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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상 Oct 07. 2023

생물 다양성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책을 읽었다. 문득 글이 쓰고 싶어졌다.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이지만 충분히 책의 내용에 대한 스포가 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변한다'라는 진리 하나만 제외하고 모든 것은 변한다는 말에 동의할 수 있는가?

어디에 어떻게 있었는지는 모르겠다만 우연히 존재를 입고 태어난 나는 매년 무르익고, 어딘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나'는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다.

민들레도 마찬가지, 어디서 날아온 지는 모르겠다만 땅에 닿은 씨앗은 연둣빛 싹을 틔우고, 잎이 자라나 사방으로 영역을 장악한다. 그 사이로 봉오리가 올라오고 미적 감각이 떨어지는 벤치나 나무 밑에서 뛰어난 예술가로서 피어난다. 인생의 말미에는 속주머니에 숨기고 있던 씨앗들을 세상에 드러내고 또 다른 생을 기다린다.

우리나 민들레뿐만이 아니라 주변의 무엇을 떠올리더라도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는 무생물이라도 어딘가로 쓸려나가고, 깎여나갔으리라)



모든 것이 변한다는 의견에 동의할 수 있다면 생물의 순위를 정하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변화하는 세상 앞에서 어떤 특징을 가진 무리가 살아남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책의 예시를 빌리자면 기린에게 경쟁자에 대한 우위를 가져다준 것은 거추장스러운 목이었고, 바다표범이 심한 추위에도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은 움직이지 못할 만큼 무거워 보이는 체지방 덕분이었다.

인간의 관점에서는 불쾌할 수 있는 특징이, 다른 환경에서는 어떻게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을지 또한 알 수 없다. 나무늘보는 게을러 천적의 눈에도 띄지 않고 철저한 무관심 속에 생존했다. 인간이 과거부터 악하다고 여기며 지옥에서 벌로 다스리던 게으름은 다른 환경에서는 뛰어난 생존 전략이 되어주었다. (만약 데이비트 스타 조던이 나무늘보를 조사했더라면, 나무늘보는 생명의 사다리 맨 끝에서 비난양파 신세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찌르레기나 기생충의 생존전략도 마찬가지다.

다윈은 '변이'가 한 종이 강력해지고, 미래까지 지속하게 해 주며, 세상이 전염병, 자연재해, 경쟁자 등의 타격을 가해도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어준다고 했다.

그렇다. 세상은 변화하고 인간은 절대로 그 변화를 예측할 수 없다. 그리고 그 변화한 세상에서 어떤 변이가 유리하게 흘러갈지 조차 절대로 알 수 없다. 그러니 인간이 그 복잡성을 이해하고 한 가지 기준으로 순위를 매기는 것 또한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애초에 그런 자격조차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가 잡초로 뽑아내던 민들레는 누군가에게는 염료이자 약초이고, 나비에게는 생명을 유지하는 수단이며, 벌에게는 짝짓기를 하는 침대이고, 개미에게는 후각의 아틀라스의 한 지점이 된다.

인간이라고 다를까 광활한 우주와 무한 앞에서 우리 하나하나는 지구라는 점 위에 사는 점일 뿐이며, 아무 의미도 없이 희미해져 가는 무언가 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가정에서, 한 학교에서, 한 강아지에게 우리는 버팀목이고, 추억이며, 밥 주는 무언가이다.

무엇이 특별하고 무엇이 다른 생명과 다르단 말인가. 우리가 무슨 자격으로 벌들의 침대를 짓밟을 수 있는 걸까


예술가 민들레

민들레는 잡초라서 생명의 사다리에서 순위가 낮은 식물인가? 민들레는 잡초이면서, 누군가의 생명줄이고, 보도블록의 리본이다. 그런 불공정한 순위는 누가 매긴 것인가




나는 책을 덮었다. 문득 존중하고 싶었다. 건강에 좋은 피톤치드를 뿜어내고, 햇빛을 가려 그늘이 되어주는.. 같은 한 기준에 의한 수식어 없이 나무 그 자체를, 강아지 그 자체를, 나의 가족들을, 친구들을, 이웃들을 그리고 나...

