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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상 Aug 18. 2023

영원, 개나리 그리고 속도



"영원한 회귀란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를 곤경에 빠뜨렸다."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밀란 쿤데라는 무거운 것-가벼운 것에 대한 모순을 다루기 위해 이 주제를 꺼냈다. 나는 내 인생의 모티프인 영원, 개나리, 속도를 다루기 위해 같은 사상을 꺼내보고 싶다.




'영원한 회귀를 하는 세상'에서의 삶을 상상해 보자. 내가 행하는 모든 일들이 다음 삶에서도 다다음 삶에서도 영원히 반복된다면 나의 몸짓 하나하나는 견딜 수 없는 책임의 짐을 떠맡게 될 것이다.

살인, 방화 같은 강력범죄는 더 무거운 책임을 떠맡게 될 것이며, 걸으면서 핸드폰 보기,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상처주기는 이전처럼 무뎌진 감정으로 행할 수 있는 행동은 아닐 것이다.


반대로 내가 느낀 행복 또한 영원히 반복된다면 어떨까? 그 뜨거웠던 사랑도, 아스팔트에 핀 꽃을 찾아낸 기쁨도 반복된다면 조금은 오늘을 더 즐길 수 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내 삶이 영원한 회귀를 한다는 것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삶에 대해 좋은 질문을 던져줘서 감사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정작 나의 세상은 영원히 반복되지는 않으니 잊고 내일 출근할 준비나 하게 되는 그저 그런 사상일 것이다.




"마음을 열고 들으면 개가 짖어도 법문이다."

일이든 관심이든 영원회귀에 대해 마음을 열고 고민한 철학자들은 밀란 쿤데라가 말한 것처럼 대부분 곤경에 빠졌을 것이다.


내 삶이 영원하지 않은 게 현실이고 팩트이니 영원히 반복된다는 것은 분명히 잠시 동안의 고민거리였다. 하지만 영원하지 않음을 아는 그 순간에 영원회귀 사상은 또 다른 생각을 떠올리게 해준다.


한번 떠나가면 나의 인생은 이 세상으로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산다는 것은 아무런 무게를 가질 수 없다. 그리고 이 사실을 믿는 순간 그 아무리 추악하거나 아름다운 것들도 무의미해져 버린다. 모든 세상사는 곧 사그라질 덧없는 것들처럼 느껴진다. 철학자들이 쌓아 올린 지식들은 그 깊이를 잃을 것이고, 늙어 쓰러질 이 몸처럼 오늘 아침 해의 햇살도 쏟아져 없어질 것이다.


이제는 유한에 대한 감정이 피부로 와닿기 시작한다. 하지만 영원하지 않음을 아는 그 순간에 영원은 더 아름다운 지위를 부여받는다.


헤로와 레안드로스의 이별 - 윌리엄 터너

터너의 그림 속 주인공인 헤로와 레안드로스는 가운데에 작게 그려져 있다. 그들보다 강조되는 것은 그들에겐 덧없을 파도와 달을 감싼 구름이다.




모래 위에 손을 포개고 붉어진 바다를 바라보며 연인이 영원한 사랑을 다짐한다.

모든 게 덧없는 사랑임을 알면서도 연인들은 사랑에 젖어들곤 한다. 노을과 바다 앞에서 찰나에 가까운 자신들의 영원을 자랑한다. 그때의 사랑은 뭐란 말인가 그 순간에 나를 지배하는 사랑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카뮈는 유한성을 이기는 그 감정이 '절망적인 사랑'이라고 말한다. 유한하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절망적으로 그 순간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절망적인 사랑에 심취하여 내가 유한하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영원을 믿게 되는 것이다. 사랑에 깊이 빠진 순간만큼은 사랑이 영원할 것을 믿듯이.


'유한하기에 절망적인 대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매우 용기 있는 일이다. 그 용기 있는 행동의 대가는 영원에 닿는 것이다. 유한한 대상을 사랑함으로써 나의 유한성을 잊고 영원에 가까워지는 것.

