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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상 Mar 06. 2024

영화 박쥐 평론

엄마가 부를 때는 꿀돼지. 아빠가 부를 때는 두꺼비. 누나가 부를 때는 왕자님. 어떤 게 진짜인지 몰라 몰라. 몰라.




끝없는 하강

"머리에 종양이 든 환자처럼 올바른 지력을 갖지 못하게 하시고, 영원히 순결에 바쳐진 부분을 능욕하여 어떤 자부심도 갖지 못하게 하시며, 저를 치욕 속에 있게 하소서. 아무도 저를 위해 기도하지 못하게 하시고, 다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만이 저를 불쌍히 여기도록 하소서"


상현은 자학적인 기도를 한다. 자신을 세상의 정과 선망으로부터 격리시켜 달라는 기도를 한다. 상현은 정말 이런 사람이다. 자신을 백신 임상실험 도구로써 버리는 용기. 실험 대상자 500명 중 유일하게 살아남았음을, 우연히 선보인 기적을 심리적인 효과 취급하는 겸손. 그는 매일 같은 기도와 수련으로 지금까지의 정신세계를 쌓아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 높고 거룩하던 상현의 신념은 순식간에 무너진다. 자신을 살린 기적은 스스로를 남의 피를 갈망하며 살 수밖에 없는 뱀파이어로 만들었고 이에 그는 병자의 피를 마시며 인간으로서의 추락을 경험한다. 그 후 태주에게 육체적으로 이끌리며 온갖 자해에도 불구하고 성교를 하게 된다. 그렇게 사제로서의 추락 또한 경험한다. 그것뿐인가 태주의 욕망에 이용당한 그는 강우를 죽이며 인간 사이에 끼어살아가는 존재로서도 추락했다. 노신부의 앞을 보고자 하는 욕망에 실망하여 그를 죽이면서 상현은 또한 사랑받는 주체로서도 추락한다. 결국엔 태주마저 살해하며 사랑하는 주체로서도 추락하게 된다. 그는 끊임없이 하강한다. 끝없이 전락한다.


인간의 고결한 정신이 무너지는 혹은 무너뜨리는 것은 쉽고 또 그 배덕감은 짜릿하다. 그리고 인간은 하강한 자신에게 너무도 쉽게 적응한다. 마치 태주를 안고 건물 이곳저곳을 너무도 쉽게 뛰어다니며 하강하는 것 같이. 사랑하는 사람을 죽여놓고 피나 빨게 되는 것 같이.


그러나 건물에 다시 오르기 위해 상현은 태주를 안고 계단을 올라야 했다. 인간의 무너진 신념은 이토록 복구하기가 어려운 걸까. 끊임없이 추락하고 합리화를 반복하는 하강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태주의 피를 미친 듯이 빨던 것을 쳐다보던 라여사의 눈 같은 마지막 양심을 붙잡아 한 계단 한 계단 천천히 다시 쌓아나가야 한다. 허황된 성자를 섬기는 추종자들에게 추한 모습을 보여야 하고, 떠오르는 태양 앞에 온몸이 타들어가는 고통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결국 눈을 감아야 한다. 끝없이 전락할 자신을 멈추는 방법은 죽음. 그것이 구원의 길.



그 이중성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자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사흘 만에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나신 그의 모습.

인류를 위해 스스로 백신개발의 임상실험자로 참여해 사망한 상현. 그리고 수혈받은 피로 뱀파이어로 부활하여  육체적 권능을 갖게 된 그의 모습. 붕대에 감긴 채로 십자가에 매달린 붕대 감은 성자.


그러나 그는 인간의 피가 없으면 살 수 없다. 하나님의 아들이자. 인간을 언제나 쳐 죽일 능력과 더불어 죽이고자 하는 욕망까지 갖게 된 인간. 신? 아니, 그 사이의 존재 박쥐. 뱀파이어이다.

사제라는 직업과 육체적 욕망. 인간이었던 과거의 인간애와 뱀파이어라는 있음. 현존재. 피와 살인에 대한 욕망. 그것이 상현이다.


그 박쥐 같은 이중성은 영화 내내 반복된다.

다른 사제를 자식같이 아끼며 원한다면 자신의 피도 내어줄 정도의 사람이지만, 끔찍한 뱀파이어가 되어 해에 타게 되더라도, 일출을 한 번은 봐야겠다는 시력장애를 가진 노신부.


남의 개로 살던 인생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기 위해 살인을 유도하나, 정작 살인으로 인해 펼쳐진 파탄과 혼란 속에서 남탓과 죽음으로 도피하고 싶어 했던 태주.


사람을 죽여 피를 얻지는 않으나 자살하는 사람의 피를 흡혈해 자살을 돕고, 의식 없는 환자의 피를 동의 없이 죽지 않을 만큼 뽑아 보관해 두는 상현.


엄마에겐 사랑하는 아들이지만, 태주에게는 구속구나 다름없었던 강우.


맨발로 달리는 태주에게 자신의 체온이 담긴 구두를 벗어주고 또 뜨거운 성교를 나누었지만 결국 살인

과 한 가정의 파탄을 불러온 사랑.


누군가에겐 뱀파이어가 되면서까지도 보고 싶은 것이지만, 누군가에겐 보게 되면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 해.


그 이중성이 영화를 이끌어나간다. 우리의 세상도 이끌어나간다. 파멸로도 구원으로도. 이중성의 이중성인가.

총, 칼, 피, 약물, 전쟁, 배고픔, 사랑, 냄새, 종교, 강아지, 인간, 인터넷, 핸드폰, 바다, 바람, 해. 그 이중성. 악과 선 사이의 존재에게서 우리의 혼란이 드러난다. 세상의 진실이 드러난다.



엄마가 부를 때는 꿀돼지. 아빠가 부를 때는 두꺼비. 누나가 부를 때는 왕자님. 어떤 게 진짜인지 몰라 몰라.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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