'어, 나는? 나는 얼마나 그 자체로 존중받고 있지?'




인류의 역사에는 다양성을 말살하고 무언가를 획일화 하려는 시도가 자주 목격되었으며 그런 모습은 요즘에도 심심찮게 발견된다. 우생학도, 생명의 사다리도, 지침서조차 없는 무언가에게서도


올해 1월쯤 이런 뉴스를 본 적이 있다. "합격해도 안 가요. SKY 무더기 포기". 대다수의 자연계열 학생들이 의학계열로 진학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의대를 희망하는 움직임은 예전부터 있었다. 그 정도가 커졌지만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올해 6월쯤에는 이런 뉴스를 봤다. "'그냥 쉬어요' 20대 증가". 취업난을 겪는 청년이 실업자가 아닌 비경제활동인구로 전환되고 있는 것이었다. 마치 한국이 일본이 겪은 과정을 답습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올해 8월쯤에는 이런 뉴스를 봤다. "정부 R&D 예산 삭감". '이러면 누가 과학자해?' 이전에 누리호 발사 이후 연구원 처우 문제가 대두됐던 것이 떠올랐다. 그리고 자연계열 입학생 대부분이 의대로 방향을 틀던 1월의 뉴스도 떠올랐다.

올해는 또 유독 저출산에 대한 뉴스도 많이 생산됐다.

찝찝했다. 올해 벌어진 문제들 사이에 연관이 하나라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분명히 올해 벌어지는 일들 사이에는 무언가 연결고리가 있다. 작은 무언가에서 산불처럼 크게 번져버린 것이리라 나는 생각했다.



당신의 초등학교 때 꿈은 무엇이었는가?

당신과 나는 지금 대치동 학원가에 있다. 학원으로 들어가는 초등학생을 붙잡고 몇 가지만 물어보기로 했다. "의대반 학원 다녀요? 몇 학년이에요?" 초등학생은 선뜻 대답해 주었다. "네, 5학년이요."

"의대반에 다니는데 혹시 의사가 꿈이에요?" 초등학생은 조금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꿈은 아직 없는데.. 의사가 싫은 건 아니어서요."


의대반은 의대에 가기 위해 초등학생 때부터 중. 고등학교의 공부를 선행학습 하는 곳이다. 의대를 희망한다면 초등학교 4학년부터 무조건 시작해 줘야 한다고 말하는 학원은 초등학생에게 고등학교 1학년 수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리고 위 인터뷰는 다큐 '의대 블랙홀'에 등장하는 실제 초등학생 대상 인터뷰이다. 초등학생 5명 중 1명은 의대가 목표라는데, 누구의 입김이 강한지는 대충 알 수 있었다.

이런 의대로 쏠리는 현상은 수도권뿐만이 아니라 비수도권 의대가 정원의 40%를 해당 지역에서 뽑게 되면서 비수도권에서도 똑같이 나타난다. '의대쏠림'이란 말 그대로 대부분의 아이들의 진로가 초등학교 때부터 의대로 쏠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초등학생 때 꿈이 과학자였다. 과학자가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몰랐고 친구들과 고무 딱지나 치고 엄마한테 장난치는 게 더 재미있었으니, 아마 공룡이나 부활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하루에 5시간 이상을 공부에 매진하며 남의 의지로 살아가는 초등학생들이 측은하면서도 대단하기도 하다.

