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찌니 Jun 13. 2024

하 심란하여 홀로 산에 올랐더니

응모엔 떨어지고 아들은 퇴사한다 하고


  

 결국 아들은 팀장에게 사직의사를 전했다고 했다. 팀장은 다시 생각해 보라고 만류했지만 그것조차도 아들은 본인의 인사고과에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할 것 같아서 하는 행동이라고 불신했다.


그렇게 잡을 거면서 왜 갈궜대? 나쁜 놈...


그렇게 욕을 하다가


그래도... 잡으니까... 못 이기는 척... 좀 더... 다니면서...


술에 얼큰하게 취해 자정 넘어 귀가한 아들에게 조심스럽게 이렇게 말해 보았지만 아들은 단호하게 노 노 싫어 싫어...라고 진저리를 쳤다.   


어쩐지 남편에게 쉽게 말을 할 수가 없어서 이틀이 지난  아침에서야  면도를 하는 옆에 다가앉아서 말했다.


애가... 결국은... 그만두겠다고 말했다네...


남편이 전기면도기를 끄고 두 팔을 늘어뜨린 채로 잠시 가만히 있었다.  위잉... 하는 기계음과 함께  드르르륵... 수염 깎이는 소리가 사라지고 불안한 정적이 찾아왔다. 아들에 대한 실망과 분노의 일갈이 나올까 두려웠는데 남편은 다시 면도를 하면서 말했다.


별 수 없지... 다니면서 알아볼 수는 없대?


팀장이 잡는다고는 하는데... 팀장이 자기 인사고과 때문에 잡는 거라고... 그래도 못 이기는 척 좀 더 다니면서... 아니면 부서 이동이라도... 얘기해 봤더니 한마디로 거절하더라... 맘이 완전히 떠났나 봐... 입사 전에 공부하다가 취직되는 바람에 그만둔 코딩인가 그거... 다시 할 거라고...

그래도 아무런 계획 없이 그만두는 건 아니니까... 아예 업종을 바꾸려는 거 보면 그 일이  안 맞았나 봐...


또다시 위잉... 드르륵 거리는 전기면도기의 소음 속에서 나는 남편에게 바싹 다가앉아 최대한 차분하게 얘기했고 남편은 면도를 하면서 주의 깊게 듣는 것 같았다.


별 수 없지 뭐 그렇게 하겠다는데...


남편은 다시 한번 그렇게 말한 후  면도기를 내려놓고 끄응, 무겁게 일어나 세면장으로 들어갔다. 남편의 어깨가 오늘따라 유난히 구부정해 보였다.


ㅡㅡㅡㅡㅡㅡㅡㅡ


며칠 전에  모 문학지 신인문학상 응모에 떨어졌음도 확인했다. 혹시나 싶어 심사평을 꼼꼼히 읽어봤지만 나의 응모작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었다. 최종심에도 오르지 못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30대 초 전업주부로 들어앉아 아들을 키우면서 케이티에서 임대해 준 하이텔이라는 컴퓨터 단말기 장편소설을 써서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응모했었다. 고 박완서 작가님믜  첫 소설 나목, 을 탄생시킨 공모였다.

당선은 되지 않았지만 최종심에 올라서 심사평에 몇 줄 언급이 되었었다. 재미 삼아 쓴 첫 장편소설의  기대 이상의 예상 밖의 성과였다.


나 글재주 있나 봐., 싶었다. 그래서 그땐  곧  뭐라도 될 줄 알았다. 꿈이 곧 이루어질 줄 알았다. 길고 긴, 끝이 보이지 않는 희망고문의 시작인 줄 그땐 몰랐다.  


당선인의 당선소감에는 김경욱, 조경란 등 유명 작가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그렇게 당선작은 유명한 현직 작가의 가르침을 받은  작품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얼마나 무모한 짓을, 가당치 않은 짓을, 감히, 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고 스스로 부끄러웠다.



  하 심란하여 홀로 산에 가기로 했다. 올해 처음으로  등산반바지를 꺼내 입었다. 누구나 보면 대뜸 운동했냐고 묻는 근육으로  단단한 굵고 튼실한 내 다리. 실제로 20대 초에 합기도와 태권도를 하기도 했다.

젊어서는 최대한 가리고 싶은 콤플렉스였는데 이제는 이 다리 덕분에 아직도 등산을 할 수 있는 것 같아  고마울 정도다.

마음이 심란하고 머릿속이 복잡할 때 몸을 힘들게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  그냥 힘들다 정도가 아니라 이제 그만...힘들어 죽을 것 같애...라는 신음이 나올 때까지 몰아부쳐야 한다.

쉬지도 않고 물도 마시지 않고 땀을 뚝뚝 떨어뜨리며 거친 숨소리를 내며 죽자고 올라갔다. 두세 번 쉬면서 한 시간 가까이 걸려 도착하던 쉼터를 40분 만에 도착했다.  슬기봉 지나 태을봉 가는 길의 마지막 난코스인 365개 계단을 두 번인가 세 번 잠깐 멈췄다가 끝까지 올라갔다. 난간에 기대서서 먼 곳을 조망하면서 다리를 쉬게 하는 시간을 주지 않았다. 다리는 돌덩이처럼 무거워지고 장작처럼 뻣뻣해지고 온몸은 홧홧하게 달아올라 불이 날 듯 뜨겁고 땀은 비 오듯 흘러내렸다. 


뭐가 문젠데? 뭐가 문제야? 별거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뭐... 뭐가 문제냐고... 나 이렇게 건강하잖아... 이 다리를 봐... 난 아직 어디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어..

이런 다리를 갖고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더 이상 뭐를 바라는 거지? 기대를... 욕망을... 조금만 낮춰봐... 아니 좀 많이 낮춰봐... 가능한 꿈을 꿔... 내가 먼저 편하고 즐거워야지... 나부터 말이야... 아들도 남편도 그다음이야... 그렇지? 그렇지?


489미터 태을봉 정상 밑 벤치에 오래 앉아 있었다. 하늘을 가린 커다란 나무가 슬렁슬렁 춤을 추면 바람이 설렁설렁 내게로 불어왔다. 아무리 더운 여름날에도 산속에는  늘 바람이 있었다. 그래서 올라오느라 힘들고 지친 몸은 금방 회복이 되었다.

야채김밥 한 줄을 손에 들고 며칠은 굶은 사람처럼 와구와구 먹었다. 그리고 얼음이 달그락거리는  냉커피는 천천히 음미하며 오래 마셨다.

하산길은 콧노래가 나올 만큼 가볍고 편안했다.  비록 내일이면  또다시 무겁고 심란해지더라도 그건 내일의 일. 난 오늘 이 시간 이 순간 이 느낌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전통시장에서 가지 호박 알배기 고추 상추 등 싸고 싱싱한 야채를 배낭에 넣어 온 장바구니 가득 샀다.

오늘 저녁은 집에 훈제오리고기가 있으니까 건강에 좋은 오리고기야채찜을 해야겠구나... 생각하면서 단톡을 보냈다.


맛있는 거 할 거니까 오늘은 빨리들 귀가하셩~~

매거진의 이전글 아들의 직장 상사 스트레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