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다가오니 거리는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꾸며져서 괜히 마음 한켠을 따뜻하게 만들어주고 사람들 사이에는 신비한 연말의 기류가 흐른다. 그리고 12월 31일, 마지막 해가 지고 내일의 해가 떠오르면 우리 모두는 나이를 한 살 더 먹게 된다. 인류만의 이 신성한 기준은 숫자에 불과하지만 나이 듦과 죽어감 그것의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사람들도 있다. 이것은 나이 듦에 움츠러든 나를 위로하기 위한 긴 시간을 건너온 생각들이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불을 피우니 서로의 얼굴이 보인다. 빛은 주변을 밝히고 더 먼 곳까지 뻗어나간다. 뻗어나갈수록 빛은 점점 더 옅어지니 그곳에는 이제 막 고치를 벗은 나방 한 마리가 줄기에 매달려 몸을 말리고 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자유를 얻은 나방은 날개를 펄럭이며 가장 밝게 빛나는 곳을 향해 날아간다. 풀, 나무 그리고 우리를 지나쳐 마침내 불 속으로 몸을 던진다. 그 몸은 가장 밝은 빛과 하나 되어 순식간에 사그라진다. 우리는 삼자로써 조용히 지켜보며 황홀감과 함께 운명을 직감한다."
나방은 죽으러 달려든 것일까 순식간에 타오르는 엑스터시에 도달한 것일까
15, 20, 30, 50, 70... 숫자가 오를 때마다 죽어가고 있는 것일까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자유를 얻자마자 불속으로 뛰어드는 나방처럼 나의 운명도 불 속에 있는 듯하니 어찌 몸을 불사르는 것을 멈출 수 있을까. 나는 나방의 죽음이 갖는 의미를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결탄코, 흙속에 묻히기 전까지도...
나이는 모두가 공평하게 오르니 얼마 살지 않은, 인생 아마추어에게도 나이 듦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니 부끄러우나 그 두려움에 대해 고백해보려고 한다.
소중한 젊음을 어디에 사용하는가
내가 항상 끄적이는 메모장에 이런 말이 적혀있었다. "햄버거는 싼 음식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젊음, 건강이라는 값이 붙어있으니까." 아마 퇴근하고 꾸역꾸역 햄버거를 먹으며 적은 메모일 것이다. 햄버거는 그냥 싸기 때문에 내가 매일 찾던 음식이다. 난 인공적인 맛을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평생 헌신적인 사랑에 얻어먹던 가정식은, 온통 남인 그곳에선 만원으로 시작한다. 그렇기에 햄버거는 사회초년생에게 사랑받는다.
젊을 때에 비해 나이가 들면 햄버거를 더 큰 건강을 담보로 먹어야 한다. 라면도 치킨도 술도 그러하니 대부분의 음식은 나잇세라도 부가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모든 걸 싸게 누릴 수 있는 이 권리를 어디에 사용해야 할까. 술이라도 많이 마셔 뽕을 뽑아둬야 하나, 흙탕물에라도 굴려야 할까. 젊음이 부여해 주는 방대한 자유에 나는 맥을 추지 못하고 있다.
나에겐 분명히 일상이 불편해지는 시기가 찾아올 것이다. 핸드폰의 작은 글씨가 흐릿해질 거고, 대화도 한두 번으로는 알아듣지 못하게 될 것이다. 부모님의 변화에 나를 대입해 보면 되니 아마 내가 미리 볼 수 있는 유일한 미래일 것이다.
나이가 더 들면 분명히 몸을 불사를 수 없는 시기가 찾아올 것이다. 그때 가서는 무겁고 긴 배낭을 메고 혼자 베트남에서 한달살이를 한다거나 새로운 활동에 도전해 보는 모든 것이 헐값에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게 될 것이다.
나는 이런 미래를 두려워하고 있다. 지금 내가 누리는 젊음의 자유가 생각보다 짧기에 나는 무엇이든 도전해야 할 것 같다는 중압감에 젊음에 대한 무책임이 여실히 드러난다.
하지만 여전히 답을 내릴 수 없다. 그저 그 나이 듦에 대한 두려움을 꾹꾹 눌러 담는 수밖에 없는 것일까. 한 번뿐인 젊음을 하얗게 불태워야 하는 것일까.
내 몸과 마음이 늙어도 변하지 않는 한 가지가 있다. 내 심장은 여전히 뛰고 있다는 것. 오늘날 컴퓨터 앞에 앉아 친구와 수다 떨고 책을 읽을 때에도. 텔레비젼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자막 없이는 듣기 힘들어질 미래에도 심장은 여전히 뛰고 있을 것이다. 고동은 시끄러운 세상의 소음 속에서 조용히 나와 함께하고 있을 것이다.
"째깍째깍. 불 꺼진 방에 유일하게 울리는 시계 소리를 지우면 적막, 고동이 귀에 들어오는 유일한 정보인 그 순간이 찾아온다. 감기지 않는 눈으로 희미한 천장을 바라보며 고동을 듣고 있노라면 아직 살아있음을 탄식한다. 내일도 오늘처럼 해가 뜨기를 바라지만 오늘과 다를 바 없는 내일에 의미를 찾는 것 따위 불가능하다. 깊이 눈 감을 날을 애원하며 짧은 시간 눈을 감는다."
