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에서 대학 2학년 때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으로 한국행 비행기를 끊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이민을 간 이후로 처음 가보는 한국이었다. 마침 몇몇의 고등학교 동창 친구들도 같은 시기에 한국에 있을 예정이어서 그저 설레고 신날 뿐이었다.
인천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느낀 감정은 조금 충격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눈 닿는 곳마다 한국말을 하는 한국사람들뿐인 것이 참 생소했다. 당연한 것인데, 그들은 분명 나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도 왠지 나 혼자 동 떨어진 그런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설렘으로 심장이 크게 뛰었던 기억이 난다. 입국장으로 나가며 목이 말라 어느 스탠드에 들려 물을 사는데 집어든 물병이 눈에 들어왔다. 별것도 아닌데 참 디자인이 세련되고 예쁘다고 느꼈다. '정말 한국이구나-'싶었다.
입국장에서는 작은 아빠께서 마중 나와 반갑게 맞아주셨다. 몇 년 만에 뵙는 것인데도 다름이 없어 보이셨다. 낯설지만 익숙한 듯, 익숙하지만 낯선 듯 한 그런 환경에서 좀 안정이 되는 기분이었다.
한국은 마치 별나라 같았고, 난 그 별나라와 사랑에 빠진 기분이었다. 눈 닿는 곳마다 반짝거리는 듯했고 맛있는 것도, 예쁘고 귀여운 것도 너무나 많았다. 눈과 손이 닿는 모든 걸 보고 만지고 사고 싶었다. 한국 돈,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K-pop(그 당시엔 이 단어를 쓰지 않았던 것 같지만) 포스터들과 노래들, 편리하고 깨끗한 대중교통 시설, 시끄럽다고 느껴질 정도로 큼지막하고 다양한 색깔로 적혀있는 상점 이름들, 심지어는 그저 걸어가는 사람들을 보기만 하는 것도 신기하고 신이 났다. 한식당, 노래방도 토론토 한인타운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싼 가격이어서몇 안 되는 친구들과 사촌들을 만나 열심히 먹고 놀았다.
내겐 별나라 같아만 보이는 한국
그렇게 한국에 머무는 동안 틈틈이 캐나다인들과 한국인들을 비교하곤 했다. 나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이 주류사회를 이루는 그곳에서 알아가는 한국사람들은 낯익은 듯하기도, 낯설기도 했기 때문에. 처음 보는데도 다정하게 다른 이들을 대해 주시는 아주머니, 아저씨,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마주치면 마치 나의 가족을 대하는 듯 정겨웠다. 한편으론 건물에 들어가고 나가며 문을 잡아주지 않는 사람들이라거나, 부딪혔는데 미안하다는 말이 없는 대신 머쓱해하는 게 눈에 보이는 사람들이 낯설기도 했다 (캐나다 사람들은 'Sorry, '를 입에 달고 산다 - 자신이 부딪친 게 아니라도 일단 먼저 나오는 말). 내가 교포라서 그렇구나, 역시 익숙지가 않구나 싶었다. 하지만 그런 내가 모르는 한국의 면모를 알아가는 것도 즐거웠다.
친가 쪽 조부모님 댁에서 주로 머무르면서 나의 어렸을 때 동네를 다시 익히기도 했다. 어렸을 때 다니던 초등학교, 피아노 학원, 친구들과 함께 놀던 놀이터, 자주 가던 동네 슈퍼 등, 그대로인 듯하면서 아니었다.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는 당시에 새로 개원했었는데 아파트 단지들 뒤에 위치한 자그마한 빈 땅 옆에 위치해 있었다. 하지만 몇년 만에 다시 본 그곳에는 그곳엔 할머니 할아버지 댁 아파트보다도 높은 아파트 단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동네 길도 내가 기억했던 것과 참 다르다고 느꼈다 - 어렸을 땐 꽤나 길다고 느꼈었던 학교 가는 20 분 거리의 길을 다시 걸어보니 짧기 그지없었다.
한국에서 보낸 가족과의 시간은 소중했고 행복했다. 모두 몇 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에 온 나를 환대해 주셨다. 특히 어렸을 때 함께 살았던 친가 쪽 조부모님 댁에 머문 시간은 참 소중한 기억이다. 당시할아버지 할머니 두 분께선정정하셨기에 어렸을 때처럼 할아버지를 따라 화실을 가기도, 할머니를 따라가 할머니께서 시조 하시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내가 어릴 때 쓰던 방에는 내가 쓰던 침대와 책상이 그대로였다. 할머니께선 아침에 일어나시자마자 밥을 한상씩 차리시느라 분주하셨고, 항상 어렸을 때 나와 동생이 좋아하던 동그랑땡을 반찬으로 내어 주셨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화실엔 나와 동생이 놓고 갔을 법한 연필, 사인펜, 줄자 등 아기자기하게 우리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조부모님과 보낸 시간 동안 할아버지의 지프차를 타고 절도 가고 물구경 산구경도 갔다. 바깥세상과는 달리, 두 분의 시간은 내가 떠났을 때 이후로 멈춰있던 듯, 그렇게만 느껴졌다.
