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황도에 가까운 복숭아 동자의 이야기

루피시아 5233. 백도 다즐링

by 미듐레어

모모타로라는 일본 전래동화, 설화가 있는데 뭐 우리식으로 부르자면 복숭아동자 정도 되지 않을까? 오카야마는 복숭아가 특산품이기도 하면서 모모타로 설화의 고향이라고도 하는데 오카야마역 광장에 동상이 있을 정도. 그렇다 보니 작년 오카야마에 놀러 갔을 때 방문한 루피시아에 예상 가능하게도 모모관련된 지역한정 상품인 백도 다즐링이 있었고 고민의 여지없이 하나 구매해 왔다. 아이스티로 마시고 싶어서 넣어둔 게 벌써 일 년 전인데 꽤나 늦은 시음기가 되어버렸다. 한정 디자인 캔입으로 50g에 1018엔. 역시 50g만으로는 알기가 어렵지 않을까 싶어 올해 오사카 그랑마르쉐에서 50g 봉입 690엔으로 한 봉지 더 사 왔다. 상미기한은 제조 2년으로 넉넉한 편. 어쩌다 보니 올해의 마지막 본격 아이스티가 되었는데 한 번에 계속 달리는 게 아니라 생각날 때마다 한 번씩 마시게 되어서 꽤 길게 마신 것 같다. 어쨌든 이번 시즌의 마무리 아이스티, 시작.

묘하게 킹받는 일러스트 부착

지난번 포도우롱도 그렇고 이 동네 한정디자인 캔이 만듦새가 마무리가 영 아쉬운데 가운데 띠지가 살짝 뜬 상태에서 일러스트지가 붙은 건지 영 거슬리네. 매장에서 직접 붙이는 걸까. 떼잉. 캔을 열어보면 별지가 들어있진 않고 일반적인 라벨이 붙은 은박봉투가 들어있다.

오카야마 톡상노 아마이 하쿠토오데 다아지린 코우차오 카오리즈케. 후루우티이나 아지와이데스.
오카야마 특산의 달콤한 백도로 다즐링 홍차에 향을 더함. 과일처럼 상큼한 맛입니다.

백도 가향은 이미 모모시리즈가 많이 있는데 홍차, 센차, 우롱차 같은 레귤러를 포함해서 원래 가루이자와의 지역한정이던 백도 자스민까지 꽤나 많은 모모 시리즈가 있는 것. 과연 백도의 고장 오카야마의 한정판은 어떤 느낌일지가 궁금하다.

날이 흐려서 그런데 나름 푸릇함을 간직하고 있긴 한 다즐링

봉투를 열어 향을 맡아보면 의외로 은은하게 요구르트 같은 향이 난다. 호로요이같은 물에 희석된 듯 은은한 복숭아향이 있고 복숭아 사탕 같은 녹진한 달달함도 겪어본 거 같은데 이렇게 묘하게 크리미 한 거 같다는 느낌이 드는 복숭아향은 또 루피시아에선 처음인 것 같다. 그렇다고 또 완전 새롭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고 흔히 루피시아 봉투를 딱 열면 훅 하고 올라오는 휘발성의 향이 이번엔 반대방향으로 봉투 안으로 파고든다는 느낌인데 그 방향성 하나로 이렇게 다른 인상을 주는 것 같다. 건엽을 덜어내면 다즐링 잎과 함께 백도 껍질 같은 꽃잎이 들어있는데 순간 복사꽃이라고 생각했다가 자세히 보니 장미꽃잎이구나 하고 알아보았다. 뻔하게 속았지만 이런 게 루피시아 토핑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가만 생각해 보니 꽤나 가향에 의존하는 블랜딩인데 건엽의 향이 일반적인 모모 가향과는 같은 향료 다른 느낌으로 다르지 않았나 싶다.

