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이한 인생을 산 사람은 자기소개조차도 힘들다.
나는 대안학교 졸업생이다. 대학 비진학 청년이다. 남성 페미니스트이고, 노동·장애·아동·청소년 인권 관련 분야의 시민단체 활동가였다. 소규모 NGO 법인의 회계 담당자로 일한 경력이 있고, 나이는 만으로 스물일곱이다. 그리고 아직 군대를 가지 않은 병역미필이다.
불경기와 청년실업의 시대. 나는 이력서를 쓰고 있다. 여러 중소 사업체에서 회계 담당자로 5년 일했지만, 회계는 내 적성이 아니었다. 직업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한 참이었다. 청소년 시절 문학 소년이었던 나는 다시 글공부를 하기로 다짐하고 무작정 사이버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해서 공부를 하고 있다. 공부하면서 최소 생활비만 벌 수만 있다면 다행이다.
이력서를 넣었던 한 언론사에서 연락이 왔다.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소규모 인터넷 언론이었다. 근무 직원도 2~3명 되는 정말 작은 업체였다. 평일 오후 갑자기 전화가 왔다. 이력서를 보고 전화했다며 다짜고짜 고향이나 나이 같은 인적 사항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전화로 면접을 진행한다. 전화로 면접을 보다니, 여기는 붙어도 가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찰나, 내 정치색을 묻는다.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언론사니까 정치 성향을 물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신입 기자를 뽑는다길래 무작정 지원한 거였다. 기자도 글을 쓰는 직업이니까. 솔직하게 대답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아무래도 언론마다 정치적 성향이 있을 수밖에 없을 테니 솔직하게 대답하기로 했다.
"정치 성향이 어떻게 돼요?"
“아무래도 진보 성향입니다.”
이게 내 대답이었다.
“그럼, 민주당 쪽이겠네요?”
전화기 너머로 언론사 대표라는 사람이 되물었다. 나는 조금 당황했다. 민주당이 진보인가?
“이력서에서 보셨겠지만 노동 문제에 관심이 많아서 XX당에서 활동한 적이 있고, 나중엔 환경 문제에 관심이 생겨서 NN당원으로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당적이 따로 있지는 않고 선거가 있으면 정의당에 투표하는 편입니다.”
나는 사실 그대로 솔직하게 대답했다. 내 대답이 아마도 상대에게는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다. 사실 정치관이 어떻든 신문기자라는 일을 해보고 경험해 볼 수 있다면 내 정치 성향과 달라도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런 말을 할 기회조차 없었다. 그가 내 말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다른 주제로 말을 돌렸기 때문이다.
"이력서를 보니까 무슨 협회, 조합…
이런 데서만 일했던데 직장생활을 할 수 있겠어요?"
그는 내 사회생활의 자질을 의심했다.
“말씀하신 협회나 조합 모두 법인의 형태로 일반적인 회사랑 큰 차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내 이력은 시민들의 후원을 받아 공익 활동을 하는 NGO시민단체나 공공사업을 벌이는 협동조합이 대부분이었다. 회사의 공익 활동을 위한 국가지원금을 수령하여 집행하거나 국가, 지자체, 공공기관을 상대로 용역 계약을 체결하고 증빙하는 업무를 해 왔다. 이게 일반 사무실과 다를 게 있나. 하지만 그는 내 말을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직장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같은 추상적인 질문을 던져댔다. 질문자의 의도를 알 수 없으니 나는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다.
“대학은 왜 안 가셨죠?”
내 나이 스물여덟. 이제 사이버 대학의 국어국문학과 1학년이다. 사이버 대학도 대학이라지만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진학하는 ‘정상 코스’를 밟지 않은 게 문제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대학 비진학 청년으로 바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렇게 된 데에는 많은 맥락과 사정이 있지만, 나는 20대 내내 이 질문을 들어왔으므로 여기에 대한 가장 적절한 대답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제가 고등학생 때, 아버지께서 위암 3기로 수술을 받았습니다. 집안 사정이 어려워져서 저는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돈부터 벌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어른들을 대할 때, 특히 구직할 때, 나에게 왜 대학에 가지 않았냐고 물으면 아버지의 건강 문제와 가정경제의 어려움을 이유로 드는 것이 가장 적절했다. 대학을 가지 않겠다고 선택하기까지 내가 했던 많은 사유와 고민, 그리고 이 선택의 과정과 결과에 대해서 궁금해하는 사람은 없다. 아버지가 위암 수술을 받은 것도, 가정경제가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니까 이 대답이 거짓인 건 아니다. 하지만 진실도 아니다. 그 선택이 지금의 나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걸 듣고 싶어 하는 고용주는 없다. 이력서의 자기소개서에 쓸 수도 없는데 대학 비진학에 대한 사유를 설명하지 않고는 나를 설명할 수 없으므로 ‘자기소개’에 실패하고 만다. 하지만 구직하는 처지에 나를 제대로 소개하는 것이 중요한가? 내가 쓸모 있어 ‘보이도록’ 쓰는 것이 자기소개서다.
