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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글펜 설아 Aug 14. 2023

우리 집, 캐나다

1세대 이민자의 자녀이자 1.5세대 이민자가 기억하는 적응기

한국-캐나다-프랑스 틈새에 위치한 나에게 한 가지 확실한 건 캐나다는 언제나 나에게 '가장 애틋한 집'으로 기억될 것이란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의 어린 시절은 토론토에 가장 뚜렷이 각인되어 있다. '저 멀리, 미국 옆 나라'라고만 인지한 채 그저 아빠 엄마에게 이끌려 도착한 그곳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을 졸업했다.


캐나다에 도착한 여름, 나는 만으로 열 살이었다. 첫 적응기에 대해 많은 기억이 있지는 않다. 하지만 흩어져 있는 기억들을 모아 보면 아주 없지는 않다. 또한 듬성듬성하다고 해서 그때 들었던 생각이나 느꼈던 감정들이 별 게 아니었던 건 아니다.




캐나다에서의 첫날, 토론토 피어슨 공항에 도착해 허츠 렌터카에서 빌린 차로 이동하던 기억이 난다. 어두컴컴한 찻길 도로를 아빠는 쌩쌩 달렸다. 그 모습이 참 멋있다고 생각했다. 엄마께서도 아빠는 어쩜 처음 온 곳인데도 이렇게 편하게 운전을 하냐며 아빠를 추켜 세워주셨다.


창밖으로 지나는 바깥 풍경은 어둠에 가려져 있는데도 낯설어 보였다. 그제야 우리 가족은 이제 어디로 가는 거지? 하고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우리 이제 어디 살아? 아파트에 살아?' 하고 물었다. 아빠는 운전을 하며 '넌 어떤 집에서 살고 싶어?'하고 내게 되물어 보셨고, 나는 '멋있는 집'에서 살았으면 좋겠다고 답했다. 아빠는 웃으며 '그래, 그러자, ' 하셨고, 그에 신이 난 나는 그럼 텔레비전에 나오는 앞에 큰 게이트가 있고 정원도 있는 근사한 대저택에서 살 수 있냐고, 한국에서 약속한 대로 강아지도 키울 수 있냐고 또 물었다. 아빠의 답은 같았고, 미소를 띠고 계셨다.  




우리 가족이 캐나다에 도착한 때는 여름방학 기간이었다. 첫 한 달간을 한인민박집에 묵었다. 아빠 엄마께선 낮 시간엔 우리가 거주할 집을 찾느라 바쁘셨고 나와 동생은 민박집에서 텔레비전을 보곤 했다. 9월에 새 학기가 시작하고 학교에 가면 영어로 공부하고 얘기해야 한다는 걸 알았기에 영어에 더 익숙해지려고 텔레비전을 보며 노트장에 들리는 소수의 단어들을 적어보곤 했다. 알파벳 A 옆에 Apple, G 옆에 Great 이런 식으로. 도착한 지 한 달이 거의 다 와갈 때 즈음, 엄마 아빠가 계약한 아파트로 이사했다. 그리고선 남은 여름을 여기저기 관광하며 즐겁게 보냈다.  




9월 새 학기가 시작하고 부모님께선 우리를 학교에 등록시키셨다. 개학 첫날, 부모님과 함께 동생을 먼저 데려다주고 내가 배정된 6학년 교실로 향했다. Mrs. Cohen, 내 담임 선생님 - 30대 후반, 금발 머리에 푸른 눈을 하고 키가 큰 여자분이었다. 엄마 아빠 두 분 다 선생님께 내가 영어를 전혀 못 한다고 잘 부탁드린다고 여러 번 당부하고 나를 맡기셨다.


다행히 우리 반에는 한국애들이 두 명 있었다. 둘 다 캐나다에 일이 년 전에 도착했기에 영어가 능숙했기 때문에 아무것도 알아듣지 못하는 나에게 큰 도움이 됐다. 첫 쉬는 시간에 운동장에 나가자마자 그 친구들은 나를 다른 반 한국애 두세 명에게 소개해주었다. 한국 애들끼리 그렇게 그룹을 형성해서 마음이 편안했다. 하지만 '외국인' 애들은 언어장벽에 상관없이 참 상냥했고, 그들과 함께 어울릴 때도 있었다. 한국 초등학교에서는 쉬는 시간에 숨바꼭질, 공기, 딱지놀이, 고무줄놀이를 했었는데 캐나다 초등학교에서도 숨바꼭질이나 구슬치기 같은 게임을 하며 논다는 것이 낯선 환경에서 조금의 익숙함을 느끼게 해 주었다.


의외로 날 힘들게 했던 건 담임 선생님이었다. 나의 새 학교에는 그 당시에 아직 이민자 학생들이 많이 없었기 때문에 ESL 프로그램 (English as a Second Language의 약자/'제2언어로서의 영어' 학습 프로그램)이 아직 설립되지 않았었다. 때문에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데도 레귤러 영어 수업을 다른 아이들과 다 함께 들어야 했고, 나는 다른 과목 숙제는 열심히 해갔지만 영어 숙제는 하지 못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은 반 애들 모두 앞에서 갑자기 나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옆 자리에 앉아 있던 한국인 친구가 귀띔해 주었다, 내가 영어 숙제를 하지 않기 때문에 화가 난 거라고. 만 열 살, 범생이 인생 처음으로 선생님께 혼나본 거라 슬펐다. 그날부터 영어 숙제는 엄마 아빠가 해 주셨다.


