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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의식의 흐름 Feb 02. 2024

엄마와 딸 (2)

엄마와 딸 가장 멀고도 가까운 그 이름에 대해서..

나의 기숙사 학교에 날아든 편지가 나는 꽤나 반가웠다. 누굴까? 누가 나에게 편지를 보냈을까? 무기력한 삶에 오랜만에 느껴보는 약간의 설렘을 안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편지를 뜯어보았다.

어릴 적부터 내가 좋아했던 막내고모에게서 온 편지였다. 막내고모는 초등교사였는데 가난한 시골 농부이신 할아버지의 막내딸로 태어나 자연의 아름다운 정서와 가족의 이야기를 감동적인 글로 써내시는 등단까지 한 작가였다. 나는 그런 막내고모가 좋았고 어릴 때부터 선망의 대상이었다. 고모는 나에게 친절했고 이따금 고모 같은 아름다운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다.

내 아픈 상황을 위로해 주려고 고모가 편지를 쓰셨나 하고 잔뜩 기대하며 편지를  읽어 내려가던 내 손은 미세하게 바르르 떨려왔다. 아름다운 글로 어린 내 마음을 감동시켰던 고모의 글이 이렇게 양날의 칼처럼 아직 어린 조카에게 담지 못할 저주와 악담을 쏟아내는 글로 바뀔 수 있구나... 얼마나 나와 엄마에 대한 원망으로 악에 받쳐서 쓴 글인지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아빠는 도대체 뭐라고 이야기했길래... 적반하장...

내가 왜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지? 아마 나는 친가에서 엄마의 거울 같은 존재였으리라.. 그날의 기억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날아든 고모의 편지는 내 마음에 비수가 되었고, 아빠는 도대체 자기 식구들에게 얼마나 철저하게 자기 합리화를 해놓았고 애꿎은 딸을 공공의 적으로 만들어 화살을 겨누게 세팅해 두었을까?라는 생각과 함께 아빠에 대한 원망이 더욱 커져만 갔다.

 자신의 오빠와 20년을 살아 온 올케언니라는 사람을 아무리 몰라도 저렇게 모를까? 오빠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과 삐뚤어진 '팔은 안으로 굽는다' 식의 표본을 보여주는 고모의 글에서 더 깊게는 인간의 철저한 양면성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그 편지를 그 자리에서 바로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고모에게 있었던 애정과 동경까지도 함께 모두... 17살 그때 나는 고모의 편지를 통해 글이라는 것은 사람의 마음에 감동과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는 영혼을 살리는 도구가 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너무도 날카로워서 칼처럼 상대를 찌르고 상처 입히며 한 영혼을 파괴하는 도구로도 사용될 수 있구나 하는 것을 처음 깊이 깨달았던 것 같다. 엄마에게 하고 싶은 악담을 만만한 어린 나에게 퍼부었던 그들이 너무 잔인하고 무자비하게 느껴졌다.


아빠는 정말 선포한 대로 학비를 내주지 않았고 학생부에 끌려가 담임선생님과 수차례 상담을 해야 했다.

"아버지가 학비를 안 보내 주시겠다고 하시네.. 아버지 참 정말 너무하신 것 같다. 선생님도 참 난감하다."

반복되는 어이없는 상황에 선생님은 내가 짠하게 느껴지시면서도 한편으로는 신경 쓰이고 곤란하신 상황에 짜증이 나신 듯했다. 나는 외딴섬에 갇혀서 아무 곳에도 갈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그 시절은 이혼이 지금과 같이는 흔하지 않았던 때라 친구들은 수군거렸고 소문은 삽시간에 전교에 퍼졌다.

그래도 나는 그런 것은 괜찮았다. 억지로 밝은척하며 답답하고 소망 없는 고등학교 시절을 꾸역꾸역 잘 견뎌내 가까스로 마무리하고 드디어 스무 살이 되었다.

스무 살이 된 나는 엄마와 한 집에 살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엄마와의 트러블이 시작되었다.

내가 정말 아픈 것은 엄마와의 관계였다. 나와 엄마는 미혼인 막내삼촌이 사는 허름한 다가구 전셋집으로 들어갔다. 보일러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바닥은 냉골인 데다 어두컴컴한 집이었는데 나는 그곳에서의 기억이 정말 차갑고 아프다.

