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온전히 가족에게서 독립한 나의 새 터전이었고, 이곳에 뿌리를 내려가면서야 나는 조금씩 어른이 되기 시작한 것 같다. 캐나다에서 그저 무난한 1.5세대 한인 이민자의 삶을 살았다면, 프랑스에서는 달랐다. 내 주변에 한국인은 손에 꼽을 정도로 없었다, 처음 적응기를 빼고는 꾸준히. 대신, 이번엔 정말 무난한 영어권 expat(외국인 거주자)의 삶을 살며 적응기를 보냈다.
영어가 능숙했기에 이점이 많았다. 이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내가 동양인이지만 영어가 능숙하고, 또 캐나다에서 왔다는 걸 신선하게 여겼고 나에게 대체로 호의적이었다. 적응기 때에는 직장, 그리고 사교생활을 주로 영어로 했기에 소통 문제로 크게 고생한 적도 없었다. 그렇다고 편하기만 했던 건 아니었다. 영어를 능숙하게 한다는 건 분명 이득이었지만 그렇기에 불어를 익히는 경과가 더디었다 - 불어를 편하게 하는 것만 4-5년 정도 걸렸던 것 같고 능숙해지는 것은 7-8년 정도 걸린 것 같다. 하지만 불어를 잘하고 말고를 떠나, 결국 나는 이곳에서 '외국인, ' 또는 1세대 이민자였다.
한국에서 10년 살고 캐나다에서 12년, 그리고 이곳 프랑스에서 거주한 지 올해로 벌써 11년 차 - 프랑스 국민이 된 지도 3년 차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의 삶에서 프랑스는 조금씩 더 큰 의미를 띠어 가고 있다. 특히나 부모님께서 토론토를 떠나시고 우리 집 강아지가 우리 곁을 떠나며 캐나다에서의 나의 '집'이 조금은 추상적인 형태로 머릿속에 자리하면서 더 그렇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을 때, 아빠께서는 좀 더 큰 세계를 경험한 후에 정착하라며 내 등을 떠밀으셨다. 마침 운 좋게도 내가 졸업 예정이었던 대학교를 통해 보르도에 있는 대학교에 영어 강사로 선발되었고, 최대 계약 기간이 2 년이었기에 프랑스에서 딱 그 기간만 살고서 당연히 다시 캐나다, 나의 집으로, 나의 가족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프랑스로 떠나기 전, 무사히 출발 이전에 비자를 받고 보르도에 머무를 아파트를 계약해 두었다. 원래 유럽에 은행 계좌나 보증인이 없는 이방인은 집을 계약하기가 굉장히 어렵다. 하지만 지방정부에서 지원해 주는 학생들이나 젊은 직장인들을 위한 공공지원주택을 인터넷으로 찾게 되었고, 그쪽에서 내 편의를 봐주어 유럽 계좌나 보증인이 없는데도 새로 보수 공사를 한 건물에 입주할 수 있게 되었다. 동네도 시내이고 전차만 타면 일하게 될 대학교도 쉽게 통학이 가능해 이상적이었다. 그저 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토론토에서 파리로 떠나던 그날을 기억한다. 오후 비행기라서 시간이 여유 있었고, 아침에 강아지와 긴 산책 후 뒷마당에 함께 앉아서 초조해하며 시간을 보냈다. 공항에 강아지도 함께 와 온 가족이 날 배웅할 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머쓱하게 서 있던 남동생을 제외한 엄마와 나, 심지어 아빠까지 울음보가 터졌다. 아빠께선 잘 다녀오라며 손수 쓴 편지를 내 손에 쥐어 주셨고, 우리 강아지는 엉엉 우는 내 품에서 맨 마지막에야 동생 품으로 옮겨졌다. 아빠께서 써주신 편지를 보고 비행기에서 한참을 울어서 옆에 친절한 여자애가 초콜릿을 주고 말벗을 해주었던 기억이 난다.
파리 공항에 도착했을 땐 아무 생각이 없었다. 짐 네 개를 어찌어찌 몸에 지고서 파리 시외 기차를 타고 몽파르나스역에 도착, 보르도에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기차에 앉자마자 온 피곤이 몰려오는 듯했다. 금세 시간이 흐르고 목적지에 도착해 기차역 앞 택시를 대강 잡아탔다. 내가 계약한 아파트는 아직 보수 공사 중이라 그다음 날까지 입주할 수 없었기 때문에 미리 예약해 두었던 호텔로 향했다.
