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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글펜 설아 Aug 15. 2023

캐나다 고등학교, 우리의 자리

카페테리아 한편에 위치한, 우리가 만들어낸 작은 한국 사회

캐나다로 이민 후, 초등학교 때만 해도 반 친구들과 골고루 잘 어울렸지만 사춘기 때 한국애들하고 가까이 지내게 된 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그저 무난한 1.5세대 한인 이민자로 자라며 캐나다 사회 내에서 '우리'가 소수 인종 집단인 한인 이민자이자 이민자의 자식이라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식별하게 되었고, '1세, ' '1.5세, ' '2세' 같은 호칭을 익히며 토론토 한인 사회 내 서로를 구분하고 분류하기 시작했다. 이는 특히 고등학교로 진학하며 두드러졌다. 




고등학교 때 내 친구들은 대부분 1.5세 한국인들이었다. 한국어를 할 수 있고 '한국애같이' 옷을 입고 화장을 하고 머리를 하면 당연스레 같은 반에 있는 한국인들과 어울리게 되었고, 반에 한국인이 없는 경우엔 점심을 먹거나 쉬는 시간에 모일 수 있는 공간인 카페테리아 앞이나 심지어는 복도에서 다른 한국인들에게 스카우트(?) 당하기 십상이었다. 소수의 '2세같이 생긴' 1.5세 - 여자인 경우 두껍게 아이라이너를 그리거나 가슴이 부각된 끈나시티라던지 남자인 경우 힙합 스타일로 옷을 입는 - 애들은 1.5세로 쳐주지 않았고, 그들도 자연스레 2세들과 교류하거나 다른 인종들과 섞이곤 했다. 우리에게 그들은 화이트워싱(백인화 된, 백인으로 탈바꿈한)되어 우리랑은 다른 애들이었고, 그들과 '외국인'들에게 우리는 FOB(Fresh Off Boat, 배에서 내린 지 얼마 안 된, 이민 온 지 얼마 안돼 융합하지 못한)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1.5세 한인들이 꽁꽁 뭉쳐 놀게 된 데에는 분명 카페테리아의 영향이 크다.




고등학교 9학년 첫 학기, 새로운 환경에 익숙지 않은 학생 수. 초중학교(캐나다의 초학교는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있거나 8학년까지 있기도 하고, 중학교 개념으로 7학년부터 9학년까지 있기도 하다)에서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은 다른 고등학교로 진학했었다. 덕분에, 대부분의 캐나다 고등학교처럼 우리 학교에서도 한 교시 한 교시 수업에 따라 교실과 반 친구들이 바뀌었는데, 정신없이 반을 찾아 아침 수업들을 듣고 나니 금세 점심시간이었고 나 혼자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카페테리아 쪽으로 걸어갈 땐 거의 패닉 상태였던 것 같다. 그렇게 초조해하며 도착한 카페 입구 쪽에 한국 여자애들 몇 명이 보였다. 금세 다가가 덥석 붙잡고 '한국인이세요?' 물었다. 그날을 시작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우리는 다른 그룹에서 친구를 사귀더라도 항상 우리끼리 같이 카페에 앉았고 학교 밖에서도 교류했다.




나의 고등학교 카페테리아에는 들어가자마자 옹기종기 모여 앉은 그룹들이 눈에 띄게 갈라져 있었다. 처음 들어가면 바로 보이는 테이블은 주류그룹 - 즉, 잘 노는 백인 애들과 몇몇의 유색인종 애들 - 이었고, 그들의 테이블을 지나 더 들어가면 고루 섞여있는 테이블, 중국애들 테이블, 한국인 테이블, 이란인 테이블, 동양인 테이블, 또는 일명 오타쿠 테이블이나 emo 테이블, 고딕 테이블이라던지, 카페에 앉아있는 모든 애들은 각자 자기만의 그룹과 지정된 테이블이 있었다. 서로 사이가 안 좋거나 한건 아니었지만 카페에 들어가는 순간 자기 그룹과 앉아야 한다는 그런 암묵적인 룰이 있었고, 그 그룹은 대부분 학우들 사이에 인기라거나 취미생활이나 옷 입는 스타일, 또는 인종별로 정해지는 게 대부분이었다. 몇몇은 테이블을 왔다 갔다 하며 바삐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놀기도 했지만, 그들은 소수였다.


