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3주 전, 엄마가 내가 사는 미국 집으로 오셨다.
예정에 없는 방문이었다.
이유인즉슨, 작년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던 번아웃과 무기력, 우울감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 심해졌고 곁에 의지할 가족이나 친척도 없는 상황에서 정작 주변에 솔직하게 도움을 요청한 용기도 내지 못해 스스로를 점점 더 고립시키고 있었다.
미국에서 몇 번의 입퇴원을 반복하던 중, 급기야 J가 부모님에게 sos를 보냈다.
나에게는 좋을 수도 있고 안 좋을 수도 있는 사고 습관이 하나 있다.
바로 어떤 상황에서든 최악의 경우를 먼저 떠올린다는 것.
이런 사고방식이 예상치 못한 상황 앞에서도 당황하거나 실망하지 않도록 마음을 단단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반대로 그 때문에 더 겁을 먹고 선택 자체를 피할 때도 있다. (지금 보면 회피형 인간이 아닌가 싶다).
엄마가 미국에 오신다고 했을 때가 바로 그 후자의 경우였다.
‘지금 내 상태도 별로 안 좋은데 엄마랑 괜히 더 사이만 안 좋아지는 거 아니야?’
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작년에 아빠와 동생이 함께 미국에 왔을 때와는 달리, 이번엔 엄마 혼자였다. 그래서 더 잘 챙겨야 한다는 부담이 생겼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그럴 마음의 여유도, 에너지도 없었다.
(비행기표가 비싼 것도 한 몫했다).
그 불안과 걱정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오지 않는 편이 더 좋겠다고.
하지만 아빠는 이미 비행기표를 끊어두었고, 엄마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00아, 엄마 그냥 00한테 맛있는 밥 해주고 싶어서 가는 거야. 부담 갖지 마.”
그리고 엄마는 그 말을 정말 지켜냈다.
3주 내내, 엄마의 화려한 집밥을 거의 매일 먹었다.
꽃게탕, 갈비찜, 김밥, 두부유부초밥, 고등어무조림, 콩나물, 시금치나물 같은 밑반찬들까지.
엄마는 그것을 “푸드 페스티벌”이라고 부르셨다.
실제로도 그랬다.
어떤 미슐랭 레스토랑보다 엄마가 만들어준 밥이 훨씬 더 감칠맛 나고 든든했고, 그 한 끼 한 끼가 너무 소중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적당한 행복과 충만함.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시간이었다.
유학생활을 할 때는 내 코가 석자인 탓인지 가족 없이도 잘 버텼다. 가족이 곁에 없어도 외롭다고 느끼지 않았다. (물론 겨울방학에 시골 동네에서 알바만 하던 시절에는 가끔 외로움이 몰려오긴 했다.)
하지만 한국과는 조금 다른, 가족 중심의 문화 속에서 미국 생활이 길어지고, 특히 직장 생활을 시작하면서 진짜 말 그대로 가족의 소중함을 더 깊이 체감하게 되었다.
아마 물리적으로 더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만큼 소중하게 느끼는 걸 수도 있고,
지난 몇 년간 가족들 간의 사이가 돈독해져서일 수도 있다 (이게 제일 큰 부분을 차지하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20대가 되고 나서 이번에 처음으로 함께 맞이한 생일이어서 더 크게 느껴졌을 수도 있다.
원래 슬픈 영화를 봐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데 엄마를 공항에서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바로 집으로 안 가고 카페에 앉아 엄마에게 카톡으로 편지를 적는데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본 J는 귀엽다며 웃었다.
“뭐가 웃겨, 아내가 우는데 웃고 말이야”
칭얼대며 말하는 나에게 J는 다른 종류의 울음이어서 귀엽다고 대답했다.
슬픔 때문이 아니라, 아쉽지만 그만큼 더 소중하고 감사한 마음이 뒤섞여 나오는 눈물이라는 걸, J는 용케 알아봤던 모양이다.
그래,
뭐든 J처럼 조금 더 가볍게 봐야지.
나름 외국에서 오래 살며 단단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여전히 단단해져 가는 과정 중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