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9 월은 그냥, 휴가철 끝, 개강. 올해 9 월 첫 두 주 내내, 35 도를 넘나드는 늦여름 날씨 덕분에 퇴근 후 집에 도착하면 녹초가 되곤 했다. 그러다 둘째 주 월요일부터 칼칼했던 목이 한 주가 끝나가면서는 아파오기 시작했고, 금요일 아침엔 일어나자마자 머리도 띵하고 가래기침에 콧물에, 컨디션이 말이 아니었다. 요즘 다시 코로나가 유행이라는 말이 들리던데 난 하는 테스트마다 음성이 나왔기에 그냥 독하디 독한 늦여름 감기에 걸린 것이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금-토-일 삼일 내내 아프고 나니 주말에 하려고 계획했던 일들은 손도 못 대고 월요일을 맞게 되었고, 정신이 하나도 없이 월요일이 휙 지나가 버렸다.
화요일 아침, 2 주간 지독히도 더웠던 늦여름이 지나나고 조금은 선선해진 날씨가 온 이틀 째였다. 왠지 일 하기가 싫어 오피스에서 늦장을 부리다 환하게 쏟아지는 햇살이 더 이상 뜨겁지가 않다고 느꼈을 때, 갑자기, 그냥 -- 수업이 시작하면 더 바빠질 텐데, 여름-가을이 지나가는 짧은 시간이 얼마나 반갑고 아쉬운데, 싶어서 -- 무작정 일찍 퇴근을 해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집에 예정보다 일찍 도착하고, 막 퇴근한 남자친구찰리에게 날도 선선해졌으니 산책 가자고 졸라 함께 밖으로 나왔다. 배고프다면서도 노을 지는 게 너무너무 보고 싶다는 내 부탁에 기꺼이 함께 나와 준 찰리에게 다시 한번 감사를!
지난주엔거의 출근 퇴근만 하고 주말엔 침대에 누워서 약 먹고 잠만 잤어서 그런지, 가벼운 맘으로 산책을 하러 나와 들이쉬는 공기는 어째 더 상쾌한 것도 같았다. 게다가 아무리 화요일 저녁이라고 해도 길거리가 유난히 한적했다 (프랑스는 월요일에 많은 식당들이 닫는데어떤 식당들은 화요일도 쉬기도 한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딯을 때마다, 기침을 더 이상 안 해서, 콧물이 안 나와서, 찰리랑 함께 걸어서, 날씨가 선선해서, 길거리가 한적해서, 저 멀리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에 신이 나서, 별의별 사소한 게 다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맘에 쏙 들었던 것은 유독 분홍빛을 띤 노을이었다.
그렇게 우린 몽마르트 동네에서 가장 높은 곳, 사크레쾨르 대성당 쪽으로 향했다. 우리 동네에서 거주한 지 4 년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길거리였는데도 새삼스레 예쁘게 보여 열심히 사진에 담으며. 언덕을 올라갈수록 노을 색은 진해졌고 핑크빛으로 온 세상이 물드는 것만 같이 보였다. 어느 정도였느냐면, 몽마르트 언덕에서 사진 잘 나오기로 유명한 명소 Maison Rose(직역: 분홍색 하우스)라는* 레스토랑보다도 더 진한 분홍색이 하늘을 채우고 있었다.
*Maison Rose는 몽마르트 언덕에 위치한 Rue des Saules과 Rue du Cortot, Rue de l'Abreuvoir가 만나는 사거리에 위치해 있다. 분홍색 벽과 파스텔 민트그린색 창문과 문의 조합이 예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이 건물은 몽마르트를 그려낸 화가들 덕분에 유명하다. Maurice Utrillo의 작품들 덕에 가장 유명세를 탔고,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Jules Emile Elisée Maclet가 먼저 그림에 담아내기도 했다. 1900년도부터 레스토랑이었던 이곳은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카바레로 쓰였을 것이라고 전해지며, 1950년대 즈음 이탈리아 출신인 Béatrice Miolano가 레스토랑을 구입해 현재는 그녀의 손녀가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Elisée Maclet. Montmartre, la Maison Rose.
Maurice Utrillo. La petite maison rose.
