을 수 있었겠지.  시쳇말로 '아빠찬스'를 즐겼을 거라고 생각해.  10살 전에는 아버지가 독립을 위한 운동에 참여했기 때문에 고향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며 학교가 아닌 가정교사를 통해 고전과 철학에 관련된 책을 많이 읽었어.  학문을 일찍 깨달은 퀸지는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11살 때부터 일상생활을 일기장에 기록하여 남기는 습관을 들이기 시작했다고 해.  


[진희]  좋은 습관을 들였네요.  일기장 꼬박꼬박 쓰는 친구들 보면 생각에 논리가 정연하고 기억을 바로 하기 때문에 거의 바른말을 하더라고요.  작문 솜씨도 꽤나 좋아요.

[해월]  반드시 모든 이가 그렇다 구는 못해도 내가 써 놓은 글을 보면서 반성도하고 잘못한 행동을 고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겠지.  그런 과정을 거친다면 누구나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을 거야.  성인에게도 필요한 것이니까.  퀸지는 외교사절로 프랑스로 건너가는 아버지를 따라서 11살 되던 1778년에 유럽행 선박에 오르지.  1785년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으니까 최소한 7년간 유럽생활을 한 거야. 

 

[진희]  요즘도 외교관의 자녀들은 외국으로 많이 다니던데 퀸지도 그런 아이 중 하나였네요.  18살까지 살았으니까 유럽의 문화를 상당히 받아들이고 이해도 했겠어요.

[해월]  외교관의 자녀들은 그래서 여러모로 앞서기도 하지만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고 들었어.  이동을 많이 하니까 친구를 사귀기 힘들다고 해.  퀸지도 그랬지 않았을까 싶네.  유럽에 있는 동안 법률, 프랑스어, 그리스어, 라틴어 등도 공부한 퀸지는 ‘내덜렌드’(the Netherlands)의 ‘라이든’(Leiden)에 있는 ‘라이든 대학교’(Leiden University)를 포함한 여러 학교에서 공부를 했지.  1781년부터는 약 2년간 러시아로 가서 그곳 주재 미국대사인 ‘후렌시스 데이나’(Francis Dana)의 비서로 일한 적도 있어.  이때 러시아어 공부도 했지. 사랑하는 아들 퀸지에게 다양한 경험을 겪을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아버지가 의도적으로 마련한 기회였어. 아버지가 아들의 미래를 위해 얼마나 신경을 쓰고 노력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야.  1784년에는 아버지가 영국으로 발령 나자 함께 갔다가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1785년에 미국으로 돌아왔어. 

 

1575년 설립된 Leiden University의 1614년 켐퍼스 모습


[진희]  외교관이나 해외지사에 근무하는 상사원들의 자녀들 중 많은 이들이 정신적으로 힘들어하던데 퀸지는 그렇지는 않았나 보죠?

[해월]  나도 주위에서 보긴 했지만 언어와 문화가 크게 다르지 않은 곳으로 갔었기 때문에 퀸지는 잘 이겨낸 것 같아.  미국으로 돌아온 퀸지는 1786년 ‘하버드 대학교’(Harvard College) 3학년으로 편입할 수 있었어. 퀸지는  ‘화이 베이타 카파’(Phi Beta Kappa Society. ΦΒΚ)라는 영예학생단체 회원이 되었고, 다행히 발군의 학업성적을 보여주기 시작했어.  1787년에 동급생 중 2등으로 졸업한 퀸지는 바로 2년간 메사추새츠 주 ‘뉴배리포트’ (Newberyport)에 있는 변호사 겸 법학자인 ‘시어훠러스 파슨스’(Theophilus Parsons)에게서 법률공부를 하고 변호사 자격도 얻었지.  1790년부터 ‘보스턴’(Boston)에서 변호사 개업을 하면서 처음에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곧 바빠져 경제적으로 부모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고.  그때 그의 나이가 스물셋이었어.


