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피시아 1747. 나호라비 퀄리티 2025-OR687
가을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아쌈 퀄리티 시즌이 왔다. 여름에 딴 아쌈이 공정을 거쳐서 유통되기 시작하는 게 9월 무렵이고 그러니까 10월부터가 본격적인 시즌이라고 보면 되겠다. 이때 말하는 퀄리티는 제철 아쌈이라는 의미의 퀄리티인데 종종 등급 대신에 표기를 퀄리티라고 하는 경우도 있어서 항상 이 부분이 헷갈리지만 아무튼 좋다는 얘기. 올해 제철 아쌈으로 루피시아에서는 나호라비, 데주, 볼파트라 세 다원의 차가 나왔는데 셋 중에 가장 유명한 다원이자 작년에도 퀄리티를 마셨었던 나호라비부터 시작해 본다. 작년 나호라비가 앞에 골든팁스라고 붙기도 했고 배치번호도 439번으로 꽤나 앞번호였는데 올해는 어째 687이라는 꽤 높은 번호의 배치를 가져왔다. 사연은 올해 모든 차농분들이 걱정했던 바로 그 기후위기. 올해 아쌈 지역은 가뭄과 몬순성 폭우가 오락가락하는 바람에 생산성 감소와 수확 일정에도 차질이 있었기 때문에 이래저래 작황이 좋지가 않았다고 한다. 그 와중에도 아무튼 FTGFOP1 등급을 가지고 왔으니 아무튼 믿고 마셔보는 걸로. 30g 봉입으로 1600엔의 가격이고 상미기한은 제조 2년. 작년도 30g에 1800엔의 가격이었던걸 생각해 보면 아무튼 작년에 비해서는 최고 등급은 사냥 실패라고 봐야 하려나. 골든팁스가 아니어서 아쉬운 점은 그러려니 하고 일단 마셔보기로.
제철 아쌈을 맞이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충분히 기분이 좋다. 아쌈 전용 라벨을 확인해 보면 구매할 때 확인했던 내용들이 간략하게 타이틀로 적혀있다.
하나야카나 카오리 토 나메라카나 노미쿠치 가, 조히나 인쇼오 오 아타에마스. 키메 오 후쿠무 코우키나 아지와이 노 앗사무 나츠즈미 코우챠 데스.
화려한 향과 부드러운 마시는 감촉이 고급스러운 인상을 줍니다. 금아가 포함된 고귀한 맛의 아쌈 여름 수확 홍차입니다.
금아, 그러니까 골든팁이 아무튼 포함이 되어있다고 한다. 어느 정도 포함이 되어야 골든팁스가 붙는 건지 엄격한 기준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올해 농사가 좋지 않았다고 하니 이만해도 감사히 마셔보겠습니다. 나호라비 정도면 믿고 마셔도 좋지 않겠냐고.
봉투를 열어보면 아쌈 특유의... 어라? 뭔가 아쌈이라고 하기엔 조금은 시원한 향이 많이 난다. 이 기운은 흡사 실론의 느낌인데. 어찌 보면 봉투향인가 싶을 정도로 건엽향이 좀 흐리멍텅하다. 쌉쌀하다거나 맵다거나 하는 종류의 그런 향이 아니라 서늘하고 금속성 같은 향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이게 뭐지 싶은 향이 좀 섞여있다. 건엽을 덜어내어 보면 그래도 꽤나 노란 골든팁들이 많이 섞여있는데 뽀송한 솜털느낌은 아니고 어딘가 좀 마른 느낌이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상급의 건엽인건 얼핏 봐도 알겠다.
뜨끈하게 데워진 다구에 6g의 찻잎을 넣고 끓는 물 300ml를 부어 2.5분 우려 준다. 건엽에서 희미하던 향이 우리 고나니 간장향이 훅 난다. 고구마 껍질향이 증기 형태로 코에 오면 간장스럽게 느껴지는 게 매번 아쌈을 마실 때마다 재밌다. 한 모금 마셔보면 꽤 진하게 우렸는데도 물질감이나 목 넘김이 부드럽고 실키하다. 향이 고구마스러우니 당연히 몰티 하겠지 생각하는데 사실 그 둘이 직접적으로 연관은 아닌 데다가 여기서 느껴지는 몰티함은 그런 인상을 훨씬 뛰어넘는 몰티 함이다. 몰티 하다 못해 씁쓸하다고 느낄 사람도 있을 것 같은데. 급기야 300ml에 4g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연하게 마시는 것도 풍미가 전혀 밀리지 않았다. 제철 아쌈만의 풍성한 맛이 향으로 보나 은은하게 도는 단맛 내지는 회감으로 보나 꽤 일품이다. 앞서 말한 대로 몰티함이 진하긴 한데 볼드하단 느낌보단 꽤 부드러운 느낌이라 개인적으론 밀크보단 스트레이트 쪽이 더 어울리는듯하단 개인적인 의견이다. 제철 아쌈이라면 의례 밀크티가 어울리겠거니 하는데 이번엔 좀 밍숭하고 미끌하단 느낌이었다. 적게 구매해서 밀크티를 많이 시도하지 못해 좀 애매하게 말할 수밖에 없긴 하다.
그러고 보면 작년에도 나호라비의 부드러움에 감탄했던 것 같은데 그런 느낌으로는 올해도 마찬가지구나 싶다. 다만 작년만큼 우유를 더해서 마시기엔 어딘가 살짝 부족한 느낌이랄까. 사실 아직 시음기는 올리지 않았지만 본격 퀄리티 시즌이 되기도 전에 마셨던 하무티와 찰드워가 워낙 좋았어서 뭔가 아쉽다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된다. 올해는 그런 약간의 아쉬움이 남긴 하지만 나호라비는 그래도 거의 매년 안정적인 공급이 있는 것 같아서 안심하고 내년을 기다려보자는 마음이 된다. 내년엔 좀 더 건강한 나호라비를 만날 수 있기를. 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