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똑또 May 29. 2024

슬프지 않았던 날에

며칠 전에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언니에게서 혹시 모르니 준비를 하라는 카톡을 받은지 두 시간이 채 안 됐을 때였다. 언니로부터 전화가 왔고 언니는 우느라 말도 제대로 못했다. 우리 자매는 서로가 울면 같이 우는 병에 걸린지 꽤 오래됐는데, 이번에도 역시나 내 코가 덩달아 시큰해졌지만 나는  애써 참으며 의연하게 너스레를 떨어보였다. '언니, 울 일도 아닌데 왜 울고 그래~ 괜찮아!' 사실 애써 참았다기 보다는, 나는 별로 슬프지가 않았다. 할머니를 못 본지는 10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고 할머니와 그렇게 애틋한 추억도 없었다.


엄마는 종종 할머니가 당신을 얼마나 차별하며 키웠는지 이야기하곤 했다. 3남 1녀 중 셋째였던 엄마는 할머니에게서 사랑을 받지 못하고 하고 싶은 것도 제대로 해보지 못한 서러움이 남아있어, 나와 언니에게는 엄마와 같은 서러움을 겪지 않게 하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말했다. 엄마에게 얼마나 많은 서러움이 남아 있었는지는 할머니가 치매에 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잠시 우리 집에 모시게 되었을 때 알게 되었다. 할머니는 자꾸만 엄마에게 그리고 언니와 나에게 누구시냐고 물어보았다. 아무도 없는 낮에는 집 밖으로 나가 경찰들과 함께 집에 돌아오기도 했다. 할머니가 영영 없어질 뻔한 그 날, 엄마는 삼촌들에게 전화해 할머니를 모실 수 없다고 얘기했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어릴 때에는 오빠들때문에 차별을 받으며 서럽게 자랐는데 할머니가 아프고 나니 왜 힘든 일을 자신이 도맡아야 하냐는 이야기였다. 엄마의 딸인 나는 엄마의 이야기를 들으며 세 명의 삼촌들이 다 싫었고 왜 엄마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지 아픈 할머니를 조금 원망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와 삼촌들은 할머니를 요양병원에 모셨다. 엄마는 종종 삼촌들로부터 할머니의 소식을 들었지만 병원에는 잘 가보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니까 애틋한 추억은커녕 나에게 할머니에 관한 것들이 남아 있는 것은 엄마에게서 공유받은 서러움과 원망같은 안 좋은 감정들 뿐이었다.


그렇다고 속이 시원하다, 후련하다 이런 종류의 감정은 없었다. 나는 그냥 일어나게 될 일이 일어났구나 하는 마음이었고 삼촌들도 엄마도 어엿한 분들이시니 좋은 곳으로 모시기에도 문제가 없겠거니 하는 마음이었다. 다음 날 아주 이른 새벽에 출근을 했어야 하는데, 장례식에 가야하기 때문에 그보다 더 늦게 나가도 되는구나 하는 마음이 들어 기쁜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나는 할머니의 죽음이 호상이라고 생각했다. 요양병원에서 할머니가 어떻게 지내셨는지는 알지도 못하지만 삼촌들과 엄마, 외숙모 그리고 아빠까지 마지막 순간을 지킬 수 있을만큼 정돈된 과정이었으니 그 어떤 마지막보다 괜찮은 것 아닌가 싶은 마음이었다. 할머니의 마음은 알 수 없는 것이지만 말이다.


연락을 받고 다음 날 언니와 나는 점심을 챙겨 먹고 오라는 아빠의 말에 정오가 지나 느즈막히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만난 친척 동생들은 아기 때에 얼굴을 그대로 간직한 채 몸만 큰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귀엽고 반가운 마음이 들었고 서른이 넘은 내가 이 아이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줘야 할까 이상한 책임감이 생기기도 했다. 이 쓸모없는 책임감이 꼰대를 만드는거였구나 하는 것을 깨닫기도 했다. 우리보다 먼저 장례식장에 찾은 언니의 친구들을 보러 가 자리에 앉아 인사를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척한 모습을 한 셋째 삼촌이 보였다. 나는 셋째 삼촌을 아주 아주 싫어했는데 수척해진 모습을 보니 안쓰러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공손하게 인사를 드렸다. 삼촌은 내 인사를 받았는지 어쨌는지 다른 애들은 새벽부터 나와서 일을 하고 있으니 너도 가서 도우라고 얘기했다. 방금 전 깊게 숙였던 내 머리와 허리가 아까워지던 참이었다.