[진희]  당시 미국을 이끌어나갔던 분들은 대부분 일찍 자수성가를 하는 모습이네요.  요즘은 23살에 삶의 방향도 못 잡고 헤매는 젊은이들이 상상외로 많은 텐데요.

[해월]  글쎄, 사람 나름이겠지.  앞날을 보는 사람하고 못 보는 사람의 삶에는 많은 차이가 있을 거야.  훗날 성공하는 사람들의 초년을 보면 대개 어려운 환경에서 힘든 삶을 살면서도 나름 열심히 깨달으려 애쓰고 누군가 지혜와 용기를 주는 ‘맨터’(mentor)가 나타나곤 하지.  살면서 가장 바람직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해.

  

[진희]  선생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해요.  살면 살 수록 성인이 되어 성공하기 위해서는 앞날을 현명하게 볼 수 있는 길을 배우는 것이고, 그렇게 되기 위한 길을 일러주는 마음의 선생님이 곁에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굴뚝같아요. 그를 얻은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믿어요.  

[해월]  맞는 말이야!  모든 젊은이들이 마음의 스승을 얻기를 바라.  그런 뜻에서 퀸지는 가장 가까울 수 있는 아버지를 통해 세상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넉넉히 가진 것으로 보여.  변호사가 된 퀸지는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으려 했지만 세상 돌아가는 모양에 가만있을 수가 없었던 것 같아.  필명으로 영국과 프랑스의 정치체제를 비교분석하는 글을 발표하기도 하고, 죠지의 프랑스혁명전쟁에 대한 중립정책을 비난한 프랑스 외교관을 공격하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지.  그러자 그의 글을 읽어 본 죠지가 마음에 들었던지 1794년에 27세의 퀸지를 ‘내덜렌드’ 대사(당시의 대사직은 미국의 위상이 낮아 현재의 대사직보다 직급으로 한 단계 아래였음)로 발령 내었어.   처음엔  사양할까 했는데 아버지가 권하는 바람에 대사직을 맡은 퀸지는 프랑스혁명전쟁에 대처해 중립정책 유지가 미국경제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였고, 미국의 경제상황에 도움을 주기 위해 내덜렌드로부터 차관을 얻고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지.  이때 ‘쟌 제이’(John Jay)가 영국과 추진하던 협상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기도 했어.  미국 내에서는 ‘제이조약’이 맺어지면서 영국파(Alexander Hamilton)와 프랑스파 (Thomas Jefferson) 사이에 대외정책상 대립이 심화되었었지.


[진희]  죠지때문에 할 수 없이 정가로 진출했는지는 모르지만 어쩌면 잘된 일 아닌가요?

[해월]  아버지 쟌이 일찌감치 정치에 발을 들여놓았으니 정가에서는 퀸지를 눈여겨보고 있었을 거야.  능력 있는 퀸지를 가만두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  1795년 말 겨울 영국 런던에 잠시 머물던 퀸지에게 뜻밖의 일이 생겼어.  영국에서 장사를 하며 살고 있던 ‘자슈아 쟌슨’(Joshua Johnson)이라는 거상의 둘째 딸인 ‘루이사 케서린 쟌슨’(Louisa Catherine Johnson.  1775 – 1852)을 만난 거야.  사업에 성공한 자슈아는 미국의 독립을 지원하면서 1778년에 영국을 떠나 프랑스에서 5년간 지내다 다시 영국으로 돌아갔는데 루이사는 프랑스의 학교에서 프랑스어와 그리스어 그리고 라틴어를 공부하고 있었지.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루이사는 런던으로 돌아간 후 퀸지를 만나 사랑을 나누게 되었고, 이듬해 4월에 그의 구애를 받아들여 1797년 7월 26일 런던에 있는 영국성공회교회 “All Hallows-by-the Tower”에서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식을 올렸어.  퀸지의 부모가 루이사가 영국에서 자란 사람이라 안 된다고 했다는데 젊고 사랑에 빠진 퀸지가 이해하긴 어렵지. 부모에게 자신의 결정을 재고하기 않겠다고 통보한 퀸지는 미국으로 돌아갔을 때 결혼식을 올릴 계획을 앞당겨 영국에서 결혼식을 올렸던 거야.  그런데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장인이 영국에 있는 빚쟁이들을 피해 영국을 떠나는 바람에 사위에게 약속했던 ‘신부의 결혼지참금’(dowry)을 주지 못하게 되고, 루이사는 두고두고 퀸지에게 면목없게 되었어.  퀸지는 자신의 결혼에 한점 후회가 없다고 일기장에 남겼지.


