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캐나다, 특히 토론토나 밴쿠버 같은 대도시에선 다문화주의 정책이 시민의식에 잘 자리 잡혀 있어서 다른 곳에 비해 인종차별이 심하진 않다고들 한다 (물론 코로나 사태 이후 Asian hate는 캐나다에서도 문제가 되었고, 오랫동안 이어져온 경찰과 First Nations 원주민들이나 흑인들 사이의 긴장관계도 무시할 수 없겠지만). 나는 캐나다에 살 때만 해도 학생이었고 주변에 나와 같은 한인 이민자 친구들이 많았기 때문에 크면서 뚜렷이 기억에 남는 인종차별을 겪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프랑스에 도착하고선 모든 게 바뀌었다. 파리에 정착하며 나아지긴 했지만, 처음 도착한 보르도엔 동양인이라고 하면 중국인들이나 프렌치 베트남인들이 대다수였고, 길거리에서 '니하오'라거나 '곤니치와'라는 인사 아닌 인사를 듣거나 여성차별적인 캣콜링을 당하는 건 일상적이었다. 그런 차별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 적어도 내 경험상으론 - 대부분이 못 배운 소수의 유색인종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길가에서 마주치기 십상이다. 보르도 시내엔 Sainte-Catherine 길이라고 유럽에서 가장 길다는 차 없는 쇼핑거리가 있는데, 그 거리는 대극장 쪽으로 올라갈수록 화려하고 깨끗하고, 반대쪽에 위치한 Victoire 광장을 향해 걷다 보면 점점 길거리가 너저분해지고 차별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마주칠 확률이 높아진다. 시내 내에서 점점 더 대극장 쪽 반대, 동남향으로 내려갈수록 그렇다. 슬픈 건, 프랑스에서 일상적인 인종, 여성차별을 하는 사람들은 정말 못 배우고 잘 못 사는 사람들이 대다수라 그들이 주로 나타나는 곳은 뻔하다는 것. 파리만 해도 대도시이기 때문에 그런 동네나 길을 피해 다니기가 수월하지만, 보르도는 아니었다. 그 작은 시내에서 마주칠 수밖에 없던 그들은 참 끈질기고 피곤했다.
Rue Sainte-Catherine, 보르도. 이미지 출처: Clovis Wood Photography / Unsplash
어느 순간부터 난 길에서 '그들'처럼 생긴 사람들을 보면 걸음을 빨리 걷기 시작했다. 그들이 날 향해 내던지는 무식한 소리를 들으면 무시하거나 멈춰 서서 화를 내기도, 감정을 꾹꾹 눌러 참고 그들이 하는 행동이 왜 잘못되었는지 설명해 보기도 했다. 그렇게 경험을 통해 알아낸 것은, 그들에게 영어로 대화를 시도하거나 욕을 하는 건 별 소용이 없고불어로 대응해야 그나마 내 말을 조금이나마 들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언어와는 무관하게 그들의 문화권에선 여자는 순종적이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여자가 - 그것도 동양인이 - 자신의 말을 맞받아치면 그들은 정색하며 오히려 욕을 하는 경우가 많다. 아주 소수의 경우에는 멋쩍은 듯 가벼운 사과를 건네지만, 그마저도 미덥다.
그렇다고 해서 백인들은 인종차별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내 경험상 그들은 소수였고, 그 소수 중 대부분은 '니하오, ' '곤니치와'보단 사람을 앞에 세워놓고 '차이니스?'하고 물으며 계속 나의 출신을 맞춰보려 하는 식으로 사람을 귀찮게 했다. 한 번은 남에게 제대로 된 인사 대신에 차이니스인지 재패니스인지 손가락질하며 묻는 게 얼마나 무례한 행동인 줄 아느냐고 되물었더니 돌아온 답 - 통계적으로 동양인이라면 중국인일 확률이 가장 높으니 그렇게 묻는 것이라고. 캐나다 사회에선 그런 발상은 인종차별적이다. 몇 년 전부터는 ''Where are you from? (어디서 오셨어요?)"이란 질문자체도 무례하게 여겨진다. 피부색으로 이곳, 현지 출신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것이 무식하고 무례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저 한마디, "What is your origin? (어디 출신이신가요?)"이라고 물으면 될 일이다.
그런 자질구레한 인종차별과 캣콜링은 보르도보다 동양인이 많은 파리에 정착하며 훨씬 덜 겪게 되었다. 어언 7 년째인 파리 생활, 이젠 내가 살고 있는 동네를 비롯해 깨끗하고 '안전한' 동네와 길들을 잘 알고 있기도 하고, 그 밖으로는 나갈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그런 불쾌한 상황을 자주 마주치지 않는다. 아직 아이를 가질 생각은 없지만, 언젠가 그런 날이 오면 어디에 거주해야 할 지도 머릿속에 대강 그림이 잡혀있다. 아름다운 나라이고 도시인데, 슬픈 현실이다.
