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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글펜 설아 Aug 13. 2023

한국에서의 기억

기억하고 추억하는 내 유년기의 '모국'

나에게 '모국'이라는 단어는 좀 생소하다.

한국은 내가 태어난 나라, 또 나의 초등학교 시절이 떠오르는 곳이며, 대가족의 시간이 고스란히 담긴 곳이다. 만 열 살에 캐나다로 이민을 간 나는 고작 여섯 살이었던 남동생보다는 좀 더 많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렇대도 나의 한국에서의 삶은 초등학교 5학년에 멈추어 있기에, 30대의 나에겐 '모국'이라는 단어 자체가 조금은 무겁고 낯선 것이다. 영어로 번역을 해보아도 'motherland'가 되어 버린다. 나에게 한국은 motherland인가? 하지만 현재 프랑스에 거주하며 떠올리는 나의 유년기는 캐나다에서 더 또렷하고 다양하게 기억되는 것을.




이민 전 한국에서의 기억, 하면 친가 조부모님과 살던 때가 가장 많이 생각난다. 어렸을 때부터 나와 동생은 양가 조부모님 중 특히 친할아버지 친할머니를 참 많이 따랐고, 두 분은 우리를 참 많이 예뻐해 주셨다. 엄격하신 친할아버지께서도 우리에게는 장난도 많이 치시고 참 너그러우셨다. 할머니께서는 맞벌이하시는 엄마 아빠와 떨어져 지내는 우리가 안쓰러우셨는지 얼마나 애지중지하며 키워주셨는지 모른다. 매일 밤 나와 동생은 할머니 양쪽에서 팔을 베고 잠들었다. 팔이 저리기도 많이 저리셨을 텐데 단 한 번도 마다 하신 적이 없다. 교사 출신에 수필가이신 할머니께선 책을 자주 사주시고 학교 공부도 꼼꼼히 체크해 주셨고, 교수 출신에 화가이시던 할아버지께선 화실에 자주 데리고 다니시며 우리가 그린 그림을 항상 소중하게 간직하셨다. 덕분에 한국에서 살 때는 공부하는 것, 또 그림 그리는 것이 일상이었고 즐겨하기도 했다.


휴일이나 명절엔 양가 가족과 함께 식사도 하고 친할아버지의 화실 정원에서 시간을 보내던 기억이 있다. 명절마다 여럿이서 모이는 건 그저 당연한 줄 알았다.


할아버지의 화실


지금은 많이 바뀌었다고들 하지만, 그때 90년도의 방과 후는 꽤나 느슨했다. 방과 후 서예부, 자수부에서 활동한 기억, 동네 친구들하고 놀다가 저녁때 즘이면 저녁 먹으러 집에 가던 기억이 있다. 다니던 학원은 피아노 학원뿐이었다.


그 당시엔 개그콘서트가 인기였다. 만화 프로그램으로는 포켓몬, 세일러문 등 참 많았다. 가수 중에선 SES, 핑클, 신화, HOT가 인기 있었고, god도 '어머니께'와 육아일기 프로그램으로 인지도를 쌓고 있었다. 그중 난 SES의 바다, HOT의 강타, god의 손호영을 좋아했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너 어제 개그콘서트 봤어?' '넌 SES에서 누가 좋아?' 하며 수다 떨곤 했다.




틈새는 그 어린 나이에도 분명히 겪었을 것이다, 당시엔 잘 인지하지 못했을지는 몰라도. 달리기를 잘하는 아이들과 아닌 아이들,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과 못하는 아이들,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들과 못 그리는 아이들, 옷을 잘 입거나 외모가 특출 나서 인기 있는 아이들과 그렇지 않은 아이들, 개그 콘서트 등 유행을 잘 따라가는 아이들과 아닌 아이들, 등. 반 친구들 사이에서 난 그저 그럭저럭 사교하며 친한 친구 한두 명과 짝지어 다니는, 조용하고 얌전한 편인 아이였다. 인기가 많은 친구들과 아닌 친구들 사이에서 딱 그 중간이지 않았을까, 싶다. 굳이 특이점을 뽑자면 할머니께서 가시는 미용실에서 삼각김밥처럼 뽀글이 파마머리를 자주 하곤 했다는 것.