나는 보란듯이 일을 했다. 새벽부터 나와 있었다는 여자 친척동생들이 불쌍했다. 남자 애들은 밖에서 멀뚱 멀뚱 서서 신발정리를 하거나 의자에 앉아 조의금을 받고 주차권을 나눠주는 일을 했다. 여자 애들은 앉아 있을 시간도 없이 이리 불려다니고 저리 불려다니는 중이었다. 나는 귀엽고 반가웠던 마음은 다 잊은 채로 남자 애들을 세워두고 왜 멀뚱하게 서있기만 하냐고 채근을 하며 듣기 싫은 소리를 해댔다. 여자 아이들에겐 앉아서 좀 쉬라고 말했지만 여자 아이들은 좀처럼 쉬지 않았다. 상조 회사 아주머니들은 호호 웃으시며 다들 너무 잘 도와주셔서 편하다고 말했다. 여자 애들은 도대체 언제 어디서 일을 배운 것인지 말 그대로 척척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 애들에 비해 남자 애들은 아직 사춘기 소년들 같았다. 손님이 오셔서 본인들 아버지인 삼촌을 모시고 오라고 하면,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고 쭈뼛거리며 삼촌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게 다였다. 우리끼리 모여 잠깐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묻는 말에 대답을 딱 못하고 이상한 농담을 던지며 킬킬거리는 것이 전부였다. 눈치 빠른 여자 아이들과 철이 들려면 멀어보이는 남자 아이들을 보며 이곳 외가의 가부장적 체제와 고리타분한 가치관이 깨지려면 몇 세대는 더 거쳐야 되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 한숨이 푹푹 쉬어졌다.


장례식 중간 중간 비용 처리를 해야 하는 때가 오면 둘째 삼촌의 첫째 딸을 불러 영수증을 받게 했고, 급하게 조의금으로 들어온 돈을 꺼내야 하는 때가 오면 꼭 두 집안 이상의 자녀들이 모여서 한 번에 꺼내도록 만들었다.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듯 했다. 누군가 조의금에 손을 댈까봐 날이 선 상태같았다. 조의금을 정리하는 것도 나와 언니를 포함한 각 집안의 자녀들에게 시켰다. 반드시 모든 집안의 자녀들이 모여서 다 보는 앞에서 돈을 정리하라고 했다. 나중에 다른 말이 나오지 않게 하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고 했다. 어떤 삼촌의 친구들은 접객실 식당에 담요를 깔더니 화투를 가져와 깔기 시작했는데 나중에 그들 사이에는 몇 십만원씩이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나는 그 때부터 할머니가 조금 불쌍해지기 시작했다


장례식은 딱 하루만 치러졌다. 왜 3일장을 하지 않는지는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왜인지 알 것 같기도 하다. 3일장과 달리 하루동안만 손님을 받을 수 있어서였는지 밤 열두시가 지나서도 사람들이 찾아왔다. 조의금을 정산하기로 한 우리들은 새벽 한 시가 지나서야 조의함을 열 수 있었다. 우리는 빈소의 할머니 영정사진 앞에 둥그렇게 모여앉았다.


언니는 조의함에서 봉투를 하나씩 열어 돈을 세기 쉽게 만들어 첫째 삼촌의 큰 아들과 둘째 삼촌의 작은 딸에게 넘겨줬다. 둘째 삼촌의 작은 딸은 언니에게 받은 봉투 중에 여러 장의 지폐가 든 봉투를 받아 미리 액수를 세어 첫째 삼촌의 큰 아들에게 넘겨줬다. 큰 아들은 소속과 이름, 액수를 나에게 말한 뒤 둘째 삼촌의 큰 딸과 셋 째 삼촌의 아들 딸에게 돈과 봉투를 넘겼다. 둘째 삼촌의 큰 딸은 돈을 다시 세어보고 백만원 단위로 돈을 정리하여 고무줄로 묶었고, 그 옆에서 셋째 삼촌의 막내딸이 돈 세기를 도왔다. 노트북을 챙겨갔던 내가 소속과 이름, 액수를 받아 적었다. 셋째 삼촌의 큰 아들은 빈 봉투를 받아 이름 옆에 얼마가 들어있는지 적었고 봉투에 남은 돈이 없는지를 확인했다. 그렇게 장장 90분 가량을 쪼그려 앉아 약 270여개의 봉투를 꺼내 금액을 정리했다. 명단을 정리해 모두의 엄마 아빠에게 보내고 이 돈으로 필요한 비용을 모두 계산한 뒤, 각 자의 부모님이 다른 말을 하지 않게 각 자가 잘 처리하자고 우리 중에 가장 나이가 많았던 첫째 삼촌의 큰 아들이 말했다. 장례식장에 비용을 처리하러 가서도 현금영수증을 해주겠다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4명의 번호로 비용을 1/4로 나누어 영수증 처리를 해주라고 말했다.