처음 프랑스에 도착해 눈에 담은 보르도의 강가와 대극장 광장을 보며 처음 느껴보았던 설렘과 감탄이 무색하게도, 이제 프랑스에서의 일상 풍경은 내게 너무나도 익숙해져 버렸다. 그 반대로 내게 그렇게도 익숙하던 캐나다, 토론토 우리 집 풍경은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뭉클해지는 그런 장소가 되었다. 한국에 틈틈이 놀러 가 시간을 보내며 어느덧 익숙해진 할머니댁 동네, 그 작고 작은 반경도 마찬가지로 내 일상일 수 없기에 애틋하기만 하다. 이런 생각이 들 때면 매번, 몽마르트 동네에 머무는 동안은 정말 열심히 우리 동네를, 내 일상을 열심히 즐겨야겠다, 하고 마음가짐 하게 된다. 언젠가 다른 동네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면 이곳도 나의 '한 때'가 담긴 동화책 같은 그런 느낌으로 내게 남을 것 같아서.
여기저기 분주히 사진을 찍느라 바쁜 관광객들, 익숙한 듯이 자신 있게 길거리를 걷는 몇몇 익숙한 강아지들과 반려인들, 파리지앙답게 빠른 발걸음으로 장을 보거나 빵집에 들러 집으로 향하는 주민들, 좁은 길거리가, 평일임이 무지하게 테라스를 뽀득이 채우고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사람들, 지나가다 마주치면 반갑게 인사하는 단골집 주인들, 퇴근 후 귀가하며 건물들 사이로 보이는 노을의 잔상 등, 참 익숙하고 익숙한 만큼이나 내게 소중한 하루하루의 풍경. 가끔 마음의 여유를 갖고 하게 되는 산책은 그저 바쁘게 일상을 보내며 스쳐 지나가는 풍경에서 다시금 낭만을 되찾을 수 있게 해 준다. 그렇게 현재 내 일상이 고스란히 담긴 이 동네에서 마주하는 아름다움은 더 깊숙이 눈에 담기고 맘에 새겨진다. 일상에 익숙해져 소중함을 잊지 않고 살아가야겠다고 매번 생각하게 되는 산책, 그 시간에 감사하다.
산책 중 마주친 풍경을 공유하고 싶어서 편집해 본 짧은 영상
핑크빛 노을이 너무 예뻐서 한참을 찰리의 손을 잡고 서서 바라보았다. 다음에 산책 나오면 테라스에 앉아서 가을 노을 구경하며 저녁식사를 하자고 다짐하고 약속하며. 오랜 시간을 걸었는데도고맙게 노을의 분홍빛은 꽤 오랫동안이나 하늘을 채우고서야 졌다. 배고픈 차차와 이제 가서 밥 먹자고 식당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아쉽지 않게끔, 만족스러운 타이밍.
배고파도 꾹 참고 사진 찍는 날 기다려준 차차
올해 겨울, 크리스마스에 엄마 아빠를 보러 캐나다에 가려고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토론토에 사는 동생도 마침 휴가를 내어 시간 맞춰 가겠다고. 차차와 함께 가는 세 번째 캐나다 여행, 나의 한국-캐나다-프랑스 세 세상이 이어지는 듯한 소중한 시간이다. 4 년 전, 엄마 아빠께서 토론토를 떠나 정착하신 켈로나에서는 아직 온 가족이 함께 크리스마스를 함께 한 적이 없다. 어서 가서 엄마 아빠의 동네에서 함께 산책하며 이런저런 일상 얘기를 나누고 싶다 -- 울 집 막둥이, 강아지가 함께였다면 배로 좋겠지만. 마치 떨어져 살고 있지 않다는 듯, 이렇게 함께 하는 산책이 당연하다는 듯, 별것 아닌 것에 웃음 나누며 그렇게 함께 동네를 산책할 생각에 벌써부터 행복하다.
예쁘고 선선한 계절, 가을. 깊어지는 풍경의 색감만큼이나 아름다운 노을이 이 날 우리가 하게 된 동네 산책을 꽤나 특별하게 만들어 준 것 같다. 산책하기엔 제격인 계절, 가을이 머물러 있을 때, 아무리 퇴근 후 피곤해도 운동 삼아서라도 꼭 자주 동네 산책을 나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