다시 원점이다. 내 나이 듦에 대한 두려움은 나방이 불속으로 죽으러 뛰어들었는지 황홀감에 뛰어들었는지 고민하는 문제 앞에 다시 섰다. 고동이 느껴지는 한 나이 듦 따위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진지한 논제는 오직 '자살'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판단할 수만 있다면 나이 듦은 오히려 축복으로 작용할 수 도 있지 않겠는가.
심장은 황홀감에 고동칠 수도 두려움에 고동칠 수도 있다.
우리는 인생 속에서 황홀감을 마주할 때 심장이 약동함을 느낀다. 순식간에 스쳐가는 창조적인 순간에, 어쩌면 주의 음성이 들리는 날에, 새해를 굳은 결의로 맞이할 때 심장은 여전히 고동친다.
반대의 경우도 존재한다. 나이 듦이 너무나도 두려울 때, 어쩌면 내가 살아온 인생이 낭비였다는 생각이 들 때, 내일도 똑같을 하루에 대한 분노로 지새울 때에도 심장은 여전히 고동친다.
심장이 어떤 감정을 갖고 뛰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황홀할 때에도 두려울 때에도 똑같이 고동치기 때문이다. 심장이 고동치는 것에는 아무런 의미도 담겨있지 않다. 내가 늙던 젊던, 인생에서 멈추지 않는 것이 고동이라면 인생도 그러하지는 않을까?
살아간다는 것이 그저 고동이 이어지는 것이라면, 내 인생에 아무런 감정이나 의미도 담겨있지 않은 것은 아닐까?
젊음은 그냥 있는 것이다.
내가 우울한 날에 맞춰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것이 아니듯 젊음은 그냥 있는 것이다. 늙음도 그냥 있는 것이다. 비가 오는 날에 우울을 드러낸 것도 나이고, 젊음에서 무언가 의미를 찾고 행하려고 한 것 또한 나다. 내가 혼자 의미를 구했고 혼자 두려워했다.
나이 듦에 어떠한 의미도, 내가 갖는 의무도 없다는 사실은 두려움의 좋은 도피처가 되어준다. 그러나 왠지 꺼림칙하다. 인생에 이유가 없고 의무 또한 없다면, 인생은 살아갈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 두려움 앞에 묵묵히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의미 없는 인생이 살아갈 가치가 있는가"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삶에 이유가 없는 것은 채울 것 밖에 남은 것이 없다는 의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황홀하나 두려우나 심장이 고동치는 것은 같다면, 이왕이면 황홀함으로 채우면 된다. 새해를 나이 듦에 대한 두려움으로 받아들이던 새로운 도전과 희망으로 받아들이던 똑같이 심장은 뛴다면 이왕이면 좋게 채우면 된다.
우린 의미 없는 인생에서 묵묵히 걸어 나가는 수밖에 없지만, 도착지까지 가는 길이 없기에 창조적일 수 있는 것이다. 나이 듦은 의미 없이 죽어가는 것이 확실하기에 미래와 희망을 지움으로써 우리는 스스로의 가능성을 높일 수 있게 되었다. 나이 듦은 축복이 분명하다.
나방은 죽으러 불에 뛰어들었지만 그 과정에서 거침없이 나무와 풀을 헤쳤다. 불과 합쳐지는 자신에서 황홀감을 느끼고 스스로를 세상에 주어진 자유대로 사용한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내게 아름다운 인생으로 느껴졌다.
그럼 내가 취할 수 있는 자세는 무엇일까?
"어떤 자세를 취하는가" 이것이 가장 중요했다. 내가 채우면 되는 인생이다. 그렇기에 어렵다. 흥미롭지만 역시나 어렵다.
그림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버스에서 나는 항상 가장 뒷자리 (가능하다면 왼쪽) 창가에 앉는다. 그리고 항상 여러 생각을 곱씹으며 밖을 바라본다. 어느 날은 오늘 그린 그림을 떠올리니 세상의 색과 그림자가 돋보인다. 아침에 기도를 한 어느 날은 괜히 햇살이 더 따스하고 세상이 소중하다. 예전에 읽었던 책의 내용을 떠올리는 어느 날이면 세상에서 그것을 찾으려고 노력하게 되고 세상의 모습이 자연스레 바뀐다.
나이 듦도 같을 것이다. 눈이 점점 침침해진다면 당장의 눈앞을 보기보단 살아온 길에 쌓은 것, 얻은 것을 돌아보라는 뜻은 아닐지 곱씹어볼 수 있다. 어쩌면 껍데기에 사로잡히지 않는 새로운 방법을 터득할 수 있지 않을까? 귀가 점점 안 들린다면 드디어 세상의 소음에서 벗어나는 좋은 기회로 여길수도 있다. 침묵과 작은 소리에서만 보이는 세상을 느끼고 경험해 볼 수 있는 다신 없을 기회니까.
내게 살아간다는 것은 세상에 대한 생각을 늘려가는 것이다.
세상이 생각대로 보이기 시작하니, 세상 모든 것이 생각하기 나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