엄마는 아빠와의 이혼과 그 절차가운데서 심신이 많이 지쳐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엄마도 가정주부로 살다 이런 처지가 되었으니 앞으로 먹고살 궁리도 해야 하고 딸까지 본인에게 왔으니 막막했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성적이 밑바닥으로 떨어진 나에게 꾸역꾸역 4년제를 가느니 2년제 대학에 가서 빨리 졸업하고 취업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고,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아니 대학 자체를 안 가면 안 되겠냐고 했지만 여자라도  전문대는 나와야 한다는 엄마의 말에 그러기로 하고 학원을 고르듯 아무런 의욕도 깊은 고민도 없이 친구의 전화 한 통으로 같은 학교에 원서를 썼다.

나는 엄마에게 재산 분할로 받은 아파트는 대출금이 남았으니 마트 캐셔로 라도 일을 해보면 어떻겠냐고 건의했지만 철없는 어린 딸의 이야기라 그런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같이 빵집이나 커피숍을 해보자고 했지만 엄마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바깥일을 안 해본 엄마가 갑자기 그런 일을 시작하는 게 두려운가 보다 하고 더 이상 부딪히고 싶지 않아 나는 나대로 엄마는 엄마대로 하루하루 지냈다. 서로 예민한 탓인지 대화가 되기보다는 다툼으로 자꾸 번졌기 때문에 언제나 소모적일 뿐이었다. 아빠라는 지옥을 벗어나 엄마에게 오면 천국일 줄 알았지만 이곳은 이름이 다른 지옥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를 다녀오다 집 근처에서 내가 처음 보는 누군가와 심각하게 대화중인 엄마를 보았다.

누구지? 어린 내 눈에 분명히 사기꾼 같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엄마에게 물어보니 엄마가 앞으로 식당을 차릴 생각인데 그걸 도와주시는 분이라고 했다. 자꾸 찝찝한 마음이 들었지만 더 캐묻지는 않았다.

서로 예민한 나와 엄마는 자주 부딪혔고 그럴 때마다 나는 이곳의 생활을 빨리 정리하고 새로운 곳으로 떠나고 싶어 했다. 시간이 흘러 드디어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결심한 듯 학교를 휴학을 하고 친구들이 있는 서울로 향했다.

서울에서 가까스로 취직해 직장생활을 하던 중 엄마와의 통화에서 엄마는 갑자기 우리가 살던 도시가 아닌 타지로 식당을 차리러 갈 거라고 했다. 한 번도 살면서 가본 적도 없는 그곳에 가서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식당을 하겠다고? 걱정이 앞섰다. 좀 아닌 것 같다고 이야기했지만  내 의견은 이미 모든 걸 결정한 듯이 말하는 엄마에게 거의 설득력이 없었다. 엄마와 다투고 싶지 않아 그 후 더 이상 말 하지 않았고 그 후로 몇 해 뒤 나는 지금의 남편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

결국 엄마는 그 후로 몇 년을 그곳에 가서 고생고생 하다가 모두 손해를 보았고 가게를 정리하고 나오며 가게를 권유한 그 사람에게 사기까지 당하여 빚만 잔뜩 지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엄마가 그렇게 초라하고 행색이 남루한 것은 살다 살다 처음 보았다. 엄마 참 예뻤었는데... 엄마의 인생은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듯했다.

내가 아빠와 친가에 역적이 되어가면서, 남한테도 안들을 별의별 욕을 다 들어가면서 받게 해 준 돈인데... 도대체 그렇게 허무하게 날릴 수 있냐고... 20대인 내가 보아도 딱 사기꾼 같았는데 왜 그렇게 사람 보는 눈이 없냐고, 음식장사는 아무나 하냐고.. 그냥 월급 받을 수 있는 작은 일만 했어도 빚은 안 지었을 텐데...

너무 어리석다고 엄마에게 소리치고 싶었지만 이미 모든 걸 다 잃고 초라해진 엄마가 같은 여자로서 너무 불쌍했고... 이미 아버지의 외도를 안 순간부터 벼랑 끝으로 고꾸라졌을 엄마의 그 마지막 자존심만은 지켜주고 싶어 말했다.


"엄마, 엄마가 어떤 상황이라도 나는 엄마 마음 이해하고 우리에게 엄마는 소중한 사람이야."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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