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국인이기도 하며 캐나다인이기도 하고 프랑스인이기도 하다. 동시에 이도 저도 아니다. 30대 나이에 세 문화권을 진득이 경험하며 살아온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새롭다며 부러운 시선 이기도, 또는 가족과 멀리 떨어져 있음에 측은한 시선이기도 하다. 여러 가지 이유로 나에 대해 글로 표현해 보려고 한다. 주로 1세대의 시각에서 그려지는 캐나다 이민기를 1.5세대의 시각에서 그릴 수 있게. 1세대 동양인 이민자로서 살아가는 프랑스에서의 삶을 얘기할 수 있게. 내가 기억하고 애정하는 모국의 모습을 나눌 수 있게. 동시에 한국, 캐나다, 유럽에서의 경험과 문화권 이해를 잔잔하게 풀어볼 수 있게. 그리고 무엇보다 세 문화권에 - 적어도 부분적으로 - 속한 나의 삶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 얘기해 볼 수 있게.
한국, 전주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5학년, 만 열 살까지 자랐다. 엄마 아빠께서 맞벌이하셔서 나와 동생은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한 추억이 참 많다. 동생과 내가 영어권 나라에서 교육받았으면 하시는 아빠의 바람에 캐나다 이민이 정해졌고, 그렇게 나는 캐나다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면서 이민자가 되었다. 이민자는 이민자인데 정확히 말하면 1.5세대였다 - 어릴 때 부모님의 결정으로 이민을 오게 된, 1세대 이민자의 자녀들. 한국을 떠나던 날, 할머니 할아버지와 작별하며 참 많이 눈물 흘리셨던 할머니, 또 그 뒤에 서서 묵묵한 표정으로 서운함을 감추시던 할아버지의 모습은 아직도 또렷하다.
캐나다, 토론토에서는 1.5세대 이민자의 무난한 그런 삶을 살았다. 초등학교 6학년에 편입해 영어를 쉽게 배웠고, 친한 친구 중엔 나 같은 한인 이민자 친구들이 많았고, 부모님의 권유에 따라 미술을 하기보다는 좀 더 안정적일 수 있게 미술을 가르치는 쪽으로 커리어를 준비하려고 대학에서 미술 또 교육학과를 복수전공했다. 대학졸업을 앞두고는 아빠께서 캐나다 밖에서의 삶도 경험해 보길 원하셔서 기회를 알아본 결과, 프랑스 보르도에 위치한 대학교에서 영어 강사직을 맡게 되었다. 프랑스로 떠나기 전까지 나는 그렇게 캐나다에서 잔잔하게 아이에서 청년이 되었다. 즐겁고 행복한 추억이 참 많다. 소중한 우리 집 강아지와 친구들도 캐나다에서 만났고 첫사랑도 캐나다에서 해보았다. 그 때문에 아직도 나에게 '고향'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캐나다이다. 엄마 아빠의 경험은 달랐다. 한국에서의 편안했던 날들을 뒤로하고 캐나다에서 살아가는 유색인종 1세대 이민자로서의 삶은, 좋은 점도 분명 있었겠지만 고단했을 것임을 알고 있다.
프랑스, 보르도와 파리에서는 청춘을 만끽하고 어른이 되는 법을 배웠다. 낯선 나라에서 새집의 터전을 잡는 건 모두 내 몫이었다. 하지만 즐거웠다. 엄하게 키우신 아빠 때문에 항상 통금이 있었고 외박도 거의 해보지 못했었는데, 보르도에서 첫 직장 생활을 하면서는 같이 일하는 동료들과 쉴 틈 없이 놀고 여행하며, 그저 무난하게만 살던 1.5세 한인 이민자로서는 알지 못했던 삶을 배웠다. 처음 계획했던 건 2년이었는데 연애도 하고, 석사도 하고, 박사 학위를 시작하고, 계약직 교수직을 맡게 되어 파리로 이사도 하고, 국적도 취득하고, 마음 깊이 채워주는 사랑이 무언지 알려준 고마운 사람도 만나고, 최근에는 박사 학위도 마치고... 그러다 보니 프랑스에 정착한 지 어언 11년이 되어간다. 캐나다에서와는 달리 주변에 한국 사람은 없다. 그렇게, 어쩌면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는 유럽에 정착한 1세대 동양인 이민자가 돼버렸다. 프랑스에서의 삶은 온전히 나의 시간이었다.
In-betweenness. 틈새에 있는 상태 - '틈새'라고 번역하는 것이 가장 편리한듯하다. 이제 겨우 30대. 길고도 짧은 나의 시간은 이 단어이자 표현과 크게 연결되어 있다. 한국, 캐나다, 프랑스, 세 나라와 문화권 사이에 틈틈이 자리한 나의 틈새. 이런 틈새의 경계는 뚜렷하지 않다. 때문에 서로 겹치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물론 틈새는 나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이민자들과 난민들, 뿐만 아니라 한 나라에 속해 있으며 동시에 사회에서 발생한 다양한 소(수)그룹 사이에 속한 사람들에게도 해당하는 것이다. 이런 틈새의 애매모호함은 참 오랜 시간 동안 나에게 익숙함과 또 그만큼의 자극으로 남아있다. 내 박사논문의 주제이기도 하다: 캐나다의 하이브리드한 정체성들에 대해, 토론토에 거주하는 1.5세대 한인 이민자들의 in-betweenness를 기반으로 한 사례연구. 논문을 시작할 때만 해도 내 중심을 잡아주고 있다고 느꼈던 코리언 캐나디안으로서의 정체성을 연구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논문을 마칠 때 즈음 깨우친 건, 나는 더 이상 코리언 캐나디안이 아닌, 코리언 캐나디안 프렌치였다는 것 (재밌는 현상이다. 다른 이들의 정체성에 대해 그렇게 몇 년을 열심히 연구하고 분석했으면서 정작 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딱히 깊이 생각하고 표현해 본 적이 없다는 게).
틈새는 크기도, 깊이도, 넓이도, 결국엔 해석도 다양하다. 이 틈새, 그리고 틈새에서 본 나의 세상에 대해 적어 보고 싶다. 한국어로 글 적기라고는 초등학교 때 일기 쓰던 게 전부이기에 문법도 맞춤법도 틀릴 때가 있겠지만, 다시금 내가 처음 배웠던 언어인 한국어로 내 시야와 시각을 공유하고 소통해 보고 싶다. 한국, 캐나다, 프랑스, 어디가 되었건 사람 사는 곳은 결국엔 틀린 듯하나 같다. 같은 맥락으로 내가 그려내는 틈새도 다른 이들이 경험한 틈새와는 다른 듯해 보일지 모르나 분명 본질은 같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여러 그룹에 속하지만 그와 동시에 속하지 않는, 그렇기에 편안하고 자유롭지만 불안정한 마음을 기반한, 행복하고 싶은 그런 본질. 여기서 가설을 하나 조심스레 세워본다. 우리는 모두 우리만의 틈새에 위치해 있기에 '틈새'라는 공통점 안에서 공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틈새감성'으로 바라본 나의 세상을 전하며, 우리들의 다른 점을 넘어 공감하고 싶다. 또 그로 이루어진 심심한 위안을 주고 싶다. 나 자신에게 그리고 여러분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