아무튼 의대를 지망하는 이들이 계속 증가하며, 의대에 가기 위해 재수, 삼수쯤은 기본이 되어가는 요즘이지만(실제로 전국 의대 정시 신입생 중 재수 이상인 사람은 77%이다.) 의대 정원은 3,058명으로 18년째 고정되어 있다. 좁디좁은 문으로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깎으며 들어가려 경쟁하고 있는 것이다. 그 싸움을 위해 어릴 때부터 칼을 갈지만 이미 문 안에 있는 사람들은 문을 좁히며 늘어나게 놔주지를 않는다. 그리고 오히려 문이 좁을수록 그 속에 속하고 싶은 감정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그런데 왜 의대로 쏠리는 걸까? 고령화되고 소득이 증가해서 의료 수요가 증가했기 때문에? 의사를 소재로 하는 드라마가 사명감을 불어넣었나? 의사의 평균연봉이 대기업 평균연봉의 3배라던데 그것 때문일까? R&D 예산 삭감으로 자연계열을 꺼리는 걸까? 아마 복합적이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납득될만한 대답은 연봉 외에는 찾지 못했다.



"저출산의 근본적인 원인은 청년 인구의 수도권 편중분포"

유튜브에서 조영태 교수님의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저출산에 대해서 다들 취업난, 양육 환경이 원인이라고 얘기하는데 수도권 편중분포가 그 원인이라고 말하는 의견은 처음이었다. 교수님은 토마스 맬서스의 말을 인용했다. "인구의 밀도가 높아지면 자원의 총량 속에서 경쟁이 심해질 수밖에 없는데 경쟁이 심할수록 우리는 재생산보다는 생존을 택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자연스레 고개가 끄덕여졌다. 어쩌면 수많은 문제들의 연결고리를 찾은 것이 아닐까. '경쟁심화' 그것이 만들어내는 다른 문제에도 집중했다.



경쟁이 만들어낸 피해자들

비경제활동인구 청년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뉴스에서 조금 더 나아가면 우리는 한국의 은둔형 외톨이 문제로까지 도달할 수 있다. 일본은 이 길을 먼저 걸어갔다. 지금은 8050문제로 불리는 이 단어는 80살 부모가 50살 자식을 부양한다는 의미이다. 청년층이었던 히키코모리들을 방치하니 그들이 50세 중년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들이 분노를 사회로 분출할지도 모른다고 예비범죄자로 간주하는 것은 은둔형 외톨이 방치의 진정 무서운 점이 아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가정의 붕괴이다. 일본에는 전직 차관이 자신의 히키코모리 아들을 죽인 사건이 발생했었다. 엘리트 집안의 가장은 게임에 거액의 용돈을 쏟아붓는 자신의 아들이 한심해 보였을 것이다.

사실 그들이 방으로 숨어드는 이유는 개인이 약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회의 구조에 의해 발생하는 피해자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입시, 취업 같은 경쟁 속에서 받은 상처들과 가정, 학교, 직장 등의 관계 속에서 받은 상처들이 그렇게 만드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그들에게 가정이라는 보금자리마저 무너진다면 더 이상 어디로 피해야할까. 그들은 '경쟁에 지친 자들'이다.



취업 경쟁이 만들어내는 수많은 피해자들

한국 노동시장의 유연성은 자주 지적되어 왔지만 여전히 노동 유연성은 경직되어 있다. 또한 평생직장의 개념이 사라지며 잦아진 이직으로 인해 기업에게 신입을 채용한다는 것은 꽤나 큰 리스크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입에 대한 투자비용을 위험부담이 적은 경력직 채용으로 옮기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그 외에도 국제적인 금융위기 이후의 꾸준한 일자리, 상용직 감소 등의 요인도 있으니 사회에 막 나온 청년에게는 취업이 너무나 어려울 수밖에 없다.

