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잊지 않으려
어떤 기억은 흩어진다. 어떤 기억은 강하게 남는다. 기억이 사라지고 남는 건 나의 의지와 무관하다. 어떤 기억은 잊으려 해도 계속 남고, 어떤 기억은 고이 담아두려 해도 사라진다. 나에겐 소중한 어떤 기억이 있다. 너무 소중한 나머지 사라질까 두렵고, 또 너무 소중한 나머지 영영 사라지지 않을까 두렵다. 사라지는 것은 곧 잊는 것이고, 사라지지 않는 것은 곧 얽매임이다. 그래서 두렵다.
이 글은 어떤 기억을 위해 적힌다.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동시에 잊지 않으려 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적는다.
기억 하나.
한창 무더운 지난여름의 어느 날, 이모로부터 급하게 연락이 왔다. 외할아버지께서 급하게 쓰러지셔서 인근 대학병원 응급실로 오시게 되었는데, 당장 내일 오전에 간병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일찍이 일어나 응급실로 달려갔다. 이모가 응급실 앞까지 마중을 나와 계셨다. 내 손을 덥석 잡으시더니, 눈물을 왈칵 쏟으셨다. 한참을 고맙다고 중얼거리셨다. 나는 그럴 것이 없다고 했다. 이모의 아버지임과 동시에 나의 외할아버지이신 분이다. 당연히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모는 외할아버지께서 몸을 제대로 가누시지 못한다고 말씀해 주셨다. 소변도 내가 직접 받아야 한다고도. 아무렴, 그런 것들은 괜찮았다. 병원이 무척 넓어서, 외할아버지의 병상까지 가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병상에 도착하니, 온몸이 붉은 반점으로 뒤덮인 노인이 거기에 있었다. 그 살갗을 뒤덮은 것은 거대한 붉은 반점이었지만, 사실 당신의 몸은 이미 암으로 뒤덮여 있었다. 붉은 반점은 그를 치료하던 과정에서 복용한 약의 부작용이었다. 한 눈에도 기력이 많이 쇠하였음을 단번에 느낄 수 있었고, 팔뚝에 박힌 여러 주삿바늘과 연결된 여러 관은 마치 그것이 생명줄이라도 되는 양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나는 당신의 손을 꼭 잡고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외할아버지께서 서서히 눈을 뜨셨다. 그러고는 힘겨운 목소리로 빛이 밝으니 눈을 가릴 안대를 가져다 달라고 하셨다. 나는 허겁지겁 근처 매점으로 달려갔다. 눈물이 뚝뚝 흘렀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쳤다. 외할아버지께서는 안대를 무척 마음에 들어 하셨다. 그러고는 다시 잠에 드셨고, 비교적 편안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기억의 파편들이 불현듯 수면 위로 떠올랐다.
기억 하나.
재작년 늦은 봄, 나는 나라의 부름을 받고 군에 입대했다. 훈련소 기간, 무척이나 힘든 날들을 보냈다. 어제까지 부모의 보살핌을 받던 어린 소년들이 부모·형제를 지키는 한 명의 군인으로 거듭나야 했던 것이므로, 생활이나 훈련이 몹시 고된 것은 당연했다. 당시 훈련소 생활의 낙은 일과가 끝날 무렵 받아보는 편지였다. 대개는 인터넷으로 쓰여 인쇄된 편지였는데, 주로 친구나 가족들이 보내주곤 하였다. 가끔 손으로 직접 쓴 편지들도 오곤 했는데, 모두 부모님으로부터 온 편지였다.
훈련소 생활이 한창이던 어느 날, 여느 때와 같이 생활관 단위로 편지가 배달됐다. 그날따라 내 편지 묶음이 묵직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살펴보니, 두껍게 접힌 편지가 하얀 봉투에 반듯하게 들어 있었다. 편지봉투에는 내 이름 석 자가 적혀 있었고, 안에 담긴 편지는 큼지막하고 예스러운 글자로 채워져 있었다. 그것은 사랑하는 내 외할아버지가 나를 위해 직접 쓰신 편지였다. 당신은 편지에서 당신의 손자가 어엿한 한 명의 군인이 되었음을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하신다고 하셨다. 그러면서도 꼭 다치지 말고 몸 성히 전역하라고 당부하셨다. 그 편지는 특별했다. 관물대에 아무렇게나 넣어둔 다른 편지들과 같이 두지 않고, 제일 안쪽에 반듯이 넣어두었다.
첫 휴가를 나와서 외할아버지를 뵈러 갔다. 병약하던 손자가 어느덧 자라 군인이 되었음을 보여드리려고 군복을 반듯하게 차려입었다. 외할아버지는 나를 보시더니 꼭 안아주셨다. 그러고는 가장 먼저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디 다친 데는 없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