우리 고등학교 카페 내 한인 학생들 테이블은 맨 뒤쪽에 위치한 비상출구 쪽이었고 규모가 큰 편이었다. 적어도 긴 테이블 네 개는 우리의 구역(?)이었던 것 같다. 그 속에서도 학년별로 따로 앉는 자리가 있었다. 꼭 자리에 앉기 전에 선배들이 있으면 꾸벅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해야 했고 선배들이나 학년을 꿇은 언니 오빠들에게 얘기할 땐 대부분 존댓말을 써야 했다. 굳이 선배들이 무섭다거나 한건 아니었지만, 처음 학교에 들어가 한인 그룹에 속하게 되면서 너무나도 자연스레 몸에 익게 되는 그런 행위였다.


우리 학교 한인 학생들의 최대 관심사로는 평범했다: 축구, 연애, 가요, 그리고 불법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다운로드하여 보았던 한국 영화, 드라마, 예능 등. 남자 애들은 날씨가 좋으면  쉬는 시간이나 방과 후 자기들끼리 팀을 짜 축구하거나 다른 학교 한국인들과 경기하기 바빴고, 여자애들은 카페에 앉아 열심히 수다를 떨고는 했다. 방과 후, 또는 주말에 한인타운에서 약속을 잡고 한국식당에서 밥을 먹거나 노래방에 가는 건 거의 일상이나 마찬가지였다 (나의 부모님을 포함한 몇몇의 부모님께서는 캐나다까지 와서 한국애들이랑 한국스럽게 논다며 언짢아하셨지만). 기독교가 아닌 애들도 한인 교회에 나가기도 했고, 나도 그랬다 - 굳이 종교적인 이유가 아니더라도 한국어부에 속함으로써 네트워킹 가능성은 더 커졌고 일요일이 재미있어졌기 때문에. 한국인끼리 같은 학교 내에서 사귀거나 교회, 또는 한인타운을 통해 네트워킹 하다가 만나 교제하게 되는 건 흔했다. 아니, '외국인'과 연애를 하는 1.5세는 없었다. 우린 우리끼리 노는 게 제일 재밌었고, 고등학교 생활은 대체로 즐거웠다.


흔히 '핀치'라고 불리는 토론토 한인타운. 이미지 출처: Leventio / Wikipedia Commons




나의 첫 남자친구는 고등학교 마지막 학년인 12학년에 만나기 시작해 프랑스로 떠날 때까지, 꽤나 긴 5-6년을 만났다. 그 친구는 나와 같은 1.5세대 한인 이민자이지만 중학생일 때 이민을 와 고등학교로 편입해 영어 때문에 많이 힘들어했다. 때문에 난 그 애의 영어 작문 과제라던가 이런저런 걸 자주 도와주곤 했다. 내가 그 애를 도와주고 아니고를 떠나서 그 친구의 부모님, 특히 어머니께선 나에게 굉장히 잘해주셨다. 하지만 우리 아빠께서는 내가 캐나다 사회에서 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을 안 만나지는 못할망정 내가 도움을 줘야 하는 사람을 만난다며 언짢아하셨다. 꽤나 힘들었다 이 갈등 때문에.