청년들의 취준생 신분이 길어지고, 스펙은 모두가 날이 갈수록 좋아지고 있기에 고학력화와 함께 사회로 진출하는 연령 또한 늦어지고 있다. 이런 현상은 성인 이행기의 등장을 의미했다. 우리는 청소년에서 20살이 되면 바로 성인이라고 여겨지곤 한다. 하지만 본인이 성인의 역할을 한다고, 성인이 되었다고 느끼기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기간이 성인 이행기이다. 성인 이행기가 길어질수록 혼인 시기도 늦춰지니, 출산율과 상관이 없다고 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렇다면 경쟁의 심화로 인해 출산율이 떨어진다는 의견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경쟁이 심화될수록 자연의 섭리는 우리가 개인의 생존을 위해 움직이게 한다. 그 속에서 출산인 재생산은 잘 이뤄지지 않는 것이다. 또한 경쟁자가 많아 취업이 힘든 젊은 세대는 성인 이행기와 공부 기간이 길어지고 실업자 상태를 유지하거나, 포기하고 비경제활동이 되며 자연스레 혼인 시기는 늦춰지고 있다. 이런 시기에 비교적 취업난으로부터 자유롭고 연봉도 보장되는 의대로의 쏠림 현상 또한 꽤나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리고 의대로의 쏠림은 또 다른 경쟁을 낳는다. 여기서 우리는 또 상상할 수 있다. 입시 경쟁이 심화될수록 재수로 인해 공부 기간이 길어지고 포기하는 사람도 등장할 것임을. 그리고 사회에 나오는 시기가 늦춰지고 이는 출산율과 연결된다는 사실을.




이런 잔인한 경쟁은 사실 우리 사회와 개인의 발전을 촉진한다. 경쟁이 없다면 우리는 변화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다윈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변화하는 세상 앞에서 미래를 보장받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경쟁의 패배자들이 필요에 의한 희생양이라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무언가가 경쟁 이전에 존재한다. 이 모든 문제들의 더 깊은 뿌리 그것을 찾아야 한다.



경쟁이 심화되기 위해서는 충족되어야 하는 조건이 하나 있다

그것은 경쟁자가 많아지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경쟁자가 많아질까? 많은 사람이 같은 목표를 노린다면 많아질 것이다. 같은 목표... 모두가 같은 목표를 꿈꾸는 것. 경쟁 이전에 존재하는 그것은 획일화였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한 가지 기준으로 획일화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변화 없이는 그 종이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을.



획일

조영태 교수님의 영상을 다시 봤다. 그리고 획일화라는 키워드를 얻은 나는 다른 것을 볼 수 있었다. "저출산의 근본적인 원인은 청년 인구의 수도권 편중분포와 그것을 만들어 내는 획일적인 가치관"


인프라는 수도권 안에 획일화되어 있고 우리는 수도권으로 대학을 가고 취업을 하는 것으로 약속한 듯 수도권으로 흘러들어 간다. 그리고 그 좁디좁은 서울 공화국에서 우리는 부족한 땅으로 경쟁하고, 그곳에서 더 좁은 땅으로 몰린다. 부족한 일자리로 경쟁하고, 더 좋은 일자리로 몰린다. 부족한 지하철 의자로 눈치 보고 경쟁한다.


우리는 지금 획일화 꽃밭에 있다. 수도권으로의 획일화는 취업경쟁의 씨앗을 뿌렸고 취업 경쟁 속에서의 획일화는 임금격차로써 피어난다. 그 속에서 의대지망이라는 획일화가 피어나고, 의사들은 필수 진료과인 내과와 외과, 비인기과인 산부인과 소아과 등을 기피하고, 편하고 돈이 되는 성형외과나 안과로 몰리며 그 속에서도 획일화가 피어난다. 의사들 사이에서는 서울로의 획일화도 계속해서 피어난다. 지방 병원은 필수 진료과 진료의를 구하기가 힘들어지고 병원이 필요한 사람은 서울로 획일화 당한다.


우리는 언제부터 이 꽃밭에서 헤매고 있던 것일까 도대체 언제부터 같은 생각과 같은 경험을 같게 되었을까?