1797년 결혼 당시의 쟌 퀸지 에담스와 루이사 케서린 쟌슨의 모습


[진희]  30에 결혼했으니 그리 늦은 것도 아니네요.  요즘은 결혼연령이 더 늦어졌어요.

[해월]  그렇다고 빠른 것도 아니네.  젊은 사람이 일찍부터 사회생활을 하고 국가의 일을 하게 되니까 개인생활에 피해가 당연히 오겠지.  죠지는 1796년에 퀸지를 다시 ‘포르투갈’(Portugal) 대사로 임명하게 돼.  미국이 독립선언할 때 제일 먼저 미국을 승인한 중립국가인 포르투갈의 대사로 임명된 그해 12월 부통령인 아버지 쟌이 대통령 선거에서 재퍼슨을 누르고 승리하게 되었어.  대통령이 된 아버지가 아들을 이번엔 ‘프러시아’(Prussia.  독일의 전 이름) 대사로 임명했어.  


[진희]  대통령 아버지가 아들을 대사로 발령 낸다는 사실이 트럼프대통령이 딸과 사위를 백악관의 특별보좌관인 '선임고문'(Senior Advisor)으로 발령 냈던 것처럼 크게 장려할 만한 일은 아니었을 텐데요? 

[해월]  물론이지!  그러나 퀸지는 족벌정치라고 비난하는 정가의 비판을 뒤로하고 부인과 막냇동생 ‘토마스 보일스턴’ (Thomas Boylston.  1772-1832)을 데리고 임지인 ‘배를린’(Berlin)으로 떠났어.  프러시아와 스웨덴과 통상관계 증진을 추진하도록 명 받은 퀸지는 1799년에 프러시아와 새로운 통상조약을 맺도록 추진하고, 아버지의 유럽 동향파악 및 보고 명령에도 부응하여 열심히 보고서를 작성해서 올렸지.  아버지 쟌은 아들의 보고서를 많이 참고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어.  한편 프러시아 정치인과 외교관들과 친분을 쌓은 퀸지는 프러시아의 고도古都 ‘실레시아’(Silesia)에 대한 글을 많이 써서 가족에게 보냈었는데 나중에 이 글을 모아 ‘실레시아에서 온 편지’(Letters on Silesia’라는 책으로 발간하기도 했어.  1800년에 아버지가 이번에는 재퍼슨을 상대로 재선에 실패하자 이듬해 부자가 모두 공직에서 떠났지.


[진희]  대사직을 그만두고 미국에 돌아온 퀸지는 오랜만에 가족과 오붓한 생활을 즐길 수 있었겠네요.

[해월]  1801년에 보스턴으로 돌아온 퀸지가 변호사 개업을 다시 했으니까 글쎄, 오붓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을까?  게다가 1802년 4월 선거에 메사추새츠 주 상원의원에 출마해 당선됐고, 11월에는 연방 하원의원에 출마했다 실패했는데, 그런 그를 1803년 2월 연방주의당 의원이 장악하고 있던 주 의회에서 연방 상원의원으로 선출하는 동상이몽의 정치쇼가 벌어졌지.  퀸지는 정당가입을 주저하다가 아버지가 몸담었던 연방주의당에 마지못해 가입했지만 점점 당과 거리를 두게 되었어.  연방주의당의 지지도가 떨어져 가고 당의 외교정책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 데다가 당대표인 ‘티모시 피커링’ (Timothy Pickering)이 너무 친영국 편향이었기 때문이지. 퀸지는 오히려 재퍼슨행정부의 ‘루이지에나 매입’(Louisiana Purchase)과 영토확장 정책을 지지하면서 연방주의당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었지.  특히 미국 상선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영국에 저항하기 위해 의회에서 1806년에 통과한 ‘수입정지법’(Non-importation Act)에 찬성하고, 1807년에 통과된 ‘수출금지법’(Embargo Act)에도 찬성함으로써 소속당인 연방주의당 정책에 반하는 입장에 서게 된 퀸지는 끝내 당과 결별하면서 상원의원직도 사임하고 말았어.


