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나아갈 뿐이지
미드 '가십걸', 뉴욕 Upper East 최상류 층 자녀들의 성장과정을 그린 드라마로 2007년부터 방영을 시작해서 2012년에 막이 내린 인기 시리즈이다. 매번 미드 추천 블로그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드라마라 2년 전쯤 봐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정주행을 하다 시즌 3쯤에서 하차를 했던 것 같다. 에피소드도 너무 많고 그때는 댄과 세레나가 (극 중 초반 남주와 여주이지만 시즌이 계속될수록 바뀜) 잘 되지 않자 흥미를 잃어서 그만 봤는데 작년에 생각이 나서 다시 보기 시작해 거의 한 달 만에 정주행을 완료했다. 해외에 거주 중이라 영어 자막밖에 없어 불편하긴 했지만 시즌 1부터 벌써 재밌어서 금방 시즌 3까지 클리어를 하고 그 이후부터는 새로운 러브라인인 척과 블레어에 빠져서 정신없이 봤던 것 같다.
척과 블레어, 두 캐릭터 다 성장과정에서 우여곡절도 많았고 본인들의 존재 이유를 끝없이 고민하고 그 과정에서 아파하는 것을 보며 왠지 나를 보는 것 같아 기분이 묘했었는데 더군다나 주변 상황 때문에 둘이 계속 엇갈리는 모습을 보면서 더 조마조마하게 시청했던 것 같다. 어떻게 보면 모든 인물들이 다 성장통에 아파하고 자기 자신을 알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애쓰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많았지만 척과 블레어가 차별화되는 이유는 본인에게 어둡고 영악한 면이 있다는 것을 합리화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악한 모습은 있게 마련인데 비록 어렵지만 그런 본인의 모습도 인정하고 수용한 점에서 그 어떤 인물들보다 매력적으로 느껴졌고 그만큼 크게 공감할 수 있었다.
"운명은 루저들을 위한 거야. 꿈만 같은 일을 이루려고 노력하는 대신 그런 일들이 일어나기를 그저 기다리기 때문이지." - 드라마 오프닝을 세레나로 시작해서 시즌 초반까지 세라나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위주로 전개가 되는데 블레어가 이때 던진 이 대사가 이상하게도 공감이 됐다. 동화 같은 사랑과 삶을 믿는 블레어가 자신에게는 세레나처럼 꿈같은 일들이 쉽게 벌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본인의 방식으로 자신만의 동화를 만들어가는 그 모습이 어쩌면 나와 많이 닮아있다고 느낀 것 같다. 시즌 초반 블레어가 일을 해결하는 방식을 보면 옳다고는 할 수 없지만 주저앉아 자신의 운만 탓하기보다 적극적으로 기회를 만들어가는 모습은 정말 보기 좋았다. 특히 시즌 후반에는 본인의 능력을 살려서 자신이 아끼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모습에서 그 매력이 더 돋보였던 것 같다.
반면 척은 블레어와 달리 시즌 초반부터 중반까지 본인의 삶을 포기한 것 같아 보였다.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모습을 문란한 생활로 감추고 잊으려는 듯 보였는데 약해 보이고 싶지 않아서 강한 척 애써 누구에게나 모질게 대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심지어 마지막까지 아버지에게 제대로 사랑받지 못하고 어머니에게도 버림받는 캐릭터라는 점에서 너무 매정하고 가혹했다. 비극적인 운명에 순응한 채 포기한 듯 살아가던 척이 블레어에게서 자신을 마주한 뒤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이것이야말로 운명이 아닐까 했다. 그렇지만 시즌 1에서 이미 블레어에게 사랑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시즌 4까지 계속 이런저런 상황과 블레어를 행복하게 해 줄 확신이 없다는 이유로 곁을 맴돌기만 하는데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즌 6에서 결국 돌고 돌아 둘은 결국 함께하게 되지만 많은 일을 겪은 만큼 상처에 힘들어하지 않을까 했다. 그런데 마지막화의 마지막 1분 남짓되는 컷을 보면서 대사 한 마디 없는 그 짧은 장면이 모든 걸 이야기해 주는 것 같았다. 그 긴 세월과 아픈 과거를 이겨내고 서로를 바라보는 잔잔한 그 장면에서 앞으로 둘이 함께 그려갈 단단하고도 아름다운 미래가 보이는 것 같아서 괜히 내가 다 뭉클했다. 만약 내가 어릴 때부터 가십걸을 보면서 자라 왔다면 더 여운이 크게 남지 않았을까 싶다. 시작과 끝은 세레나와 댄이었지만 모든 시즌을 아우르는 진정한 주인공은 블레어와 척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십걸은 나의 20대에 단비 같은 작품이다. 여러 가지 감정을 느끼게 해 준 고마운 드라마이자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함으로써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교훈을 준 뜻깊은 작품이었다. 몇 년 뒤 다시 정주행을 할 땐 또 다른 장면들이 마음에 와닿아 다른 의미를 곱씹어 볼 수 있기를.
#미드 #가십걸 #감상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