사랑이 숭고한 이유인 것 같다.


 핑크빛 하늘이 이쁘다며 사진을 찍는 내가, 손 꼭 잡고 걸어가는 연인들이, 라일락 꽃향기를 사랑하는 내가. 절망적인 사랑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절망적인 사랑이 얼마나 숭고한지를 이제는 안다.


"세상도 사랑도 아름답지만 허물어지게 마련이다. 그 아름다움을 절망적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영원의 아름다움은 더욱 진해진다.




"태양과 밤과 바다...는 나의 신들이었다"

태양, 밤 그리고 바다 그들은 인간의 유한성, 불가능한 사랑에 대하여 생각하는 자만이 섬길 수 있다.

개나리는 곧 사라질 가엾은 꽃이자 내게 영원을 믿게 하는 신이다.

당신도 개나리의 아름다움을 느껴보길 바란다. 어떤 시인의 말처럼 꽃 필 때 사랑이 느껴지고, 꽃이 질 때에는 슬픔을 느낀다면 그 순간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개나리뿐만이 아니다. 버드나무 사이로 딸랑대는 햇살도, 밤에 보이지도 않게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도 전부 신이다. 나만 느낄 수 있는 게 아니다. '당신의 발치에 있는 개미'도 '나의 좁고 추운 방‘도 '당신을 웃으며 바라봐주는 그 사람'도 마찬가지로 당신을 영원으로 대려갈 수 있다. 행복이 멀리 있지 않다는 말은 이렇게 증명해 낼 수 있는 것이다.


부디 그들을 절망적으로 사랑해 보길 바란다.


Panoramic Landscape With Travelers Standing ... - 알베르트 코이프

처음 코이프의 그림을 봤을 때 말 두 마리와 두 여행자에게 시선을 빼앗긴다. 그리고 우연히 한 여행자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눈길을 돌리면 감동과 함께 펼쳐진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이.




"절망적인 사랑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데에 필요한 속도"

세상은 빠르게 변해간다. 누구나 그렇듯이 나 또한 그 속도에 나를 맞추고 싶었다. 심지어는 그 속도를 넘어서고 싶었다. 일찍이 사회에 나왔고 체계적인 시간표로 사회생활의 토대를 잡아갔다. 근무하고 집에서는 창업에 대해서 생각했다. 정부의 지원사업에 꾸준히 도전했고 꾸준히 실패 경험을 쌓아갔다.


삶을 바꾸는 순간은 우연히 찾아오곤 한다. 아니 우연은 항상 우리 주변에 있지만 우린 무심코 지나치곤 한다. 이번에는 운이 좋았다. 매일 다니던 길가의 개나리를 우연히 발견했다. 봄의 시작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그들은 내가 보든 말든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 있었다.


남들보다 빠르게 걸어나간다고 자만하던 나는 개나리 앞에서 나도 모르게 걸음을 늦췄다. 매일 걸어가는 그 길을 천천히 관찰했다. 그리고 그런 나에게 세상은 영원의 기쁨을 주었다. 나무는 매미를 빌려 우리에게 말을 전했고, 실외기 옆에 난 풀들은 더위에 한숨을 쉬고 있었다. 이후로는 감각을 세우고 걸었다. 나의 속도는 더욱 느려졌다. 나무는 그 자체를 물끄러미 바라볼 때 더욱 아름다웠고, 비 온 뒤의 아스팔트에는 보석들이 맺혀있었다.

언제나 그랬다. 내가 보지 못했을 뿐.


영원하지 않은 그 모든 것들은 항상 그 자리에 있다. 그들을 보기 위해선 나의 속도를 그들에게 맞춰야만 했다. 나의 속도는 0에 수렴해가고 있었다.

종착역이었다.


비, 증기, 그리고 속도 - 윌리엄 터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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