요즘에 난 그런 상황이 생기면 무시하기도 하지만, 정도가 심하면 가운데 손가락을 내보이거나 화를 내기도 한다. 평소엔 화가 많은 성격이 아닌데, 동양인들이 순종적이고 고분고분하다고 생각하는 선입견이 싫어서, 캐나다에서도 유색인종 이민자로 살아가는 나의 부모님 생각이 나서, 또 그들이 다른 동양인들, 특히 여성들에게 차별적으로 행동하기 전에 조금이라도 주저했으면, 하는 마음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선 머릿속으로 되뇐다, "idiots"(멍청이들)라고. 그런 행동이 정상이라고 여기며 살아가는 게 그들의 일상이자 삶이라면 그들은 나의 감정 소모가 필요 없을 정도로 불쌍한 것 아닌가? 또한 특정한 문화권 영향을 받거나 좁은 그룹에 속해 있음으로써 자연스레 그렇게 살게 된 것은 굳이 그들의 잘못이 아니기도 하다. 그렇게 생각하면 일렁이던 화도 곧장수그러든다.그런 그들이 미운만큼, 좁은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그들이 안타깝기도 하다.
일상적인 인종차별에 대처하는 방법에 관해선 정답이란 건 없는 듯하다 - 처음부터 그들의 차별은 미개한 짓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차별을 하는 이유 아닌 이유는 다음과 같다: 무지해서 생각 없이 말을 내뱉는 것이거나, 자기 딴에는 넉살 좋게 인사하는 거라고 생각하거나, 인종을 떠나 여자들에게 캣콜링 하는 게 그들의 일상이거나, 아니면 그냥 시비 걸고 싶어서. 남자친구와 함께 있으면 한 마디도 하지 않는 것도 그들의 특징이다. 그런 이들을 붙잡고 화를 내거나 설명을 한다 해도 비아냥 거리거나 대수롭지 않아 하는 경우가 많고, 폭력은 폭력을 부른다고, '그냥 무시해'라는 흔한 조언이 일리 없는 말은 아닌 셈이다.
분명 프랑스에 와서 인종차별을 경험했지만 '프랑스인들은 인종차별주의자들이야, '라는 말을 들으면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일상적인 인종차별은 주로 소수집단에 속한 사람들 중에서도 소수가 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 물론 그들을 꾸준히 마주치게 된다면 다수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또한 그들 중에는 2, 3 세대에 걸쳐 프랑스에 거주하면서도 스스로를 프랑스인으로 식별하지 않는 이들도 많다. 복잡한 사회적 문제. 일부 차이는 있겠지만, 이렇게 다문화사회 내 발생하는 이슈들은 프랑스만의 문제가 아니다 - 시간이 지나며 더욱 세계적으로 퍼지기만 할 지구촌의, 특히 선진국들의 현실이다.
프랑스에 처음 도착하고 나서 한동안은 '그들'에게서 차별을 당한 경험 때문에 그들과 닮은 이들을 무의식적으로 구별하며 일상을 보내기도 했다, 마치 미리 예상하고 있으면 그들의 행동이 내게 덜 영향을 미치기라도 하는 듯이. 그러면서도 피부색, 인종, 등 서로 간의 다름을 지적하는 것에 예민하고 세심해야 하는 캐나다인으로서의 의식 때문에 맘이 편치 않았다. 또 내가 편견을 가지고 역차별하는 그 사람들의 피부색은 나의 몇몇 친한 친구들의 것과도 같기도 하기 때문에 더 그랬다. 그럴 때마다 '우리'(피해자)와 '그들'(가해자)을 구분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라고 느꼈다.
그렇게 한국인이자 동양인인 나의 유럽 사회에서의 위치와 그를 바라보는 북미 문화에 의해 형성된 내 시각은 나 자신이 겪은 경험들을 풀이하는 걸 한동안 힘들게 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여전히 그렇다. 차별을 받으며 편견을 가지게 된 내 모습이 불편하다. 인종차별주의는 개인의 교육 수준, 경제력, 삶의 경험, 그리고 그들의 나라나 문화권과 관련된 역사 등, 수많은 요소들이 상호 연결되어 있는 복합적인 문제. 따라서 인종, 또는 문화권이란 단편적인 요소들로 인종차별자들을 분류하는 것은 결국 인종 집단 간에 더 심한 차별과 불평등, 그리고 긴장관계를 초래할 뿐이다. 그래서 흑백 렌즈로 상황을 보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여전히.
프랑스에 살면서 다른 인종들 간의 긴장과 갈등을 직접 체험하며 의식하게 되고 다양한 시각을 가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눠 볼 수 있었다. 아직도 어렵다고 느끼는 주제이며 현실이지만, 인종차별의 근본이 편견에 있다면그에 대한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는 사실, 그리고 모든 문화권이 인권 측면에서 발달되어 있지는 않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함께 고민하고 숙고하는 것이 각 개인의 경험을 이해하고 사회적으로 해결책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나침반이 되어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