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피시아 8293. 밤
작년 가을 루피시아 다카마스점에 방문했는데 시음차로 모미지기리와 쿠리를 주고 있었다. 그러니까 딱 밤이니 모미지가리니 타키비 같은 계절한정이 막 나왔을 시기 었는데 별생각 없이 타키비와 모미지가리만 하나씩 집어 오면서 밤은 다음에 마셔보자 싶은 생각으로 두고 왔었다. 집에 와서 타키비를 마셔보는데 뭔가 배치차이라고 하기엔 꽤 큰 차이가 있어서 알아봤더니 밤과 타키비가 작년부터 리뉴얼이 되었던 것. 알았을 땐 이미 타키비도 거의 다 마셔버린 상태여서 올해 리뉴얼된 버전의 시음기는 다시 써봐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벌써 한 해가 흘러 계절한정이 다시 나왔다. 카드값 결제 단위를 기다려서 자정이 지나자마자 결제를 했더니 다행히 추석 전에 집에 도착해서 긴 연휴를 인천 터미널에서 묵는 불상사는 없었다고 한다. 꽤나 오래 기다린 리뉴얼 쿠리의 시음기. 50g 봉입으로 840엔이고 상미기한은 1년. 리뉴얼 전에는 750엔이었는데 작년엔 800엔, 올해는 840엔으로 가격이 정말 쑥쑥 자라는구만.
상품번호가 8226에서 8293번으로 바뀌었고 라벨의 설명이 좀 더 상세해졌다. 좀 더 성의가 있어졌다고 해야 하나. 레시피는 변화가 없다.
호쿠호쿠 토 시타 와구리 오 오모와세루 아마이 카오리 토 료쿠차 노 호노카나 아마미 가 초와. 코코로 오치츠쿠 야사시이 후우미 가 히로가리마스.
포슬포슬한 일본밤을 떠올리게 하는 달콤한 향과 녹차의 은은한 감미가 조화. 마음을 안정시키는 부드러운 풍미가 퍼집니다.
이전 버전에서는 달달하니 크리미 한 게 약간은 라떼같은 느낌이 있었는데 지금의 설명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어떻게 바뀌었을지 기대가 된다.
봉투를 열어보면 밤향이 나긴 하는데 무슨 질소 같은 산화방지 가스 같은 향이 절여진 느낌이다. 자세히 맡아보면 분말라떼향 같은 게 나긴 하는데 뉘앙스가 너무 다르다. 쎄한 향이라고 해야 하나. 근래 열어본 루피시아 중에서 가장 당황스러운 향. 드라이마롱이 너무 구워지거나 뭔가 잘못된 느낌인데. 어쨌거나 건엽을 덜어내어 보니 평범한 일본 녹차에 큼직한 마른 밤이 들어있다. 건엽을 봐서는 딱히 뭐가 바뀐 건지 모르겠는 느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근데 아니 향이 이게 맞아?
티팟에 6g의 찻잎을 넣고 80도씨의 물 300ml를 부어 1.5분 우려낸다. 어쨌든 확실히 마론티의 향이라고 느껴지는 가향이 피어오르긴 하는데 뭔가 구웠다고 해야 하나 눌러붙은 향이다. 한 모금 마셔보니 확실히 가향이 너무 인공적으로 변해버려서 맛은 좀 없어졌다. 건엽에서 좋게 봐줘서 찐 밤을 구워낸 듯한 짙은 마롱향이 강렬하긴 한데 이걸 차로 우려내니까 설상가상으로 녹차와 부딪히면서 인공향이 화하게 느껴진다. 달고 부드러워야 하는데 오히려 녹차의 씁쓸한 향이 튀어 오르면서 맛자체는 부드러움에도 불구하고 이질감이 들어버린다. 가향탄내가 난다고 해야 하나. 그러다 보니 향에서는 달달함이 있는데 맛에서의 인공적 하이톤과 시큼함이 굉장한 충돌을 만들어낸다. 온도를 올려보면 이런 현상은 더 심해지는데 그렇다고 여기서 온도를 더 내리면 맛이 이도 저도 아니게 되어서 난감하다. 다 마시고 든 생각인데 냉침이라도 한번 해볼걸 그랬나 싶다. 수색만큼은 형광빛인가 싶을 정도로 밝고 노란게 예쁘긴 하다.
같은 마롱티 라인인 트릭오어티와 함께 마셨어서 만족도의 차이가 훨씬 심했는지도 모르겠다. 작년에 비해 유독 달고 짙었던 트릭오어티의 마롱가향을 생각해 보면 어쩌면 이번 쿠리의 경우엔 마롱조절이 잘못된 버전일지도 모르겠다. 실수가 아니고서야 리뉴얼 버전이 이렇게 안 좋아질 수 있는 건가. 실수라고 해도 근데 이 정도면 퀄리티 컨트롤에 좀 문제가 있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 이 정도의 실망감은 정말 오랜만이다. 뭔가 이상해 이상해 하면서 한 봉지를 다 털어먹어버린 뒤다. 어쩐지 오기가 생겨서 내년에 다시 한번 도전해보지 않을까 싶은 리뉴얼 밤, 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