김현준 교수님은 학교의 건축을 지적한다. 같은 교복에 같은 음식을 먹으며, 진학해도 전학해도 같은 디자인의 학교는 자그마치 12년 동안 우리를 반긴다. 직접 느껴보지는 못했지만 모두가 붉은 악마와 손을 잡았던 2002년, 모든 TV에서 월드컵만을 상영하던 그 획일화도 조금은 스산하다.

우리는 어쩌면 단 한 번도 그 자체로 존중받아 본 적이 없는 건 아닐까? 초중고를 다녔던, 취업을 준비했던, 가족과 패키지여행을 했던 '우리'의 경험 말고 '자신'의 기억을 떠올려보자. 획일화 꽃밭에서 한 번이라도 벗어나 개성의 동산을 밟아본 적이 있었는가. 복제인간이기를 자처하지는 않았는가?


한국의 위대한 기록들이 이를 증명한다. 우울증, 자살률 1위, 출산율, 행복도 뒤에서 1위까지. 물론 그 원인이 획일화 하나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적어도 다양성이 우리가 지켜내 볼만한 하나의 빛인 것이다.

노동의 양으로 성장하는 시대는 이제 저물고 있다. 저출산으로 노동자도 줄었을뿐더러, 고학력화는 그들 자신이 회사의 톱니바퀴가 아니라는 사실을 지각시켜 주었다. 인구도 노동도 우리는 양보단 질을 봐야 하는 시기가 오고 있는 것 같다.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 대학에서 취업까지. 좋은 다음 단계를 위해 달려가는 사람들. 조금이라도 다른 생각을 했다간 금세 뒤쳐져 버리는 시스템은 이제 버려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개성이 필요하다. 다양성, 개인의 변이가 필요하다. 변화하는 세상 앞에서 누가 적응하고 빛을 발할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버거킹 메뉴 (일부)

버거킹 메뉴보다는 우리 삶의 종류가 더 다양해야 하지 않을까...?




한 발짝 앞으로

개성이 존재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아마도 경쟁의 다양화이지 않을까 싶다. 다양한 일자리와 선택지가 유명무실한 무언가여선 안된다. 내 인생이 그쪽으로 흘러가도 만족스럽게끔 만들어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특히 과학분야를 이번 R&D 삭감 계획과 엮어 얘기해 볼 수 있다. 기초과학을 포함한 대부분의 과학 연구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많다. 하지만 이번 삭감 계획에서 정부는 사업평가를 해보고 하위 20%에 해당하는 연구는 정리하겠다고 발표했다. 당장의 성과를 챙겨야 한다는 것은 실패를 용인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도전은 줄어들 것이고 변화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는 자연스럽게 기초과학을 포함한 과학계로의 기피로 이어질 것이다.

워라밸 챙기면서 돈도 더 많이 받을 수 있는 실력을 갖춘 사람들의 노력과 연구를 우습게 알기보단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

독일에는 32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협회가 있다. 바로 막스 플랑크 협회이다. 연구비는 정부에서 주고 있지만 간섭하지 않는다. 이들은 외부인의 평가대신 내부 전문가 집단의 평가를 통해 연구 성과를 평가한다. "연구는 자율적이어야 한다"라는 철칙 아래에 관료주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선진적인 문화는 열린 자세로 배울 수 있으면 좋겠다. 막스플랑크 협회에서 연구를 비즈니스로 전환하는 과정까지 지원해주는 것 같은 좋은 점들 말이다.

과학분야 외에도 해외의 좋은 사례들을 벤치마킹해서 다양한 직업과 선택지에 경쟁할만한 가치가 생긴다면 우린 다양성에 한 발짝 다가설 수 있지 않을까.




내가 할 수 있는 생각은 여기까지였다. 내 지식이 부족하기도 하고, 앞으로 한국과 세계는 어떻게 변화할지 알 수 없으니..

세상이 하나의 기준 따위 없이 다양하길 바란다. 모든 걸 그 자체로 존중해 주길 바란다. 그런 유토피아가 오기를 난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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