첫 한국 여행은 말 그대로 여행이나 마찬가지였다. 드라마나 예능으로나 봐 왔던 한국을 배경으로 내가 있었고, '한국 감성'에 흠뻑 빠져 마치 꿈을 꾼 듯했다. 게다가 보고 싶던 가족도, 양가 조부모님들과도 시간을 보낼 수 있었기에 감사할 뿐이었다.
마냥 즐겁기만 했던 한국 '여행'은 시간이 지나며 점점 여행보다는 가족을 위한 시간에 지우 치기 시작했다. 몇 년 전, 양쪽 할아버지들께서 같은 해 겨울에 돌아가셨다. 그 후로 외할머니께선 거동이 불편하셔서 요양병원에, 친할머니께선 한때 할아버지와 나, 동생이 모두 함께 살던 그 집에서 이젠 노견이 된 말티즈 강아지 한 마리와 살고 계신다. 친할머니께서는 '항상 멀고 힘든데 오지 말고 네 생활에 충실해라, '하고 말씀하시곤 했었는데 혼자 계시고부터는 언제 오냐며 여쭈신다. 외로우신 게 지긋지긋하시다고, 사람이 고프시다고. 다른 이와 함께 식사하고 소소한 대화를 나누는 그런 당연했던 일상이 그립다고 하신다. 그렇게 할머니께선 전화로 외로움을 노래하신다.
할머니께서 키우시는 강아지도 벌써 노년이라 작년에 이를 몽땅 빼는 대수술을 했다. 한평생 자식들, 손자 손녀, 그리고 할아버지 뒷바라지 하시고 이젠 그 큰 집에 노견과 둘이만 계신다고 생각하면 맘이 아파 한국에 더 자주 가기 시작했다. 매번갈 때마다 전주에서 할머니와 시간을 많이 보내는 데에 치중하게 되어 며칠이라도 서울에 있는가족과 친구들을 만날 땐 마음이 편치 못하다. 프랑스에선 친구들이 나와 한국에 같이 놀러 가고 싶어 하는데, 매번 얘기가 나올 때마다 나는 난처할 뿐이다. 함께 간다고 해도 나는 함께 맘 편히 놀고 여행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냥 혼자 가서 일상을 함께 보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하시는 할머니 모습을 보는 걸로 되었다.
시간이 지나며 나는 부모님이 더욱더 안쓰러워져 간다. 자신의 부모님이 점점 약해지시는 모습을 곁에서 챙겨드리지 못하는 그 맘을 나도 이해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언젠가 엄마 아빠께서 할머니 할아버지 연세가 되셨을 때, 나는 절대 두 분이 할머니께서 느끼시는 외로움을 느끼게 하지 않도록 내 최선을 다 할 것이라고 다짐하게 된다.
최근에 처음으로 '우리 가족이 이민하지 않았었다면 어땠을까?'하고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랬다면 현재의 나와 동생의 모습이 상상도 안 간다. 하지만 우리 가족의 모습은 상상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상상은 행복하고 애틋하며 결국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환상 정도로만 남는다.
한국을 떠난 시간과 무관하게, 한국은 내게 가족이다. 언젠가 조부모님들께서 돌아가시게 되면 그때는 한국을 마음껏 여행하고 속없이 놀기만 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그날이 오지 않아도 괜찮다.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가까이서 챙긴다 해도 아쉬운 게 가족인데, 이 멀리서 겨우 전화로 연락하며 일 년에 한 번 즈음이나 찾아뵙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양쪽 할아버지들께서 우리 곁을 떠나셨을 때 경험한 그아픔은혼자 계시는 양가 할머니들을 관해선배가 될 것임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항상 언제든 가도 반갑게 맞아주시는 양가 할머니들과, 또 친할머니께서 계시는 그 집이, 매일 지팡이를 짚고 강아지를 산책시켜 주시는 그 동네가, 그리고 틈틈이 할아버지를 대신해 발걸음 하시는 화실이 그대로였으면 좋겠다. 그냥, 그랬으면 좋겠다. 내가 추억하는 한국은 시간에 무관하게 항상 별나라같이 빛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