그룹 내에서도 '우리'는 더욱 세심히 갈렸다. 제일 먼저, 무리에는 1.5세 이민자도, 유학생도 있었다. 1.5세대 애들은 대부분 한국에 몇 년에 한 번 갈까 말까 하는 경우가 다반사였지만 유학생들은 달랐다 - 그들은 많이 가면 방학마다, 덜 가면 일 년에 한 번쯤은 한국을 다녀왔기 때문이다. 카페에 모여 유학생들의 한국에 대한 얘기를 듣는 건 재미있기도 했지만, 나와 같이 거의 한국에 가지 않던 애들에겐 묘한 소외감을 느끼게 하고 우리가 잘 모르는 한국에 대해 갈증 나게 했다. 이민자들에 비해 자유롭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유학생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함께 어울리면서도 차이점을 느끼고는 했다. 또 우리는 언어능력으로 나뉘었다. 유학생들은 대부분이 중고등학교에 캐나다에 와 한인들하고만 교류한 탓에 영어를 거의 못하거나 어눌하게 하는 게 대부분이었고, 나 같은 1.5세대들 중에서도 중학교 즈음에 이민을 온 애들이나 초등학교 때 왔음에도 처음부터 한국애들하고만 놀았던 소수는 영어에 자신 없어했다. 그중엔 워낙 한국인끼리 뭉쳐 고등학교를 다닌 덕에 자신의 영어능력이 떨어진 것 같다던 친구도 있었다.


그때 그 그룹을 통해 집 밖에서 배운 한국의 '정'문화는 포근한 면도 있었지만 그만큼이나 부담이 되기도 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자연스레 한인 그룹에 속하게 되면서 한국인은 함께 꼭 뭉쳐야 한다고, 우리는 한인그룹 밖 다른 애들과 섞이지 못할 거라고 자동으로 생각하게 되었던 것 같다. 같은 반에 한국인이 없으면 다른 애들하고 앉아 교류하며 그룹 과제도 해야 했고, 그렇게 다른 그룹과 친해지더라도 카페에서는 우리 그룹, 한국인들과 앉아야 했던 것이다. 거기다 영어를 잘하는 1.5세는 같은 수업을 듣는 영어를 잘 못하는 유학생이나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는 1.5세를 도와줘야 한다고 당연시되어 그룹 내에 갈등이 있기도 했다. 정 때문에 한인그룹은 우리에게 소중했고 중요했다. 동시에, 정 때문에 그룹의 어딘가가 불편했다.




내가 가장 친했던 친구들은 대부분이 나와 가장 비슷한 애들이었다. 소수를 제외하곤 초등학교 때 이민을 와 영어에 능숙했고 음악부에 들었으며, 통금이 있었고 얌전한 편이었다. 영어를 못 해 항상 도움을 묻거나 요구하던 한국인들 중 몇몇 무리한 부탁을 하거나 그룹과제를 떠넘기는 이들을 상대하며 느끼는 스트레스도 공유했다. 나와 결이 비슷한 고등학교 동창들 중 한 명은 나와 같은 대학에 같은 전공으로 진학을 하고 졸업하게 되어 지금까지도 가장 친한 친구 중 하나이다. 그녀와 나는 고등학교 때만 해도 항상 한국어로 교류하다 대학에 들어가며 점점 영어를 쓰기 시작했다. 현재 우리의 대화는 99%가 영어다. 다른 고등학교 동창들을 보면 다 다르다 - 여전히 한국어를 많이 쓰는 친구들도, 우리처럼 영어를 많이 쓰는 친구들도 있다. 1.5세대 이민자들이 그렇다. 얼마나 일찍 이민을 왔는지, 주변 친구들이 어떤지 등, 수많은 요소들로 그들의 언어와 문화 능력이 정해진다. 공통된 점은, 사춘기의 피크인 고등학교 때, 다문화의 학우들과 눈에 띄게 갈라진 그룹들 사이에서 우리는 꼭 한국인이어야 했다는 것. 


