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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글펜 설아 Aug 18. 2023

사랑하는 엄마 아빠

든든한 울타리는 우리, 가족

어렸을 때 바라본 부모님은 한없이 크고 대단해서 마치 슈퍼맨 같다는 말이 있다 - 하지만 나이를 먹으며 바라본 부모님은 점점 더 작아져 보이곤 한다고. 이민자의 시각에서는 더더욱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또 그렇기에 더 애틋하다.




한국에서 우리 가족은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편이었다. 아빠께서는 IT업계에, 엄마는 교직에 종사하셨고, 양가 조부모님께서도 교직에서 물러나 편한 삶을 살고 계셨다. 서울에 맞벌이하시는 부모님께서는 전주 할아버지 할머니 댁에 나와 동생을 맡기시고 주말마다 오셔서 함께 시간을 보내셨는데, 미안한 마음을 대신하듯 매번 오실 때마다 나와 동생 손에 몇 만 원씩을 꼭 쥐어 주시며 친구들과 맛있는 거 사 먹으라고 하시곤 했다. 초등학생이 그만한 돈 쓸데가 어딨 다고. 책이던 장난감이던 뭐든 말하기도 전에 선물 받고는 했다.


캐나다에 이민을 오고 처음 몇 년간은 엄마아빠께선 여전했다. 아빠께서 같은 업계에 종사해 보려 일자리를 찾고, 일자리가 잡히지 않자 현지 교육 경험이 있으면 좀 나으려나 하고 공립 컬리지에 다녀보셨다. 그때까지는 우리 가족은 괜찮은 듯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처음으로 엄마께서는 내게 아빠가 일이 잡히지 않아 힘들어하고 있다고 하셨다. 그날 아빠께선 다른 때와는 다르게 말이 없으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빠께서는 우체부로 일하기 시작하셨고, 엄마께서도 한글학교 교사를 좀 하시다 준비 후 시험을 보셔서 캐나다 회사에서 한인 소비자를 상대로 보험 판매직을 시작하셨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빠께선 과묵해지셨고, 내가 사춘기로 들어서면서는 통금시간을 강요하시며 그저 엄격하게만 대하셨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한국인 친구들이랑 교류하는 모습을, 또 고등학교가 끝날 때 즈음 만나기 시작한 첫 남자친구를 맘에 들어하지 않으셨다. 여기까지 이민 와 놓고 왜 굳이 한국 사람들과 그러고 있냐고 자주 말씀하셨다. 때문에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았고 원망스러울 때도 많았다. 엄마께서는 항상 아빠와 나 사이에서 중재를 하시느라 바쁘셨다. 나도 한편으로는 어렴풋이 이해하고 있었다 - 당신의 빛나는 날들을 뒤로하고 온 이 낯선 땅에서 당신의 자식은 캐나다 사회에 융합해 살아가는 걸 보고 싶으셨을 것이다. 아빠께 혼이 나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더라도 결국 남는 건 미안하고 또 미안한 맘이었다.




대학전공을 정해야 했을 때, 나는 패션 디자인과에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부모님께서는 그걸로는 먹고살기 힘들다며 미술 특기를 살려 교사를 하는 게 훨씬 나을 거라고 하셨다. 서운한 마음도 있었지만 일리 있는 말씀이라고 생각해서 미술과 교육학과를 복수 전공했다. 졸업할 때 즈음엔 나는 내 인생이 거의 틀이 잡혀있다고 생각했다 - 오랫동안 만나온 남자친구도 있었고, 졸업 후에는 고등학교 교사직을 맡아 우리 가족과 옹기종기 살다가 언젠가는 결혼하게 될 거라고 확신했기에. 하지만 아빠는 거기에서 안주하지 말고 프랑스로 가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정착하라고 꾸준히 등을 미셨다. 서운했다. 나는 엄마 아빠 동생 그리고 우리 강아지와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등 떠밀려 기회를 알아본 결과, 우리 학교 불어 부서에서 마침 보르도 대학교로 보낼 영어 강사 자리가 있다고 해서 면접을 봤고 합격했다. 일 년 계약직이지만 한번 재계약이 가능하다고 해서, 2 년 후에 캐나다에 돌아오면 되겠구나 싶었다. 여러모로 좋은 기회였기에 기뻤다.  




보르도, 프랑스에서의 첫 해가 지나고 나를 보러 오셔서 내가 정착한 모습을 보고 참 좋아하시던 부모님의 환한 웃음이 생각난다. 석사를 시작한다고 했을 때 대견하다며 큰돈을 주셨다. 박사를 시작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프랑스 시민권을 취득했을 때, 파리에서 계약직 교수직을 맡게 되었을 때도, 최근에 박사학위를 취득했을 때도 그리 해맑게 웃어 보이셨다. 그렇게 매번 좋은 소식이 있을 때마다 부모님은 한국에 있는 가족에게, 주변 사람들에게 꼭 알리시곤 했다. 한 해 한 해 그렇게 프랑스에서 살아가다 보니 이곳에 정착하게 됐고, 아빠께선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었다며 그저 좋아하신다 - 우리가 영어권인 캐나다를 발판 삼아 더 큰 물(?)에서 노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셨다고. 매번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내가 더 잘해야지 하는 맘이 앞섰다. 나와 동생이 잘 되는 건 아빠 엄마께서 모국을 떠나신 이유이자 또 자신들이 살고 싶은 그런 모습이 아닐까 싶어서 더 열심히 살자고 다짐했다. 또 한편으론 서운했다, 여전히. 나는 우리 가족이랑 떨어져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프랑스에 유색인종 1세대 이민자로서 살다 보니 엄마 아빠가 항상 더 생각이 나고 걱정된다. 예를 들면 가끔 길거리를 걷다 인종차별주의적인 발언을 하는 얼간이들을 보면 평소의 나답지 않게 공격적이게 되어 부모님을 대신하듯 욕을 해주거나 화를 내기도 한다. 난 영어가 능숙했기에 이곳에서 불어를 배워가던 때에도 현지인들과 교류하는 게 용이했고, 그를 나는 잘 인지하고 있다. 때문에 캐나다에서 만 40에 현실과 부딪히며 제대로 배우기 시작한 영어로 살아가는 아빠 엄마 생각을 하면 마음이 편치 않다.