달리는 택시 안, 숨을 고르 잡고 창밖의 보르도 가론 강 풍경을 보고서야 내가 유럽에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목적지에 도착해 내린 곳은 보르도 시내의 심장 부위, 대극장(Grand Théâtre) 앞 Place de la Comédie였다. 그 당시 피곤함도 잊고 느낀 황홀함은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2012년 8월 30일,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홀리듯 찍은 첫 보르도 사진
하지만 당시엔 난생처음 마주하는 프랑스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새도 없이 바빴다. 호텔 체크인을 하고 나니 벌써 오후 두 시가 넘었었고, 네시에 은행에서 약속이 있었고 핸드폰 개통도 해야 했다. 거기다 저녁 일곱 시 즈음엔 같이 일하게 될 동료들과 다 같이 만나기로 계획돼 있었다. 정신없는 하루였지만 쉴 틈 없이 설레었다.
나의 집이 될 아파트에 입주한 날을 기억한다. 밖에서 본 건물부터 참 유럽 냄새가 나는 듯했다(?). 새로 보수작업을 마친 건물이라 참 깨끗하고 아름다운, 돌로 만들어진 건물이었다. 우리 집은 2층, 한쪽 창 밖으로 조그마한 교회가 있는 광장이 보였다. 아릅답지만 낯선 나라에서 생긴 나만의 공간, 난생처음 가져보는 나의 집. 내가 그 집을, 그리고 창밖의 풍경을 사랑하게 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새로운 나의 집 창 밖으로 보이던 풍경
대학 영어 강사직,* 첫 직장이었다. 풀타임임에도 일주일에 수업하는 시간이 열다섯 시간 즈음 밖에 되지 않았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아르바이트를 하며 공부를 하는 대학생이었는데, 갑자기 그렇게 꼬박꼬박 월급을 받으며 시간이 여유로운 것이 참 어색하고 낯설었다. 교사나 교수가 아닌 강사라서, 또 우리 부서에 동료 강사들이 많아서 가능한 여유였다. 그도 그럴게 함께 일하는 영어 강사들만 해도 열한 명이었다 - 영국, 아일랜드, 캐나다, 미국, 트리니다드 토바고 등, 출신도 다양했다. 강사직은 재계약을 할 시 한 번만 할 수 있도록 계약서에 명시되어 있었다. 교수님들과 그 해가 재계약 해였던 일 년 선배 동료들은 막 대학을 졸업한 우리들을 상냥하게 지도해 주고 도와줬다.
(*여기서 칭하는 강사직은 프랑스 대학직 Lecteur/Lectrice를 칭하는 것임을 통지합니다. 저는 다른 나라에서의 대학 강사직에 대한 견해가 없습니다.)
우린 외로울 틈도, 심심할 틈도 없었다. 항상 일하고 놀고, 방학에는 함께 여행을 가곤 했다. 당시 우리와 우리가 가르치는 학생들 사이엔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 않았기 때문에 때때로 그들과 함께 어울리기도 했다. 난생처음으로 느껴보는 (통금 없는) 자유에 열심히 놀고 청춘을 만끽했다. 첫 해에 워낙 놀아서 오죽하면 2 년 차 재계약을 할 때, 시간을 그래도 노는 것 말고 의미 있게 써야 하지 않나, 싶어서 '영어권 언어와 문화에 관한 연구 (Anglophone Studies)'라는 명칭의 석사를 시작했을 정도였다. 그렇게 안일한 생각으로 시작한 석사였지만 결국엔 참 하길 잘했다, 싶었다. 캐나다 영어권 사회 내 한인 이민자들의 영어 습득과 한국어 유지가 그들의 정체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연구할 수 있었고, 후에 주변 교수님들의 격려로 인해 자연스레 석사를 이어 박사를 시작하게 됐기 때문이다.
프랑스에 도착하고 처음으로 타지에서 맞는 새 해에 캐나다에 있는 남자친구가 이별을 고했다. 1년까지는 기다릴 수 있지만 2년은 못 기다리겠다는 점에서 처음부터 좁혀지지 않았던 의견차이 때문이었다. 그렇게 내 인생 첫 연애는 끝이 났다. 오랜 시간을 만난 것에 비해 허무하게 헤어진 것 같아서 많이 서운했다.
