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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있을없을무 Dec 03. 2023

5. 주말입니다

그런데 오랜만에 과수면 극복을 곁들인


토요일, 전산회계 2급

자격증 시험을 접수해 놨었어요. 공부는 거의 하지 않았고요. 회계원리에 대한 기본 지식이 좀 있기도 했었고, 사실 저녁에 집에 오면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침대에 눕기 바빴습니다. 외출복은 다 던져놓고 침대에 누워서 인강을 보기도 하고 그대로 자기도 하고 그랬어요. 음, 사실 이론 말고 실기 공부는 해야 했는데요. 제 컴퓨터에서 실기 프로그램이 열리지 않더군요. 그래서 실기 프로그램 입력 방법도 인강만 냅다 보며 머릿속에 집어넣고 갔습니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시험 접수는 했는데, 제대로 준비는 안 했다, 이겁니다. 우울증을 핑계로 대충 사는 건 참 쉬운 일입니다.


아무튼 그래서 시험을 보러 갔습니다. 사전 입실 시간이 정해져 있어서 사람들이 줄을 서서 입실을 기다리고 있더군요. 다들 손에 요약본을 쥐고 막판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치열한 세상이에요. 저는 그냥 그동안의 태도로 미뤄보아 긴장할 이유도 없고 그냥 시험 경험으로 만족하기 위해 왔기 때문에 그냥 서서 기다렸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요.


그렇게 시험을 치렀습니다. 그런데. 이 시험에 대해 바라는 것이 없어 긴장할 이유가 하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끝날 시간이 다 와가니 은근히 긴장이 되더군요. 왠지 모르게 제가 평소에 가진 불안에 대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라는 것이 없는 시험 중에도 긴장감이 드는데, 바라는 것이 많았던 나는 그동안 얼마나 긴장 상태로 살았겠는지요.



토요일, 과수면

요즈음의 삶은 이분법입니다.


눈을 뜨고 있을 때에는(주로 회사에 있을 때죠.) 온갖 걱정이 끊이지를 않아서 불안하고 긴장하면서 살고 있고요. 그러나 사회 속에 있기 때문에 이런 감정을 최대한 조절하기 위해 열심히 웃고 농담에 대답하느라 힘을 더 씁니다. 참, 그거 아시죠? 걱정의 96%의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요. 제 걱정의 주제는 먹고사는 걱정인데, 저도 제가 과한 걱정을 한다는 걸 알고는 있어요. 그래도 안 끊이는 걸 어쩝니까. 그래서 첫 번째 이분법의 저는 사회 속에 있는 저는 회사에서 일도 하며 동료의 농담에도 웃으며 힘을 과하게 소진하는 사람입니다.


이번엔 두 번째 이분법의 저입니다. 집에 돌아오면 아무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아 져요. 먼 미래? 걱정됩니다. 생각을 끊어야겠습니다. 끊고, 끊고, 끊으면 내일에 대한 생각도 끊어지고, 오늘에 대한 생각도 끊어집니다. 아무것도 없는 머릿속에 남는 것은 잠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잡니다. 최근에는 평일, 주말 가릴 것 없이 10시간 이상을 자고 있습니다. 자랑 아닌 거 알아요. 일단은 그래도 기록을 하기로 마음먹었으니 너무 거짓말은 하지 말아야죠.


그래서 자격시험을 치고 나서도 영화 한 편을 보고 바로 잤습니다. 그게 저녁 6시쯤이고, 눈을 뜨니 저녁 9시더군요. 갑자기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애매하잖아요, 저녁 9시. 그래서 다시 눈을 감았다가..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시간이 아까워서요. 다시 일어난 저는 다 던져놓은 옷가지를 정리하고, 잔뜩 쌓여있던 수건을 빨고, 청소기를 돌리고, 설거지를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소개서를 써서 제출해 냈습니다.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방법은 ‘절제’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요즈음은 그 말을 볼 때마다 죄책감이 들었어요. 그렇지만 어제는 자신 있게 그 말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정말, 정말 오랜만에 과수면을 박차고 일어나서 세 시간의 알찬 밤을 보냈으니까요.



일요일, 넓고, 사람 없고, 쾌적한 카페가 있나요?

청소도 다 했고, 자소서도 냈으니 오랜만에 일요일은 정말 아무 생각 안 하고 쉬기로 했습니다. 자꾸 걱정만 하고 야금야금 안 쉬고 자소서 쓰고 제출하는 데에만 중독되어 있어서요. 웃기는 건 뭔지 알아요? 이렇게 자소서만 제출하고, 시험공부나 면접은 가기 싫다는 겁니다. 뭔가는 해야 할 것 같고, 더 하기는 싫고, 그래서 자소서를 쓰고 제출하는 데에 중독이 되어있나 봅니다. 아무튼 제대로 쉬지도, 안 쉬지도 않는 애매하고 의욕 없는 일상만 보내고 있으니 오늘은 정말로 마음먹고 쉬어보기로 했어요.


제가 사는 곳은 구석탱이에 있습니다. 집 근처에는 카페도 거의 없어요. 그런데 카페 하나가 새로 생겼더군요. 원래는 거기 가려고 했는데, 콘센트 꼽는 자리가 없는 겁니다. 아쉬운 마음으로 카페에서 나왔습니다. 집에 다시 돌아갈까 고민을 했어요. 그렇지만 오늘 열심히, 그리고 나를 대접하며 쉬어보려고 렌즈도 끼고 추리닝 대신 외출복까지 입고 나왔고, 해가 밝은데 다시 집에 들어가기는 아까운 거예요. 그래서 집에 돌아가려는 마음을 이겨내고 지도 검색으로 조금 더 멀리 있는 프랜차이즈 카페에 왔습니다.


오잉? 그런데  이곳이 딱 제가 찾던 곳인 거예요. 넓은데, 사람도 없고, 온풍기가 빵빵해서 따뜻한 프랜차이즈 카페. 개인 카페는 너무 오래 앉아있으면 눈치가 보여서요. 아무튼 그래서 지금은 여기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는 중입니다. 오늘은 브런치도 쓰고, 가벼운 에세이도 좀 읽고, 노트에 생각도 마구 적고 가봐야겠어요. 오늘은 쉬는 날입니다.



참, 제가 연관 짓는 생각을 잘하는데요. 오늘 목적한 카페는 가지 못했지만 조금 더 이동해서 오히려 더 좋은 , 제가 원하는 곳에 왔잖아요? 이거,, 인생일까요? 움직이다 보면 오히려 더 잘 맞는 길이나 장소를 찾는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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