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홀이란 단어는 꽤나 아름답다. "눈이 부시어 어릿어릿할 정도로 찬란하거나 화려함"이란 단어의 뜻을 제외하고도 '황홀'이라는 단어에서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그 장면들은 말 그대로 황홀하여 아름다움에 대한 경외를 느끼게 한다.
그런데 그런 황홀이 극에 달한다면, 아름다움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에 다다른다면 우린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까.
나태주 시인은 '황홀극치'라는 단어로 그것을 설명한다. 정도의 끝에 달한 두 단어를 합치니 단어에게 알 수 없는 힘이 생긴다. 극도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단어에서 극도의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식으로 말이다.
미美
나도 당신도 아름다운 것을 좋아한다. 그 기준은 모두가 다를지라도 자신의 눈과 귀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을 사랑하게 마련이다. 물론 대다수가 공통적으로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는 기준도 존재한다. 음악에서 미술에서 많은 사랑을 받는 작품들이 그 예시가 될 수 있다. 사람의 외모와 심적인 요소를 대상으로도 그 기준은 우리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다.
무엇이 아름답고, 어떻게 아름다워지는지를 얘기하고 싶지는 않다. 아름다운 음악을, 미술을 얘기할 때 우리 마음속에서 빛나는 작품은 모두에게 다를 것이기에, 반드시 모두에게 빛나는 아름다움은 존재하지 않기에.
하지만 모든 아름다움에게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바로 아름다움은 스스로 빛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아름다움만 한 모순이 어디 있을까?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는 자연스레 발광체가 된다. 우리가 빛난 다는 것은 참을 수 없이 고귀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아름다움에는 조명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아름다워지고 싶은 것들은 관심과 사랑을 필요로 한다. 자신을 빛나게 해주는 조명들을 많이 모아야만 한다. 인간은 유전자에 각인된 듯이 추구한다. 더 아름다운 것을, 모두의 조명을 독차지할 수 있는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의 극에 달하는 무언가를. 황홀극치를.
하지만 그 아름다움의 탄생 비화를 조금 들여다본다면 생각이 조금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더 이상 아름다움을 찾거나 바라지 못할지도 모른다. 빛을 받는 물체에는 그림자가 생긴다. 그리고 그 빛이 강해질수록 그림자는 짙어진다. 모두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아름다움에도 그런 이면이 존재할지도 모른다.
아름다움은 우리의 빛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픽사 로고에 등장하는 조명과 같다. 마치 아름다움을 비춰주기 위해 존재한다는 듯이 그것을 탐닉한다.
(이하의 내용은 영화 위플래쉬의 스포가 될 수 있습니다. 아니 스포를 넘어서 영화를 보고 와야 글을 더 재밌게 읽을 수 있으실 겁니다.)
영화 위플래쉬는 어지러움을 느끼는 것을 즐긴다면 정말 추천하고 싶은 영화이다. 굉장히 감정이 격양된 상태로 영화를 보고 나서 자려고 누웠는데 코 막힌 상태에서 내가 내뱉는 숨이 드럼 심벌 소리로 느껴질 정도로 인상이 깊게 남았었다.
그리고 위플래쉬는 작중에 미심쩍은 표현들을 남김으로써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작중의 마지막 혼신의 드럼 연주가 끝남과 동시에 영화도 끝나며 나의 긴 집중도 풀린다. 그리고 이내 고양감에 몸을 숨긴 무언가를 깨닫는다. 우리는 마지막 무대가 끝나고 그 무대를 지켜보던 관객의 반응을 볼 수 없다. 그전에 영화가 끝나버리기 때문이다. 그 반응의 공백, 나는 이게 영화가 내게 내준 숙제라고 느꼈다.
빗나간 열정과 피나는 채찍질로 만들어낸 이 아름다운 음악이 당신은 어떤가?
어쩌면 악인에 가까울 정도로 자신의 템포에 맞게 오케스트라의 단원들을 채찍질하는 플레쳐와 그런 그에게 인정받기 위해 미친듯한 열정을 쏟아붓는 드러머 앤드류. 그런 인간들이 빚어낸 예술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그것이 놀라울 정도로 아이러니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강압적으로 극한의 상황까지 예술가를 몰아붙이는 플레쳐의 방식은 꽤나 효과적인 것인가?
