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7일 금요일,
매니저가 우리 팀에서 일하는 마지막 날이었다.
2024년 3월부터 현재 팀을 맡아 약 1년 6개월 동안 매니저 역할을 해온 그는, 2025년 11월부로 새로운 신설 팀을 이끌기 위해 기존 팀을 떠나게 되었다.
지금 회사에서 개발자로 일한 지난 4년 6개월 동안 총 4명의 매니저를 만났는데, 그중 이번 매니저가 단연 최고였다.
이전에 브런치에 ‘지금까지 만난 매니저의 네 가지 유형’이라는 글을 적었던 적이 있다. 이번에 팀을 떠나는 매니저는 그 네 유형 중 가장 이상적인 리더에 가까웠다.
VP(Vice President) 같은 임원진에게도 팀을 위해 강단 있게 목소리를 낼 줄 알면서, 중요한 프로젝트가 있을 때는 팀의 사기를 이끌어주고, 동시에 팀원들의 워라밸을 진심으로 존중하는 사람.
마지막 1:1 미팅에서 매니저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I know you are a good engineer” (네가 훌륭한 엔지니어라는 걸 알고 있어)
“Believe in yourself” (그러니 너 자신을 믿어도 돼)
개발자로 4년 넘게 일하고 그 기간 동안 한 번의 승진도 했지만, 여전히 ‘내가 개발자라는 타이틀에 걸맞은 사람일까?’라고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물어보곤 했다.
주변과 비교하며 스스로를 압박해 온 탓이었다.
남들은 회사에서 개발일을 하면서 사이드 프로젝트로 앱도 만드는 것 같던데, 나는 그저 내가 맡은 프로덕트 아키텍처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웠으니까.
그래서인지 매니저의 말이 더 깊게 와닿았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나누는 데는 따스함으로 바라보지만 일에 있어서만큼은 냉철한 매니저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마지막 1:1 미팅이어서 그날의 대화는 평소보다 훨씬 더 깊었다.
내가
“I’m a bit concerned that moving from my current position might impact my green card process.”
(지금 맡고 있는 자리에서 이동하면 영주권 절차에 영향을 줄까 조금 걱정된다)
라고 말했을 때,
매니저는 영주권은 대략 세 가지 외부적 요소의 영향을 받는데,
첫째. 국가 차원의 정책 변화
둘째. 노동시장과 회사의 재정적 안정성
셋째. 신청자의 고용 상태(해고처럼 본인이 통제할 수 없는 변수들)
이런 요소들은 어느 것도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팀 이동이야 회사 내부의 일이라 괜찮지만, 해고나 정책 변화로 인한 지연·취소 같은 일들은 나의 역량 밖이라고.
그러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모로코에서 태어난 프랑스인인 매니저는 프랑스에서 일하며 두 번이나 회사의 구조조정과 재정 문제로 해고를 겪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생계를 위해 자신의 회사를 차려 일하기도 했고, 또 다른 회사에서 오퍼를 받아 다시 커리어를 이어갔다. 그리고 결국 현재 회사에서 스폰을 받아 미국으로 아내와 함께 와, 영주권까지 취득했다.
프랑스인이기에 일반 중국·인도 신청자보다 영주권 프로세스가 빠른 편임에도, 코로나와 여러 사건들로 예상보다 훨씬 긴 기다림을 겪었다고도 했다.
그는 또한 처음 미국에 왔을 때는 부족한 영어 실력과 프랑스 억양을 고치려고 애썼지만, 어느 순간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덧붙였다. 중요한 건 억양이 아니라 ‘필요한 말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걸 깨달은 뒤로는, 억지로 자신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고.
그리고 나에게도 말했다.
굳이 환경에 나를 끼워 맞추려고 하지 말고, 내 길을 걸으면서, 나 자신을 믿으라고.
엔지니어로 시작해, 사라질 위기에 놓였던 두 팀을 이끄는 매니저가 되기까지의 그의 긴 여정은 그가 나에게 건네는 모든 말에 단단함과 자신감을 실어주었다.
또한, “일이 전부가 되지 말라”는 이야기도 다시 한번 강조했다.
매니저는 다양한 취미를 가진 사람이었다.
사진을 준전문가처럼 다뤄 가족의 기념일마다 직접 사진을 찍어주고, 여행에서 남긴 사진은 포토샵으로 보정해 집안 곳곳에 액자로 걸어두었다. 덕분에 하와이로 다이빙을 하러 가서 찍은 사진도 팀 슬랙(Slack) 채널에 종종 공유해주곤 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요리해 주는 것도 좋아해, 독학으로 프랑스 요리 자격증까지 땄다. 내가 와인 수업을 듣고 자격증을 준비한다는 이야기를 나눴을 때는, 와인을 따로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았음에도 (아마 프랑스인이기에) 레드와인과 화이트 와인, 스파클링 와인 등 각종 와인 종류에 따라 어울리는 음식을 한치의 망설임 없이도 나열하여 알려주는 면모를 보였다.
자신의 커리어를 소중히 여기면서도 가족과 취미, 그리고 일 외의 삶까지 놓치지 않는 사람.
그의 말에는 늘 진솔함과 자신감, 그리고 따뜻함이 담겨 있었다.
일과 관계의 균형을 잡는 일이 쉽지 않은데, 놀라울 만큼 균형감 있게 자신의 삶을 꾸려내는 사람이었다. 비록 재택으로 일해 한 번도 직접 얼굴을 마주한 적은 없지만, 이런 매니저 밑에서 일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 감사하게 느껴졌다.
이런 감사함은 비단 나만 느낀 감정이 아니었던 것 같다.
인도 팀을 이끄는 매니저가, 다른 팀으로 떠나는 우리 미국 팀 매니저를 위해 짧은 편지를 남기자며 글을 모았을 때, 많은 엔지니어들이 그동안의 노력에 대한 감사와 새로운 커리어 여정을 향한 응원의 메시지를 진솔하게 적어 보냈다.
그 모습을 보며 다시 한번 느꼈다.
조금 느리더라도 함께 걸어가는 길이, 남을 돌아보지 않고 혼자 빠르게 앞서가는 길보다 더 깊고 값질 수 있다는 것을.
이전 매니저들에게서는 쉽게 느낄 수 없었던 부분이라, 더 크게 마음에 와닿았다.
그래서일까.
어떤 길을 선택하든, 앞으로 어떤 도전을 맞이하든, 그분의 여정이 늘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길 진심으로 응원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