직장 동료들과 편한 친구가 되는 게 그저 쉬웠던 건 아니다. 나를 제외한 새로 일을 시작하는 강사들은 거처를 구하지 못한 채 보르도에 도착했기 때문에 재계약한 동료들의 집이나 다른 친분 있는 사람들의 집에서 신세를 지고 있었다. 막 도착한 동료들 중에서 이미 거처가 있던 건 나 혼자였고, 그들이 항상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에 대한 소외감이 들었다. 거기다 때때로 '나는 영어권 나라에서 왔는데도 다른 영어권 애들하고 다르구나, '하는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70-90년대 영화, 음악이라던가 하우스 파티 후 bar/pub hopping (bar이나 pub을 줄줄이 가는 것), 그 후 또 애프터를 가서 밤을 쫄딱 새우며 술 마시고 노는 그런 '백인 문화'가 익숙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얘기였다 - 내가 캐나다에 도착한 2000년, 그때 알게 된 Back Street Boys, Britney Spears, Christina Aguilera, N'Sync 등이 나의 '백인문화' 음악에 대한 관심의 초창기였고, 그 후 고등학교 시절은 아예 한국 문화에만 치우쳐 보냈으니. 내가 캐나다에서 태어난 캐나다인이었다면 이런 이질감은 느끼지 않았겠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관심사와 문화를 공유했던 토론토에 있는 내 친구들이 참 그리웠다.
하지만 한 달 정도가 지나며 친구들이 하나 둘 자기 거처를 찾고 서로가 서로에게 점차 익숙해지며 깨달았다. 내가 그들의 문화에 대해 흥미가 있는 만큼 그들도 나의 문화에 대해 흥미가 있구나, 굳이 내가 캐나다인이라서가 아니라 코리안 캐나디안인 나를 내 친구들은 그저 좋아해 주는구나, 하고. 처음으로 외국인들은 대체로 캐나다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는 걸, 그리고 유럽권에서는 한국을 신선하게 바라본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게 새 친구들과 서로의 문화에 대한 관심, 그리고 타지에서 독립해 겪는 경험들을 공유하며, 우린 서로에게 친구이자 가족이 되어 주었다.
또한, 첫 해, 함께 일하던 교수님께서 한국인 교수님이 계신다며 다리를 놔주셨다. 그 덕에 한국어를 배우던 나의 또래 프랑스 학생들과도 알게 되고 그들과 친구였던 몇몇의 한국인 교환학생들과도 친해졌다. 강사 직을 마친 후 교사로 일하게 된 다른 보르도 대학교에서는 내 반에 한국인 교환학생 두 명이 배치가 됐다. 그때 알게 된 한국인 친구들과 나는 서로가 서로를 신기해했다 - 그들에게 나는 먼 나라 프랑스에서 한국말을 한국사람처럼 하는 캐나다 교포였으며 나에게 그들은 보기 드문 진짜 한국인(?)이었다. 그들은 참 좋은 사람들이었고 우리는 잘 어울려 시간을 보냈다. 그 후로는 프랑스에서 살며 한국인들과 접촉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때 알게 된 인연들은 더욱이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프랑스에서의 첫 한 해가 지나갈 때 엄마 아빠 동생이 보르도로 찾아왔다. 부모님께서는 내가 잘할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잘 자리를 잡고 생활하고 있는 걸 보니 놀랍다고 말씀하셨다. 인정받은 것 같아 뿌듯하고 기뻤다.
프랑스에서는 엄마 아빠가 하셨던 것처럼 나도 나의 터전을 내 손으로 일구어야 했다. 처음으로 가져본 나의 직장에서 내가 맡은 일을 잘하는 것도, 또 나같이 단기간으로 타지 생활을 하고 있는 직장 동료 친구들을 매일같이 만나 사교하는 것도 다 처음이었다. 더구나 프랑스에서 행정 관련 서류 처리를 하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 경험하는 수준의 속 터짐이었다. 하지만 모든 게 신선했고 그렇기에 그저 즐거웠다. 처음 프랑스에 올 때만 해도 짧으면 1년, 많아봤자 2년일 거라고 생각했던 타지생활이었기 때문에 모든 게 그저 조금 있으면 깰 꿈같기도 했다.
짧고도 긴 프랑스 적응기. 참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끊임없이 사교했지만 나에게 당시 가장 중심이 되었던 그룹은 나같이 영어권 나라에서 와 타지생활을 하는 친구들이었다. 새로운 환경에서 하는 경험들과 공용 언어, 영어를 기반으로 우리 사이에 공통점이 있던 만큼, 적응기 초반에는 동양권-영어권 문화차이로 인해 그들과 나 사이의 틈새를 느끼고 그로 인해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새로운 현상이 아니었다 - 꾸준했던 문제를 직시할 수 있던 것뿐. 그로 인해 틈새를 넘어 그들과 교류할 수 있었고, 그 결과는 값졌다. 덕분에 외롭지 않게 독립과 자유, 청춘을 경험하며 더 다양한 문화들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