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은 감독
‘건물은 사라져도 길은 남는다 길은 역사다’.
이 문장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영화 말하는 건축가의 시작이다. 철학적인 메시지 때문인지 영화는 뭔가 집중력이 필요하다. 곧이어 건축 전문종사자들의 인터뷰가 시작된다. 그들은 건축가가 하는 일이 무엇인가에 대한 화두를 던진다. 그 사람이 지은 건물을 보면서 내가 영향력을 받는다는 다소 심도 깊은 이야기, 건물 안에 솟아난 나무를 잘라 내지 않고 나무도 하나의 건축물로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이야기한다, 언덕이 가지는 무한한 잠재력도 흥미롭다. 그들은 건축가가 아니라 하나의 예술적 장르에 대해 말하는 것 같다. 이 영화 뭔가 독특하고 기발한데 있다. 나무도, 언덕도 다 자연물에 대한 배려와 예의를 가진다. 그들의 예술적시선이 마음에 든다.
영화의 전반적인 구조는 이 시대를 살고 간 한 건축가 정기용의 기획전을 시작하고 마무리하는 시점으로 귀결된다. 건축가의 목소리는 그의 흰 머리카락만큼이나 거칠고 쉰 목소리를 가졌다. 그래서 그는 항상 소형 마이크로 이야기를 한다. 건축인은 개발인의 하수인으로 실종되었다고 세상을 개탄한다. 경제적인 마인드로 건축을 볼 것이 아니라 문화적 재테크로 옮겨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건축은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소통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의 전시회는 어느 미술 전시회보다 독특한것을 보여주는 “감응”이라는 건축 전시회로 탄생한다. 건축전시회라니,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시회 안에는 사실 유품이나 다를 것이 없는 그가 즐겨보는 책이나 분신과도 같은 건축 노트나 “나무를 찾는 소녀”의 조형물, “해수욕을 하는 나무” 같은 초라한 나뭇가지다.
우리는 이 영화 한편으로 3월에 작고한 어느 결이 고운 건축가의 삶의 궤적을 더듬어가는 여행길에 오르게 된다. 그러면서 가슴을 툭 치는 무엇인가에 뜨끔해진다. 전시물을 들여다보면 그가 얼마나 인간과 건축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지 우리는 쉽게 눈치 챈다. 그는 소통하고 열린 건축을 소망했다. 그 건축 안의 배려는 철저하게 인간중심이다. 그가 완성한 여러 건축 물 중에 <제주 기적의 도서관><서귀포, 정읍도서관>에 비친 햇살은 마치 꿈을 꾸게 하는 장소인 듯 느끼게 된다. 무주 공설운동장 설계에서의 설명은 더 기가 막힌다. 운동장에 비치된 스탠드의 의자 지붕에 걸린 등꽃은 5월 첫째 주에 만개되는 시점에 맞춰 개장한다는 깊은 의미가 담겨있다. 안성 면사무소 안에 들어간 목욕탕은 사람들 삶을 보듬어주고 쓸 사람의 용도에 맞춘 따뜻한 정서가 포함되어 있다. 외형적인 구조물보다 내면적인 이야기에 더 귀를 기울이고 대상의 진심을 담는 의지는 영화 전반 곳곳에 녹아있다.
이 영화는 문화 다큐멘타리다. 나는 이 날 것의 생생한 목소리가 좋다. 영화는 건축과 마주하는 직접화법이기도 하고, 아니면 어느 건축가의 담론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영화 한편 엿보기로 우리는 건축에 대한 새로운 사실에 다가가게 된다. 건축이 영화에 들어옴으로써 건축은, 건축가는 다시 새로운 옷을 입게 된다. 건축에 대해 별다른 지식이 없어도 영화속으로 들어온 건축은 거대한 철학과 담론을 걷어내고 따뜻한 인간본성의 예술작품으로서의 힘을 가지게 된다. 이 영화의 주된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말하는 건축가>의 감독은 정재은 감독이다. <고양이를 부탁해>로 부산국제영화제 넷팩상, MBC영화대상 신인감독상 등을 수상한 감독의 첫 장편이 이 영화다.
감독이 탐구했던 인물 정기용은 1945년 해방둥이로 태어나서 올해 3월에 생을 마감했다. 미술전공에다 프랑스에서 건축을 시작했다. 지난2005년 병원 프로젝트 진행 중, 대장암을 선고받고 아픈 와중에 감응, 정기용 건축, 풍토 풍경이라는 대화라는 개인전을 열게 된다. 그가 건축으로 소통하고자 했던 개인의 열망이 이 영화 한편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생전에 그는 건물을 설계하는 사람이 아니라 삶을 설계한 사람이었다. 영화 속에서 조형을 주목하고 그곳의 공기를 불러내어 반복적으로 그 공간을 응시하게 만드는 정기용의 매력을 이 영화에서 발견한다.
다큐는 극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하다. 실존인물들의 생생한 증언에 우리는 깊은 울림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진심의 바닥을 보게 된다. 그러면서 정기용 건축가에게 주목 하게 된다.
“감응”은 대화와 소통방식의 건축이다. 그리고 예술이란 자리로 굳건히 버팀목을 한건 정기용 창작자의 귀한 결과물 탓이다. 그가 치열하게 고민하고 생에 화두로 삼았던 이제 처음이자 마지막인 건축전시회에 그대들을 초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