금액을 정리하고 났을 때가 새벽 세시 반이었다. 나와 언니 둘째 삼촌의 막내딸 그리고 외숙모는 손님들이 밥을 먹던 식당에서 테이블을 미뤄두고 누웠다. 덮을 것도 깔 것도 벨 것도 마땅치 않았지만 잠을 자지 않을 수 없는 피곤함이었다. 딱딱한 바닥에 누워 잠에 빠질랑말랑 할 때쯤 셋째 삼촌의 15년지기 친구라는 아저씨가 불쑥 나타나 빈소에 쓰러져 자고 있는 삼촌을 깨웠다. 술에 잔뜩 취한 삼촌은 절대 일어나지 않았고 아저씨는 상주석을 지키고 있던 첫째 삼촌의 큰 아들을 귀찮게 하기 시작했다. 아저씨는 잔뜩 취해서 자기가 장지에 따라가기로 했다며 했던 얘기를 또 하고 또 하고 무한 반복을 했고 자려던 우리들은 모두 짜증을 내며 일어나 탈의실에 들어갔다.  탈의실에는 첫째 삼촌의 손주들이 엄마와 자고 있었다. 아이들이 자고 있는 곳에는 전기장판이 있었고 그렇지 않은 바닥은 냉골이었다. 그래도 시끄럽진 않으니 이곳에 누워야겠다 싶었다. 하지만 그 아저씨는 접객실 식당에서 자던 둘째 삼촌에게 한소리 들은 뒤 다시 빈소에 누워있던 셋째 삼촌에게 와서 하소연을 하고 있었다. 아저씨를 피해 몸을 옮겼던 우리들은 도저히 잘 수가 없었다. 아저씨가 간 뒤에는 누군가의 알람이 5분 단위로 울렸다. 나는 정말이지 한 숨도 잘 수 없었다.


언니와 나는 장지에는 가지 않았다. 발인을 하는 날 아침에 나와 언니는 약간 고장나있는 상태였고, 잠을 못 잔 나는 모든 것이 짜증나고 불만인 상태였다. 할머니의 발인식을 한 뒤에 언니와 나는 택시를 타고 본가로 돌아왔다. 나는 입을 크게 벌리고 코를 골며 집까지 왔다고 했다. 집에 돌아온 시간이 9시쯤이었고 언니와 나는 오후 네시까지 잠을 잤다. 그렇게 잤는데도 우리는 밥을 먹고 다시 일곱시까지 잠을 잤는데, 열시가 지나서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할머니는 마음 편히 가신걸까. 나는 할머니덕에 아주 아주 깊은 잠을 자고 쉬었는데, 할머니는 편히 잘 주무시고 계실까. 제일 걱정이었던 엄마가 아주 조금만 울었고 내가 엄마를 안아줄 수 있었다는 것으로 나는 장례식이 무사히 끝났다고 믿고 싶었다. 그렇지만 이건 순전히 남겨진 자의 이기적인 생각일 것이고, 빈소에서 별의별 치사한 이야기를 주고 받던 삼촌들을 보던 할머니가 가슴팍을 콩콩 두드리고 계셨던 것은 아닐까 생각하기도 한다. 외가와는 연을 끊어버리고 싶다가도 나를 잘 따르던 첫째 삼촌의 손주들이 눈에 밟힌다. 눈치가 빨라 발빠르게 움직이던 여동생들도. 엄마를 끔찍하게 생각하는 마음때문에 아빠도 나도 언니도 싫어하던 셋째 삼촌을 마냥 싫어할 수도 없을 것 같다. 잘 지내려는 마음도 절대 없지만 말이다. 사는 건 역시나 오늘도 버겁기만 한데, 나는 또 잠에 들어야 할 것 같다.

작가의 이전글 지어낸 이야기 | 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