[진희]  역시 정치인들에게 개인의 삶이란 즐길 시간이 허용되지 않는 사치일 뿐인가요.

[해월]  중요한 것이지만 짬을 활용해 즐길 수밖에 없을 거야.  연방 상원의원직을 수행하면서 퀸지는 브라운 대학교(Brown University)와 하버드 대학교에서 정치와 관련된 논리학과 수사학 그리고 웅변학 등 강의를 하기도 했으니까 좀처럼 시간도 없었을 거고.  사실 퀸지와 부인은 서로 강한 성격의 소유자라 뜻을 맞추기 쉽지 않았고 언쟁도 많이 했으니 오히려 그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지.  


[진희]  부부싸움이 자주 있었나 보죠?

[해월]  환경이 다른 집안사람들이 만나는 것이 부부이니까 의견충돌이 있을 수 있겠지. 한 가지 1801년 프러시아 대사로 나가있을 때 배를린에서 태어난 큰 아들 ‘죠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1801-1829)이 하바드를 졸업하고 변호사에다 주 하원의원을 지냈었는데 알코올중독자가 되면서 유람선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것으로 봐 부모에게서 무언가 영향을 받고 자라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하게 하지.  그냥 추측이지만.


[진희]  왜 이름이 죠지 워싱턴이었을까요?

[해월]  그러게.  큰 손자의 이름 때문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많이 실망했다고 하는데 이것도 이들 부부의 성격이 어느 정도 괴팍한지 보여주는 한 대목 아닐까 해.  그 많은 이름 중에서 왜 ‘죠지 워싱턴’이라고 아들의 이름을 지었는지 말이야.  


[진희]  당시 사람들이 그랬듯이 퀸지도 죠지를 무척이나 존경해서 아들에게 그 이름을 주지 않았을까요?

[해월]  그냥 의문으로 묻어두자, 진희야.  1808년에 상원의원을 사임한 퀸지에게 이듬해 제임스 메디슨 4대 대통령이 초대 '러시아'(Russia) 대사를 제안했어.  연방주의당과 결별하고 재퍼슨의 외교정책을 지지하는 퀸지가 유럽 여러 나라와 러시아에서 쌓은 경험이 메디슨정부에서 본다면 누구보다 자격 있는 외교관이었을 거야.  러시아 대사로 부임한 퀸지는 러시아 관료들과 급속히 가까워지고 여러모로 생산적인 실적을 쌓아나가면서 러시아 황제 ‘알랙산더 1세’(Alexander I)와도 친분을 다졌지.  ‘나폴래옹 전쟁’(Napoleonic War)이 지속되는 가운데 나폴래옹이 러시아를 침입했다가 결국 프랑스가 패퇴하는 모습도 지켜보았어.  미국의 중립을 선호한 그를 메디슨 대통령은 뜬금없이 1811년에 연방대법원 판사에 지명했는데 정치와 외교 쪽을 선호한 퀸지는 상원에서 그의 임명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지만 이를 사양했어.  그리고는 1812년에 영국과의 전쟁이 발발했지. 

 

[진희]  일종의 직업외교관으로 성실히 일하는 사람을 갑자기 판사로 호출한 이유가 궁금하네요.  영국과의 관계도 악화일로인 상태에서요.  