모모우롱극품 금평당과 함께

찻잎 6g을 100도의 물 300ml에서 2.5분 우려내었다. 아마도 향에서 오는 착각인 것 같지만 약간의 산미가 느껴지고 연하고 부드러운 다즐링이 물처럼 느껴진다. 향미가 굉장히 인상이 옅으면서 그렇다고 녹아있는 성분이 적지 않은 뒷맛이다. 맛의 농도를 떠나 인상이 희미하다. 이건 물을 바꿔서 한번 테스트해볼까 싶긴 한데 다시 생각해 봐도 최근 마신 차들을 기준으로 유독 연한 느낌의 차라는 생각이 든다. 밍밍한 느낌이 많이 들어서 약간은 차 비린내, 물비린내가 난다고 해야 하나, 풋내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투차량이 부족할 때 종종 나는 그건데 그렇다고 차가 적지는 않았으니까 아무래도 차가 좀 싱겁다고 봐야겠다. 이건 작년구매 올해 구매 공통이었으니 내후년쯤 다시 한번 마셔봐야 배치 탓인지 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느낌은 냉침을 했을 때도 유지가 되는데 맛도 향도 연한 차가 물처럼 술술 넘어간다는 점에선 여름 냉침차로서는 나쁘지 않은 특징이라 하겠다. 다만 다즐링의 향이 코어가 좋은 다즐링이라기보단 부수적인 풍미의 일부만 느껴지는 점은 느긋하게 차를 즐기기엔 그다지 좋은 것 같지는 않다.

급랭에서 마셔보면 의외로 꽤나 녹진한 복숭아 향이 난다. 백도라기보단 황도의 몰캉 쫀득한 느낌에 더 가깝지 않나 싶은데 암튼 상큼한 느낌도 약간 있으면서 제법 녹진한 느낌도 들어서 의외였다. 기존의 모모가향과 동일한 가향제를 썼다 싶긴 한데 이렇게 황도 느낌이 나다니. 다즐링은 세컨플러시와 다른 어딘가에서 적당히 섞인 느낌인데 얼마 전 올렸던 머스캣 다즐링과 비슷하거나 조금 더 후기의 느낌이다. 급랭이 만족스러웠고 아이스티의 느낌이 강하다 보니 잠시 잊고 있었는데 온도를 좀 낮춰서도 마셔볼걸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 역시 내후년쯤 다른 배치로 한번 확인해 보는 것으로.

엽저로 봐서도 나쁘지 않은 다즐링 같은데

올해는 백도센차부터 시작해서 모모시리즈를 꽤 많이 마시는 느낌이다. 이 정도면 루피시아의 모모코어가 형성될 법도 한데 막상 모모코어가 형성되고 나니 그렇게 좋은 느낌은 아니다. 주변에서 종종 나를 오해하곤 하는데 내가 루피시아를 좋아하는 이유는 루피시아의 차가 세계 최강이어서 그런 게 아니고 합리적인 가격과 합리적인 패키지로 다양한 차를 마셔볼 수 있다는 점과 어디까지나 가격대비 훌륭하고 안정적인 차품 때문이다. 특히나 가향차 라인에서의 안정감은 오래전부터 차를 마셔온 사람들은 알겠으나 이 가격대로 이렇게 안정적인 가향차를 접할 수 있었던 게 루피시아가 생기던 무렵부터이기 때문에 더 소중하게 느끼는 부분도 있겠다. 모모 시리즈를 쭉 마시면서 다시 상기되는 사실은 이것이 궁극의 복숭아가향은 아니었지, 하는 부분이다. 분명 이보다 괜찮은 복숭아 가향들이 있었는데 단종되고 사라져 버려 이제는 찾을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지금 루피시아 모모보다 좋은 복숭아가향이 뭐가 있냐고 물어보면 딱히 할 말도 없는 게 사실. 로스트테크놀로지와 비교를 하는 게 어찌 보면 굉장히 불합리하긴 하지만 마시면 마실수록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끝내 아쉽다. 그래도 현시점 복숭아 가향을 추천하라고 한다면 여전히 유효한 추천이긴 하고 모모우롱처럼 너무 투명한쪽보단 좀 더 녹진한 걸 원한다면 또 추천할만하겠다. 황도에 가까웠던 꿀처럼 녹진한 복숭아, 모모다즐링, 끗.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바닷가를 바라보며 마시는 한잔의 여유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