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보이 12725(영화)김지곤 감독
카메라가 오래된 활주로를 다급하게 쫒는다. 활주로는 세월의 더께가 쌓여 땅이 패여있고, 그사이로 잡초들이 비집고 자리를 잡았다. 그 끝을 달리다 보면 티니언 북쪽 해안에 최초 일본군이 만든 ‘우지곶’ 비행장의 흉물스러운 모습이 드러난다. 유리관 속에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사용되었던 원자폭탄 ‘리틀보이와 팻맨’의 실체가 보인다. 1945년 8월 6일 미군은 이 비행장에 리틀보이를 탑재하고 히로시마로 향해 돌진했다. 폭탄은 강한 폭발음을 내며 증발했고 고열의 불덩이가 퍼져나갔다. 그 결과 리틀보이는 히로시마 주민 7만 명과 강제징용으로 끌려간 한국인에게 잊을 수도 없는 끔찍한 상처를 주었다. 끊으래야 끊을 수도 없는 대물림의 역사 그 비극의 역사는 그렇게 출발한다.
김지곤 감독의 <리틀보이 12725>는 제목만 언뜻 보면 원자폭탄을 뜻하는 기호로 읽힌다. 그런데 이 제목엔 반전이 숨어있다. 12725안에는 원폭 2세 김형률의 35년 생의 시간이 웅크리고 있다. 김형률은 최초로 한국에서 자신이 원폭 피해자를 밝힌 사람이다. 이 영화는 한 청년이 처절하게 원폭을 향해 대항했던 삶과 희망의 기록이다. 감독의 섬세한 연출과 시적인 이미지로 가득한 이 영화는 흔히 보는 기록영화의 전형을 깨고 있다.
카메라는 주인이 없는 김형률의 방을 훑는다. 깡마른 김형률의 사진이 아직도 벽에 걸려있고, 주인 없는 책상이 덩그러니 놓여있다. 그의 낡은 수첩엔 그가 죽기 전 2005년의 기록이 마지막이다. 사인은 희귀성 난치질환인 선천성 면역 글로불린 결핍증이었다. 그는 엄청한 기록광이었다. 야학에서 공부하면서 시를 쓰고, 사랑에 대한 생각도 매우 구체적이며 어학에도 관심이 많아 보였다. 영화는 원폭 2세로서 삶에 대해 카메라를 조망한다. 김형률을 쫓아가는 메모와 수첩 하나하나에 카메라가 멎는다. 마치 그의 목소리라도 하나 더 담으려는 감독의 의지가 보인다. 그의 방에는 시적인 이미지들이 출렁거린다. 거꾸로 가는 시계도 있고, 창문에 비치는 불꽃축제의 불꽃들이 어지럽게 날아다닌다. 히로시마의 강에 띄워진 작은 추모등이며 가이드가 강을 바라보며 설명하고 있는 금속성 마이크소리, 폭포로 내지르는 물줄기가 터지는 소리, 그런 소리와 영상들이 왕왕 거리며 화면 가득 메운다. 귀를 때리는 소리는 피폭된 사람들의 절규처럼 반복적이고 소름 돋는다. 다큐멘터리에서 영상과 소리만으로 진솔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면 그것만큼 선명한 표현양식은 없을 것이다. 엔딩 크레디트에는 김형률 어머니의 영혼을 위로하는 금강경이 가슴 절절하게 느껴진다. 그 소리만으로 이 영화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그의 어머니는 히로시마에서 6살에 피폭된 후 고향 합천에서 결혼해서 김형률을 낳았다. 형제분들도 있었으나 막내아들이었던 김형률에게만 모진 피폭의 상흔이 남았다. 그의 폐는 이미 70% 망가졌고 폐렴과 감기에 자주 시달렸다. 이런 몸으로 그는 혼자 외로운 투쟁을 시작한다. 자신의 병이 단순히 개인의 아픔이 아닌 전쟁과 제국주의의 산물임을 역설하고 핵의 야만을 고발했으며, 동시에 원폭 2세 환우들이 인간답게 살아갈 권리를 주장한다. 그의 집요하고도 끈질긴 질문으로 국가인권위원회는 국가기관 최초로 원폭 1세와 2세의 실태조사결과를 발표했고, 이어 ‘한국인 원자폭탄피해자 진상규명 및 지원 등을 위한 특별법안’ 청원서를 국회에 제출하고 토론회와 일본 도쿄의 심포지엄에 가서 실상을 알리는 계기가 된다. 그가 없는 지금 한국의 히로시마라고 일컫는 합천에 비로소 합천 원폭 자료관이 서게 되는 결과물을 낳았다. 35년의 짧은 생을 살다 간 김형률의 기록은 그동안 숨고 살았던 한 많은 환우들의 희망이 되었다. 그들은 함께 울었고, 위로받았다.
이 시대에 영화가 할 일이 참 많다는 생각을 또 한 번 가져본다. 이 영화는 절망과 상처의 기록이기보다 김형률의 저서 제목처럼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희망을 말하고 있다. 그는 떠났지만 원폭 2세 피해자들의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를 외치고 있다. 원폭 피해자의 고통은 한 세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유전자를 통해 고스란히 재생된다. 누가 그들의 삶이 계속될 수 있게 도와줄 수 있을까? 그리고 이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는 있을까? 답은 바꾸진 못할 것이다 다만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리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그들의 시선에 눈 맞추고 영화를 만들어 준 김지곤 감독님께 감사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