역시나 그는 대학을 가지 않은 점에 대해서 더 따져 묻지 않았다. 다음 질문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군대를 아직 안 가셨던데….”
올 게 왔다. 나는 병역 미필이다. 나이 스물여덟 먹고 아직도 군대를 가지 못했다. ‘안’ 간 게 아니라, 말 그대로 못 가고 있다. 성인이 되자마자 자취를 시작했고, 어쩌다 보니 직장생활을 시작하며 경제적 자립을 이뤘다. 영장이 날아온 적도 있는데 당장 살고 있는 자취방과 직장생활의 책무와 온갖 잡다한 신변 정리를 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조금만 정리되면 가야겠다고 이런저런 사유로 입대를 미루고 미루다가, 2020년쯤에 질병으로 인해 신체검사 재검에서 4급 판정을 받았다. 현역에서 사회복무요원이 된 것이다. 공익이 되었으니 이제 군대 문제를 해결하면 되겠다고 낙관하고 있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소집이 안 된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의 공공기관, 복지시설에서 필요한 사회복무요원의 수만큼 소집하는데 수요가 공급을 못 따라가는 중이었다. 3년 동안 소집이 안 된 채로 대기를 하면 자동으로 면제가 된다고는 하는데, 언제 국가의 부름으로 사라질지 모르는 사람을 뽑아줄 회사가 있을 리가 없다. 나는 그 3년 동안 무슨 일을 하면서 먹고살아야 할지 막막한 상황이다.
게다가 내가 신체검사에서 4급 판정을 받은 원인은 정신질환, 공황장애였다. ‘정공’, 정신질환을 이유로 공익이 된 사람을 부르는 경멸하는 명칭이다. 나는 자조적으로 말한다. 나는 국가도 거부하는 ‘정공’이다. ‘정공’은 T/O가 가장 많은 사회복지시설(요양원, 학교 등)에서 근무하지 못하게 되어 있고 소집 선발 우선순위에서도 불이익을 받는다. 그렇다면 내가 사회복무요원으로 근무할 수 있는 근무지는 관공서 같은 공공기관들뿐인데 흔히 좋은 보직이라고 여겨지는 이들 근무지는 들어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아 경쟁률이 높다. 정말로 나는 군대를 가고 싶어도 못 가는 상황에 부닥친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이대로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면 (어차피 소집 우선순위에서 밀리기 때문에) 3년 장기 대기 사유로 군 면제를 받을 확률도 높다는 말이다. 좋은 것 아니냐고 생각할 사람도 있겠지만 이제 다시 구직의 문제로 돌아가게 된다. 언제 국가의 부름으로 사라질지 모르는 사람을 뽑아줄 회사가 있을 리가 없다.
나는 전화기 너머 얼굴도 모르는 언론사 사장에게 내가 3년 동안 소집이 되지 않을 확률이 더 높다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설명했지만, 이미 내가 이걸 설명하고 있는 시점부터 면접관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는 틀린 일이었다. 그리고 사실 내가 3년 안에 소집이 정말로 될지 안 될지 나조차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까지가 평일 오후에 전화 통화로 이루어진 짧은 면접의 이야기였다. 특이한 인생을 산 사람은 자기소개조차 하기 힘들다. 평범한 한국 사회의 구성원에게 내 삶의 궤적은 굉장히 특이하게 보일 것이다. 으레 한국인이라면 그러하였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는 학창 시절, 대학 시절, 군대, 취업 준비와 직장생활… 모든 부분에서 나는 한국인의 예측을 빗겨 나가는 삶을 살았다. 말하자면 비표준의 인생이다.
내가 비표준의 인생을 살게 된 것의 계기는 시기가 가장 이른 대안학교의 영향이 제일 크겠지만, 모든 대안학교 졸업생이 나와 같은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은 아니다. 나와 같이 졸업한 동기 중에서는 알아서 공부해서 대학에 가고 각자의 길을 찾아 나선 친구들이 훨씬 많다. 유독 내가 더 심하게 비표준의 길을 자처해서 걸었다.
여기서 그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았기 때문에 만날 수 있었던 또 다른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 내가 목격한 비표준의 삶들. 그리고 우리 사회의 가장 어두운 곳에서 보았던 어떤 발버둥들. 먹고 사느라 미루고 미뤄놨던 그 기록의 글쓰기를 이제야 시작해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