어렸을 때와는 달리 부모님께서는 나에게 더 이상 강요하지 않으신다. 딱 하나, 결혼을 이제 곧 했으면 좋겠다는 것 빼고. 그마저도 전처럼 강요조가 아니다. 동생에게도 마찬가지다. 동생이 대학을 졸업하고 자리 잡기 전까지는 걱정 또 걱정이셨는데, 동생은 마케팅 쪽에서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며 잘 살아가고 있다. 동시에 과묵하기만 한 줄 알았던 캐나다에서의 아빠께서도 맘에 여유가 생기셨는지 한국에서처럼 장난도 많이 치시고 웃음도 많아지셨다.


하지만 이젠 내가 자꾸 잔소리가 는다. 아빠께서 무릎이 안 좋은 것 같다고 엄마께서 귀띔해 주시면 병원에 가라고, 주말에 술 드시는 버릇 이제 버리시라고, 엄마 허리가 안 좋으시니 꼭 가볍게라도 운동하시라고, 한국행이던 프랑스행이던 비행기 티켓을 끊으실 때면 내가 한번 더 저렴한 티켓이 있는지 찾아보겠다고, 등. 이제 아빠께서는 내 잔소리에 못 살겠다고 하신다. 부모님께 잘해드리고 싶은 마음은 한가득인데 그 맘을 앞서 잔소리가 항상 한 발 빠르다.




아빠엄마가 어렸을 때 보았던 것처럼 커 보이지 않는 현상은 이민자의 자녀들에게는 훨씬 일찍이 찾아오곤 한다. 우리는 자라면서 학교를 다니며 맞닥치는 고민거리나 현지인들 인맥을 통해 받을 수 있는 도움들을 우리의 부모님을 통해선 받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되고, 더불 자연스레 캐나다에서 살아가며 발생하는 행정 관련 일들로 영어가 능숙지 못한 부모님을 틈틈이 돕게 된다. 그로 인해 어느 순간부터 자녀들은 부모님의 지도를 받으며 자라는 것보다도 어느 면에선 부모님을 지도하며 자라곤 한다.


실제로 1세대 한인 이민자 부모님들이 캐나다 사회 내에서 자식들에게 줄 수 있는 실질적인 도움은 어느 정도 한계가 있을지 몰라도 그들은 자식들의 인생을 포괄적으로 설계하는 데 있어 현지인 부모님들보다 더 깊숙이 개입한다. 이는 한국문화이기도 하지만, 자식들이 당신들보다 주류 사회에 더 잘 융합하여 풍요롭게 살 수 있길 바라는 1세대 이민자의 마음에서 비롯된다.


이민자 가족 내에서 삶에 대한 가르침이 성공적으로 부모에서 자식에게 전달된다면 그 가르침은 자식의 마음속에 유독 크게 자리 잡는다. 자식을 위한 맹목적인 사랑 그리고 희생, 그것을 주욱 느끼며 자라왔기에 가족은 유난히 소중하고 애틋하다. 이거야말로 한국 우리 부모님 세대의 가족정신이자 한국문화의 큰 일부 아닐까? 물론, 가족애가 좋기만 하라는 법은 없다. 힘든 이민 적응기와 그 후의 삶 때문에 부모님을 원망하며 자라는 자녀들도 생각하는 것보다 많다. 그리고 물론 그 사이에 얽힌 감정들이 흑백처럼 간단명료하지만도 않다. 하지만 확실한 건, 이민을 통해 이루어진 가족애는 유독 진득하고 그를 이루고 있는 감정들은 그만큼 더 입체적이라는 것이다.


언젠가부터 유독 작아 보이던 부모님의 어깨. 그럼에도 항상 나와 동생을 위해 최선을 다하시던 모습. 나는 나의 부모님만큼이나 자식을 위해 그렇게 큰 마음으로 살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받은 사랑이 너무 커서 어떻게 돌려드려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우리가 잘 살면 그걸로 됐다고 하시지만, 아직 내가 부모가 아니어서인지 나는 그 마음을 다 헤아릴 수 없다.




나는 항상 초조하다. 일 년에 한두 번 뵐 때마다 지나간 세월이 조금씩 흔적을 남기는 부모님의 모습, 내가 옆에서 챙겨 드려야 할 것만 같은데 그러지를 못하니 애만 탈뿐. 속도 모르고 아빠께선 허허 웃음 지으시며 '이렇게 보면 됐지' 하신다. 가끔 엄마께선 조금은 쓸쓸한 웃음을 보이시기도 한다. 엄마의 그 웃음의 뜻을 알고 있다. 나와 같은 마음이실 것이다.


나의 자리에서 나는 행복하다. 살아오며 힘든 적은 있었을지라도 부모님 덕에, 가족 덕에, 그리고 주변 환경덕에 행복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 하지만 가족의 시간이 그저 그립고 아쉽다. 캐나다-프랑스에 흩어져 있는 우리 가족, 이젠 기억 속에서 흐릿해져 가는 한국에서의 대가족과 나누었던 북적북적한 시간들, 그리고 망설임 없이 흘러가는, 우리에게 남은 시간들이.


이미지 출처: Jochen van Wylick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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