[해월]  정치적 결정이었을 테니 그 이유를 알 도리는 없어.  프랑스를 지지하는 제임스 메디슨은 영국이 계속해서 자국 상선을 공격하고 선원들을 납치하자 결국 1812년에 전쟁을 선포하였지.  전쟁이 발발하자 러시아 황제가 중재를 자처하고 나섰고 메디슨은 퀸지를 단장으로 하는 종전협상단을 꾸렸지만 영국이 러시아의 중재를 거부하는 바람에 퀸지는 1814년 4월에 러시아를 떠나 벨지움의 항구도시 ‘갠트’(Ghent)에서 종전협상을 이어갔어.  전쟁 초반엔 영국의 승전고가 울려 퍼지긴 했지만 1814년 9월에 미북부에서 전개되었던 ‘쳄프린 호수 전투’ (Battle of Lake Champlain)에서 영국의 패배가 가시화되자 영국수상 ‘리버풀 경’(Lord Liverpool) 정부가 종전결정을 내리고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 선물로 종전조약 ‘갠트조약’(Treaty of Ghent)을 맺게 되지.  조약은 맺었지만 사실 별로 변한 것이 없고 얻은 것도 없어.  다만 미국으로서는 세계적 강국과 또 한 번의 전투를 벌여 패하지 않았다는 자부심을 얻게 되었지.  성공리에 종전협상을 마무리 진 퀸지는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유배에서 풀려난 나폴래옹의 마지막 100일 동안의 활약(나폴래옹은 1815년의 '워터루 전투'(Battle of Waterloo)에서 패배함으로써 그의 시대를 마감하게 됨)을 목격하고 있었지.


[진희]  미국의 시작도 기구하지만 인류역사의 진행을 보면 참으로 기구하네요.  끝없는 전쟁과 수없는 인간의 죽음이 과연 반드시 필요한 것인지 궁금해요.  아직도 그 시련이 끝나지 않으니 말이에요.

[해월]  인류가 지구상에 출현한 20만 년 역사에서 아마 전쟁이 없던 시대는 없었을 거야.  어쩌면 신이 만든 ‘인류설계도’에 반드시 필요한 과정인지도 모르지.  퀸지는 1815년 5월 메디슨에 의해 다시 영국대사로 발령받게 되었고, 이번에는 영국과 통상협상을 개시했지.  그러면서 영국에 잡혀있는 미국인 선원과 전쟁포로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애를 썼어.  그럴 즈음 새 대통령 ‘제임스 먼로’(James Monroe) 5대 대통령이 그를 국무장관 적임자로 지목하였고, 1817년 8월 오랫동안의 유럽생활을 마무리하고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지.


1815년 쟌 퀸지 에담스가 런던에서 발행한 미국 여권


[진희]  외교관으로 외국생활을 오래 하다가 드디어 국내정치 세계로 들어오는군요.

[해월]  순서대로 진행되는 거야.  1817년부터 1825년까지 8년간 먼로와 손잡고 미국정치를 이끌게 된 퀸지는 많은 일을 했어.  영국과의 전쟁 후 미북부 Great Lakes와 Lake Champlain에서 양국의 군함이 무장정도를 제한하자는 합의가 1817년에 이루어졌고, 1818년에는 미국과 캐나다의 국경선을 북위 49도 선으로 결정하면서 미국 북서부 지역으로 태평양을 접하고 있는 지역인 ‘오래곤 부속령’(Oregon Country)을 공동관리한다는 ‘1818년의 조약’(Treaty of 1818)을 체결하지.  1819년에는 남부 후로리다 일대와 중서부를 지배하고 있는 스페인과 협상을 지속한 결과 경계를 확정 짓고, 후로리다를 미국정부에 넘겨주는 ‘에담스-오니스 조약’(Adams-Onis Treaty)를 체결함으로써 미국 서부의 경계를 확정 짓게 돼.  토마스 재퍼슨이 프랑스로부터 중부를 사들인 후 서부에 눈독을 잔뜩 들이게 된 미국정부가 스페인이 정복하고 있는 지역과 무주공산인 북서부의 오래곤 부속령을 그냥 둘리 없었을 거야.  그리고 1824년에는 이 오래곤 부속령에 대한 사전 조치로 러시아와의 경계를 북위 54도 40분(알라스카 지역)으로 묶어두는 ‘1824년의 루소-어매리칸 조약’(Russo-American Treaty of 1824)을 비준하면서 확정하였지. 