그때 즈음 친구들과 사교하며 반 친구들 중 나의 위치에 대해 식별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특히 반에서 흔히 겪던 왕따를 목격하고 경험하면서. 얼굴도 예쁘고 옷도 잘 입었던 여자 아이가 3학년 또 4학년 우리 반에 각각 한 명씩 있었다. 그 애들은 그저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이유로 반에서 여자애 한 명을 지목해 일주일간 다른 애들에게 어울리지 말라고 하곤 했다 - 요즘 뉴스에 나오는 학교 내 괴롭힘 사건들에 비하면 귀여운 정도이지만. 나름 공평하게(?) 한 명 한 명 돌아가며 지목해 대는 통에 나도 일주일쯤 투명인간 취급을 받았었다. 그렇게 3학년 4학년을 보내며 나름대로 요령이 생겨서 가장 친한 친구들 한두 명과 꼭 붙어 다녔다. 이렇듯, 어린 나이였음에도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그런 애매모호한 상황이나 위치를 인지하며 항행했던 것 같다.




어느 날 갑자기 아빠께서 '우리 이민 가면 어떨까? 캐나다로, ' 하고 나에게 넌지시 얘길 꺼내셨다. 그게 어디냐고 물으며, 멀리 가면 할아버지 할머니를 못 보지 않느냐고 했더니 비행기 타고 와서 뵈면 된다며 안심시켜 주던 아빠의 답이 기억난다. 캐나다로 가면 내가 원하는 대로 강아지도 키울 수 있을 거라고 말씀하셨다. 이민 붐이 불었던 2000년대, 나와 동생을 영어권 국가에서 교육시키고 싶어 하시던 아빠께서는 이민 허가가 떨어지자마자 나에게 그렇게 물어보셨던 거였고, 그렇게 별 실감도 나지 않은 채 어디 먼 나라로 가는가 보다, 하고만 이해했다.


할머니와 큰엄마께서는 우리 가족이 캐나다로 떠나기 몇 주 전 우리 반 친구들을 불러 내 생일 파티 겸 송별회를 열어 주셨다. 그 어린아이들이 뭘 안다고 고맙게도 선물들과 편지도 주고 서운하다며 눈물도 흘렸다. 그로 머지않아 맞은 학교에서의 마지막 날을 기억한다. 여름방학 바로 전날, 담임 선생님께서 내가 멀리 캐나다로 떠나기 때문에 그날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고 반 아이들에게 알리셨다. 참 아쉬웠던 작별 인사.


집을 떠난다는 게 정말 실감이 나기 시작했던 건 아마 할아버지 할머니와 작별할 때였다. 우리가 떠나기 바로 전날 밤, 할머니의 팔을 베고 들었던 나지막한 목소리가 기억이 난다. '이제 가면 언제 또 이렇게 내 품에서 잘래.' 그날 할머니는 잠들지 못하셨던 것 같다. 떠나는 날 아침, 아파트 주차장에서 울음보가 터진 나와 동생, 그리고 할머니, 또 먹먹한 눈빛으로 우릴 그윽하게 바라보시던 할아버지가 생각난다. 그렇게 차를 타고 떠났고, 그 뒤로 어떻게 캐나다에 도착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모국'하면 떠오르는 기억들은 크게 잡아 이게 다다. 한국에서 온 가족에게 감사할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래서 한국은 나에게 '고향'의 한 부분이지만, 무엇보다도 가족과의 추억들이 무수한 곳이며, 내게 가장 소중한 가족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나에게도 참 의미 있는 곳이다. 또 인간관계에 있어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겉돌지 않을 수 있는지 조금씩 배워가기 시작한 곳. 이렇게 나의 기억을 나열해 보고 나서야 다시금 깨닫는다 - 단어 자체는 생소할지라도 나에게 한국은 모국이 아닐 수가 없구나, 하고.


한국에서의 내 어린 날의 기억이 이 정도로 요약될 수 있다는 게 아쉽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한국에서의 내 유년기는 현재의 내게도 큰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가 담고 있는 나의 기억들은 나의 베이스, 내 정체성의 토대일 것이다. 일반적이지만은 않은 틈새가 생기기 전의 시간, 그리고 틈새의 시작점이 고스란히 기록된 나의 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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