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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글펜 설아 Aug 17. 2023

프랑스, 어른시간

코리안 캐나디안 프렌치입니다

최대 2 년 머무르고 돌아갈 거라는 처음 의도와는 다르게 캐나다 본가를 떠나 11 년째 프랑스에 살고 있다. 그 사이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일들이 있었다. 영어만 열심히 쓰던 적응기와는 달리, 점차 프랑스어로도 사교하고 일하게 되면서 나의 틈새는 프랑스와도 겹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나는 프랑스를 캐나다만큼이나 나의 '집'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소중한 집이 된 몽마르트르 언덕

나의 첫 직장이었던 대학교에서 강사직 재계약을 하며 시작했던 석사를 수료한 후, 새로운 대학교에서 함께 일하는 교수님들의 조언으로 박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논문 주제는 이전에 언급했듯 코리안 캐나디안 정체성을 기반으로 한 사례연구를 통해 알아보는 하이브리드한 캐나디안 정체성. 토론토에 거주하는 한인 이민자들로 샘플을 구성해 캐나다의 다문화사회 내 그들의 코리안 캐나디안 정체성 형성 과정과 결과를 연구해 보고 싶었다. 한편으론 내가 유럽권에서 살아가며 만나는 이들에게 나의 정체성, 또 - 다문화주의정책, 영어권-불어권-원주민 정체성, 그리고 캐나다인은 백인이라는 선입견으로 인해 복잡한 - 캐나다인 정체성에 대해 얘기할 때 이 연구가 나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영어권 대학들과는 달리 프랑스 공립 대학들은 등록금이 무료라서 열약한 재정과 환경에 처해 있는 케이스가 대부분이다. 때문에 대부분의 박사학위 준비자들은 펀딩 하나 없이 논문 준비와 일을 병행해야 한다. 물론 나도 예의는 아니었다. 논문을 준비하는 내내 꾸준히 일해야 했다. 박사논문 준비 도중 나는 새로운 대학교에 취직하게 되어 보르도에서 파리로 이사하게 되었고, 파리에서 계약직 교수로 특수목적영어(ESP)를 가르치고 관련연구를 논문 준비와 병행하다가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게 됐다. 그리고 드디어 이번 6월에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박사 학위 취득에만 무려 7 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그 사이 나의 프랑스 생활은 청춘에서 (마음만 아직도 어린) '어른시간'으로 서서히 변한 듯하다. 처음 해보는 독립과 처음 만끽하는 자유에 잠도 미루며 무리 지어 놀았던 몇 년간을 뒤고 하고 새벽까지 노는 파티보다 일찍 만나 일찍 들어가는 저녁약속, 거하게 치르는 생일파티보다 심플하게 치르는 하우스파티, 여럿이서 몰려다니기보다 손에 꼽는 친한 친구들과 시간을 함께 하는 걸 선호하게 되었다.




보르도에서 함께 일하던 교수님 중 한 명의 아들과 연애를 했다. 3 년이 조금 넘는 시간을 함께 하고 결국 헤어졌다. 날 가장 힘들고 지치게 했던 연애. 이별 후에도 교수님과는 연락을 이어가고 있다, 감사하게도.


그 후 파리에서 같이 일하던 동료와 자연스레 만나게 되었고, 그만큼이나 따스한 그의 가족은 금세 내게 프랑스에서의 든든한 울타리, 또 가족이 되어주었다. 어린 나이도 아닌데 처음으로 어른들이 하는 사랑이 이런 걸까? 하고 생각했다. 내가 생각하는 어른연애를, 사랑을, 그와 4 년째 하고 있다.




캐나다에서 대학생일 때 초중급 레벨의 불어 수업을 몇 개 들은 게 전부였기에 프랑스에 도착하고부터 첫 이삼 년 간은 실수를 하는 게 무서워 영어로만 다른 이들과 소통했었다. 영어를 쓰는 게 직업 특성상 어느 정도 가능하기도 했고, 또한 주변 친구들이 직장 동료들이라서 더 그랬다. 하지만 다행히도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레 입도 귀도 조금씩 트이는 경험을 했다. 결국 7-8 년이란 긴 시간이 지나고서야 불어를 능숙하게 한다고 느꼈다. 하지만 역시 내게 가장 편한 언어는 영어와 한국어다.


불어를 배우는 과정을 통해서 외국어를 익히는 데 나이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달았다 - 캐나다에 만 열 살 때 도착해서 영어를 습득하는 데엔 2 년밖에 걸리지 않았는데. 훗날 엄마가 된다면 아이에게 한국어를 어릴 때부터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프랑스에 있는 동안 나의 시간이 끊임없이 흐르는 만큼, 한국과 캐나다에서의 시간도 그러했다. 매번 볼 때마다 나의 친구들도 각자의 자리에서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고, 나의 가족들, 특히 부모님과 조부모님의 얼굴에는 지나가는 세월이 눈에 띄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세 가족 일원들을 잃었다. 양가 할아버지들과 우리 집, 나의 강아지. 옆을 지키지 못한 소중한 이의 죽음이라는 건 상상했던 것 보다도 배로 힘들고 무서운 것이었다.




프랑스에서 엄연한 사회 일원으로 일도 공부도 사교도 연애도 열심히 해왔다. 그동안 참 많이 행복하기도 힘들기도 했다. 캐나다에서였다면 경험하지 못했을 수많은 일들과 만나지 못했을 수많은 이들이 나의 프랑스에서의 기억들을 수놓는다.


동시에 나의 틈새는 더 미묘하게 복잡해졌다. 나에게 '집'이란 관념은 한 군데에 묶여 있지 않았고, 또한 난 멀리 떨어져 있는 가족에 대해 유난히 애틋해졌다. 게다가 나 자신을 예전처럼 코리언 캐나디안이라고 하기엔 캐나다에 있는 내 한인 이민자 친구들이나 나의 박사논문에 쓰인 샘플과 난 더 이상 닮기만 한 건 아니었다. 부모님께서 원하시는 '현지 사회에 잘 융합되어 있지만 여전히 한국인인 딸'과도 어느 정도의 거리가 생긴 것도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온전히 프랑스인이 된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세 나라와 문화, 그에 관련된 수 없이 많은 기억들 사이에서 나의 - 척 보기에는 거추장스럽게 느껴질 질 수 있는 - '코리언 캐나디안 프렌치'로서의 정체성은 이루어졌고, 결국 어느 한 곳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지만 동시에 모든 곳에 묻어나는 그런 감성이 마음에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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