 

[진희]  미국의 국토 확장정책의 일환으로 국경을 확실히 하면서 영토를 넓혀가는 일을 착착 진행하고 있네요. 

[해월]  그렇지.  게다가 먼로 대통령과 퀸지는 쇄약해지고 있는 스페인과 프랑스에 반해 새로운 권력으로 등장한 소위말하는 ‘신성동맹’(Holy Alliance)이라 불리는 프러시아(독일), '오스트리아'(Austria) 그리고 러시아 3국이 스페인이 통치하던 식민지에 눈을 돌리지나 않을까 은근히 경계를 했어.  그러다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는 여러 남미와 중미 국가들이 미국의 승인을 요청하고 있었지만 유럽열강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지 않으려고 미뤄왔었던 정책을 바꾸어 아르헨티나와 맥시코를 포함한 남미 신생 독립국을 인정하기 시작했지.  그랬더니 영국이 함께 신생국들을 승인하겠다고 제안하고 나섰어.  이에 퀸지와 내각은 영국의 동참을 반대한다고 천명하고 먼로로 하여금 미국은 유럽제국의 일에 중립을 지킬 테니 유럽국가들은 중미와 남미에 관여하거나 식민지를 구축할 생각을 아예 하지 말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할 것을 독려했어.  먼로는 이에 동의하고 1823년 12월 의회에 보낸 연례교서에서 퀸지가 설계한 소위 ‘먼로 독트린’(Monroe Doctrine)을 발표했지.  이 먼로 선언으로 인해 미국 외교정책의 근간이 완성되었다고 보는데, 즉 미국의 외교적 관심이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떠나 북미 서부와 중, 남미로 전환되었음을 뜻하고 미국의 배타적 지배력이 미치는 지역을 만방에 최초로 천명했음을 뜻하지.  이는 곧 미국이 새로운 제국주의 국가로 전환됨을 의미하는 것으로 결국 유럽의 강국을 물리치고 새로운 강국이 되었으니 이제는 식민지를 갖는 나라가 되겠다고 만방에 알리는 모양새가 된 것이야.  그 중심에 퀸지가 자리 잡게 된 것이고.


[진희]  미국이 독립하고 정부를 세운 지 34년 만에 외국에 이래라저래라 하는 나라로 탈바꿈했네요.  그것도 엄중한 목소리로 만천하에 알리는 방식으로요.

[해월]  진희 얘기가 정확해.  엄중한 경고를 날렸지.  실제 그로부터 미국의 제국주의 정책이 이어지고 있는 거야.  이런 일을 전개한 국무장관 퀸지가 갖는 먼로행정부에서의 위상이 그만큼 커졌고 또 처음부터 먼로를 이을 차기 대통령으로 지목되기 시작했지.  영국을 지지하는 연방주의자와 그 당이 ‘1812년 전쟁’을 통해 그 최후를 가져오는 가운데 퀸지도 지지정당을 바꾸고 ‘민주적-공화주의당’(Democratic-Republican Party)의 후보로 1824년에 치러진 10번째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어.  같은 당에서 여러 명이 출사표를 냈지만 퀸지가 당연히 선두주자였어. 처음에는 ‘엔드류 젝슨’(Andrew Jackson) 장군을 부통령 후보로 고려했지만 엔드류가 일종의 배신을 하면서 대통령 후보로 뛰어들어 최종적으로 4파전이 되었지.  퀸지는 할 수 없이 부통령 후보로 개인적 친분이 두터운 연방 상원의원 ‘쟌 켈혼’(John C. Calhoun)과 손을 잡았어.  10월 26일부터 12월 2일까지 전개된 대선에서 전체 24개 주 261명의 선거인단이 구성된 가운데 엔드류가 99표로 최다표를, 그리고 퀸지가 84표, 재무장관 ‘윌리엄 크로훠드’(William H. Crawford)가  41표를 얻었고 마지막 후보였던 하원의장 ‘핸리 클레이’(Henry Clay)가 37표를 획득함으로써 결정적 과반수 득표자가 없게 되었어. 