다행히 삼 개월 즈음 뒤 ESL프로그램이 개설되었고, 학생 수가 예상보다 많았는지 새로 추가된 6학년 반으로 나를 포함 몇 명이 옮겨졌다. 우리의 새로운 담임 선생님은 Ms. Edwards - 갈색 머리에 초록색 눈동자를 가진, 젊고 웃음이 많은 친절한 선생님 이셨다. 특이한 점은 한국에서 6개월을 보냈었다고. 짧은 한국어로 '안녕하세요, 나는 한국말 조금 할 수 있어요, '라고 말 건네시는 모습이 마치 천사 같다고 생각했다. ESL 선생님, Ms. Patt도 정말 친절하고 상냥하셨고, 그분과 함께 하던 수업은 참 재미있었다. 열심히 그림도 그리고 책도 함께 읽고 일기도 매일 써서 검사받았던 걸 기억한다.


새로 옮겨진 반 여자 친구들과도 어울려 놀곤 했다. 그 나이에 언어는 중요하지 않았다. 남자애들이 여자애들에게 심한 장난을 치거나, 누굴 좋아하는데 개는 다른 여자애한테 관심이 있어 보인다, 하는 자잘한 일들로 친구들이 눈물을 보이면 잘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그저 어깨를 토닥이며 공감해 주면 그게 친구였다. 우리 반 애들 중 한국인 여자애 한 명 말고도 '외국애들' 세 명이랑 특히나 친해졌다 - 러시아, 이스라엘, 유크레이나 출신이었다. 우리 집으로 처음 초대했던 날, 엄마 아빠께서 참 좋아하셨다.


첫 해 후, 중학교에서 7학년으로 진학해 2 년 만에 ESL을 마쳤다. 캐나다에 도착해 2학년에 편입했던 동생은 ESL을 마치는데 1 년밖에 안 걸렸던 걸로 기억한다.




내가 7 학년을 마치고 우리 가족은 학군이 좋다는 토론토 시외 '백인 동네'에 위치한 단독주택으로 이사하게 되었다캐나다 하면 떠오르는 싱그러운 자연이 고스란히 자리 잡은 곳이었다. 그 집에서 우리 가족은 캐나다 국적을 취득하였고, 우리 집 막내가 된 말티푸 강아지를 입양하고, 나와 동생은 대학졸업을 했다. 그 동네에서 하던 산책, 정겨운 이웃들, 뒷마당에서 여름만 되면 자주 해 먹던 바비큐, 그리고 우릴 보러 한국에서 다녀 가신 가족들 등, 추억들이 무수하다. 나와 동생이 독립을 한 후, 부모님께선 토론토의 길고 추운 겨울이 지치신다며 밴쿠버 쪽으로 큰 이사를 하셨다. 하지만 나에게 캐나다, 집,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언제나 토론토 집일 것이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나의 15 살부터 32살까지의 시간을 함께 해준 우리 집 막내


한국에서 아빠께선 IT업계에서 꽤 잘 나가셨었다. 캐나다에서도 동종업계에 취직하려고 노력하셨지만 어려웠고, 현지 학업 경력이 도움이 될까 싶어 공립 컬리지도 한 학기 다니셨지만 여전히 현실은 쉽지 않았다. 결국 캐나다에 도착하고 3년 즈음이 지난 후 우체부로 일하기 시작하셨고, 그래도 공무원직이라며 위안 삼으셨다. 엄마께서도 잠시 한글학교에서 선생님으로 일 하신 후, 한인 클라이언트를 상대로 보험 회사에 취직하셨다.


아빠 엄마가 많이 힘드셨다는 건 그 당시의 우리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다. 직접 말은 안 하실지 몰라도 지쳐 보이는 아빠 엄마의 모습과 점점 말이 없어져가는 아빠의 모습에서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한국과는 달리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않았음에도 부모님은 우리를 위해 최선을 다해 투자하셨다. 우리가 어렸을 땐 여름 방학 때 리더십 캠프라던지 수영, 스케이팅 수업도 보내 주시고, 동생이 고등학교 때 수학을 어려워하니 과외도 붙여 주셨다. 




아이가 얼마나 일찍 이민 국가에 도착하는지는 아이의 적응기에 큰 영향을 미친다. 한 예로, 내 박사논문에 사용한 1.5세대 이민자 샘플 중, 만 10 살 이후, 11 살, 12 살에 캐나다에 온 참여자들은 영어 때문에 학교에서 적응을 쉽게 하지 못했고 현재에도 영어를 한국어만큼 편하게 하지 못한다고 밝혔다. 나와 동생은 어렸을 때 도착했기 때문에 사교하는데 언어장벽이 문제가 되지 않았고, 언어를 빠르고 자연스레 취득하게 됨으로써 많은 어려움 없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 시절에 나는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무엇이 다른 아이들과 같고 다른지 전혀 생각하지 않았었다. 쓰는 언어가 다름에도 그저 친구들은 친구들일 뿐이었기 때문에. 나는 이민자이고 이민자의 자식이라는 것을 당시엔 잘 인지하지 못했었다. 지금 돌아보면 틈새가 없던 것이 아니었는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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