극한까지 몰린 예술가에게서 아름다운 무언가가 깨어난다고 믿는 플레쳐는 그저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며 그것이 가진 맹목성의 망치로 다른 모든 것을 무시했다. 앤드류가 입학 할때까지 쌓았던 스킬과 갖고 있던 재능도, 그에게 배운 아티스트들이 겪은 신체적, 정신적 고통도 무시 당했다.
영화의 마지막 무대를 뒤집어 놓은 앤드류는 승리한 듯 보이지만, 플레쳐는 더 큰 전리품을 얻어냈다. 그것은 자신의 신념이 옳다는 증거이다. 앞으로 플레쳐는 앤드류를 증거로 내세우며 자신의 신념을 계속 관철해 나갈 것이다. 그 속에서 똑같이 피해자도 탄생하고, 가끔은 황홀한 음악이 탄생할 것이다. 그것은 또 그를 미소 짓게 할 뿐이다.
그리고 대중은 믿을 것이다. 저 연주자는 아름다운 음악을 하는 위대한 아티스트들을 탄생시키는 위대한 사람이라고 그리고 그 피가 섞인 아름다움을 비추며 황홀에 젖을 것이다.
우리 인간에게는 뛰어난 실험도구가 하나 있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3>를 본 적이 있다면 영화 시작 씬에 로켓이 등장하며 흘러나오는 <Creep>의 어쿠스틱 버전을 들어봤을 것이다. 노래는 영화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로켓의 과거사와 매치되며 영화의 마지막에 깊은 여운을 남겨준다. 만약 당신이 로켓의 과거를 알고 있다면 아마 인간의 뛰어난 실험도구가 '동물'이라는 것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다양한 영역의 실험에 동원된다. 그중 화장품 업계에서의 동물실험은 과거부터 악명이 자자했다. 유튜브에서 <Save Ralph>라는 동영상을 볼 수 있다. 실험실로 출퇴근하는 토끼를 담은 애니메이션은 짧은 시간 동안 당신을 극도로 불쾌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하지만 한발짝 더 물러나서 본다면 더 불쾌한 것이 떠오른다. 그 영상이 현실이라는 것. 아름다움의 극치를 향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피 묻은 현실이라는 것이다.
작년에 약 500만 마리의 동물이 동물 실험 대상으로 쓰였으며 과거로부터 매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그들 중 절반 가량은 통증 완화 약물 없이 고통이 따르는 실험에 동원됐다. 사실 통증 완화를 하건 말건 너무나도 잔혹한 실험방법들은 입에 담기 힘들 정도이다. '충북대 수의대 동물실험', '강제수영실험' 등을 검색해 본다면 그 잔혹함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그 어떤 동물도 아름다움을 위해 희생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실험 당하기 위해 태어난 동물도 있을 리 없다는 사실을. 동물들의 목숨, 고통의 크기와 인간이 느낄 아름다움 따위를 두고 저울질이 가능할 리가 없다. 우리는 짙은 그림자를 가진 아름다움에서 눈길을 돌려야 한다.
아름다움은 우리의 시선과 조명에 종속적이다. 하지만 이 말은 곧 아름다움이 만들어내는 그림자 또한 우리에게 종속적이라는 의미이다. 아름다움으로 인해 생기는 피해에 대해 우리가 전혀 책임이 없다고 보기는 힘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아름다움을 향한 욕망은 멈추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지금보다 더 아름다운 것을 바라고 또 바랄 것이다. 다른 아름다웠던 가치들을 하나씩 하나씩 어둠에 밀어 넣게 될 것이다. 누군가의 삶도, 동물들도, 언젠가는 자신의 삶조차도.
하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아름다움 위의 아름다움이, 아름다움을 위한 아름다움이... '황홀극치'라는 단어처럼 분명히 존재한다. 그렇다면 정답은 이미 정해져 있지 않은가? 우리가 어디를 바라보고 어떤 황홀경에 빠져야 할지는 당신에게도 나에게도 너무나도 쉬운 질문이다.
진정 아름다운 것에 빠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