 

1824년 선거 결과


[진희]  처음으로 과반수 득표자가 나오지 않았네요.  그럼 어떻게 되나요, 선생님?

[해월]  우선 지방색이 두드러진 선거였어.  퀸지는 북부 '뉴 잉글랜드'(New England) 지역과 뉴욕에서 완승하고, 엔드류는 대부분 남부 노예소유주 지역에서 승리했지.  대통령선거에서 선거인단 과반수 득표자가 없을 경우 헌법은 연방 하원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조건부 선거’(contingent election)를 통해 선출토록 규정하고 있는데 이번 선거에서 달라진 것은 지난 1803년도 의회에서 12차 헌법개정을 하면서 선거인단의 선거인이 일인당 두 명의 후보에게 투표하던 방식을 대통령 후보에 1번 투표하고 부통령 후보에게 1번 투표하는 방식으로 바꾸었지.  그래서 복수의 과반득표자가 나올 수 없도록 하였고, 하원의 ‘조건부 선거’의 대상이 되는 후보자수를 과거 5명에서 3명으로 축소하면서, 각 주에서 1명의 대의원을 선정하고 각자가 단 1표의 선거권을 행사토록 했지.  

 

[진희]  그럼 6대 대통령 선출은 결국 엔드류, 퀸지 그리고 윌리엄 그렇게 세 사람이 연방 하원에서 각 주의 대의원에 의해 선출하게 된 셈이네요.

[해월]  맞아!  퀸지는 이번 선거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핸리의 지지가 필수임을 확신해 그에게 국무장관 자리를 약속하고 그의 지지를 얻어냈어.  그리고 연방주의파 사람들에게 대통령에 당선되면 연방주의파 사람들을 행정부에 등용시키겠다고 했지.  1825년 2월 9일 연방하원에서 치러진  ‘임시선거’ 첫 번째 투표에서 퀸지가 24개 주에서 13주(13표)를 얻으면서 6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어.  엔드류는 7개 주 그리고 윌리엄은 4개 주를 얻는데 그쳤어.  선거가 끝나자 엔드류 지지파에서는 퀸지와 핸리가 정치적으로 타락한 야합을 했다고 주장하고 나섰지.  서로의 잘못을 들추고 욕보이는 것이 그때나 지금이나 정치가 아닌지.


[진희]  퀸지는 ‘건국의 아버지’라 불리는 혁명의 세대가 아닌 그다음 세대의 선두주자라고 하셨는데 젊은 세대로 미국을 위한 일을 새롭게 펼쳐나갔겠죠?  

[해월]  57세 퀸지의 취임은 색다르게 진행되었어.  1825년 3월 4일 전 대통령의 아들로서는 처음으로 대통령에 오르면서 '아빠찬스'의 선두주자가 된 그는 176년 뒤에 ‘죠지 부쉬’(George H. W. Bush.  1924-2018) 41대 대통령의 아들 '죠지'(George W. Bush.  1946 - )가 43대 대통령에 취임할 때까지는 유일하게 ‘아들 대통령’ 자리를 차지했었지.  퀸지는 이 날 직무선서를 할 때 성경책에 손을 올리고 선서하는 전례를 깨고 ‘헌법’(Constitutional Law) 전서에 손을 얹고 선서를 했어.  그리고 취임연설을 통해 당파색을 배제하면서 정당구축이나 공무원 임용에 정치적 배려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  그러면서 국내 도로, 항구, 운하 등 사회간접자본을 대폭 증강하자는 ‘국내 증강’(internal improvement) 프로그램을 상세하게 발표하면서 의회의 협조를 당부하기도 했어.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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