그렇다고 해서 '외국인' 친구들이 없던 건 아니었다. 놀이공원, 맥도널드, 커피숍, 브랜드 샵 등 아르바이트 경험이 꽤 많았는데, 그를 통해 만난 친구들 대다수가 캐나다인이었다 - 주로 백인 이민자이거나, 유색인종이라도 2세이거나 완전히 화이트워싱 된 친구들. 하지만 나의 가장 친한 친구들 대부분은 서로 많은 경험들을 공유하는 1.5세 한인 이민자 친구들이었다.




분명 캐나다 고등학교를 다니며 한국인으로 세월을 보낸 데엔 이점도 단점도 있었다. 하지만 그 경험 덕분이다, 내가 이만큼 한국어를 할 수 있고 문화를 이해하는 것은. 고등학교 때 우리에게 가장 가깝게 느껴졌던 건 우리 부모님 그리고 우리의 모국 문화였으며, 그걸 발판 삼아 '우리'라는 그룹에 속한 것은 사춘기를 겪으며 불안정한 그 시절 우리의 중심을 잡아주기에는 충분했다. 또한, 그 경험들로 인해 한국인들은 '우리' 그룹이라 해도 서로 결이 맞고 안 맞고 한 차이가 꽤나 크다는 걸 알게 되었다. '유학생, ' '한인 이민자, ' 또 '1세, ' '1.5세, ' '2세'라는 딱지를 서로가 서로에게 붙였다. 동시에 우리는 그룹 내에서의 룰에 너무도 자연스레 맞춰 고등학교 생활을 했다. 토론토 한인사회는, 한국인들은 이렇구나 하고, 그렇게 누가 어떻게 시작하게 된 건지도 모를 작은 사회에 속해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그 작다면 작은 그룹 내에서도 자잘한 분열이 많았음에도 모두 비슷한 척, 모두 비슷한 듯, 그렇게 지냈다.


재미있는 점은, 캐나다에 살면서 나는 그저 내가 그렇게 한인들과 교류하며 사는 게 당연한 줄로만 알았다는 것이다. 너무 자연스레, 물 흐르듯 만나고 친해진 사람들과 익숙해진 커뮤니티. 집에서는 조부모님과 통화할 때는 물론이고 엄마 아빠와 한국어를 쓰고 꼭 하루에 한 번은 한식으로 식사를 했으며, 나는 '한국인이기 때문에, ' 또 '여자애니까' 이걸 하면 안 되고 저걸 하면 안 되고 등, 한국식 발상을 강요받을 때도 있었다. 동시에, 부모님께선 나는 어렸을 때 이민을 왔기 때문에 캐나다 사회에 완벽하게 융합하길 기대하시기도 했다. 다른 몇몇의 친구들 부모님들만큼은 아니었지만, 부모님의 영어 체크라던지 행정처리라던지 자잘한 도움도 당연시되기 십상이었다. 물론 나도 부모님이 나와 동생을 위해 많은 걸 포기하고 고국을 떠나 낯선 영어권 땅에서 많은 고생을 하심을 알기에 당연하다 여겼다,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을 돕는 것이. 


캐나다에서 발생한 나의 틈새는 꽤 여러 군데였고 세심했다. 한인 이민자들 사이에서 나는 1세대인 부모님 세대와 2세대인 화이트 워싱 된 세대의 사이에 위치한 1.5세대였고, 젊은 세대 중에서도 '진짜 한국인'('Korean Korean')인 유학생, 교환학생들과 2세대 사이에 위치한 1.5세대였으며, 동시에 캐나다 사회 내에서는 1세대 이민자들과 주류 사회의 사이에 위치한 이민자들의 자식이었다. 하지만 무한의 사랑으로 우릴 위해 희생하신 부모님과 사랑하는 동생과 강아지, 또 나와 비슷한 1.5세대 친구들과 몇몇의 '외국인' 친구들, 그리고 오래 만나온 남자친구가 있었기에 나는 만족하며 안주했고, 나의 틈새가 나에게 어떠한 한계를 드리우고 있는지 당시 깊이 생각해 볼 의지도, 겨를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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