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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상 Mar 07. 2024

영화 시 평론

그럼에도 받아야 하는 것은 벌. 그렇기에 써야하는 것은 시.



필사적인 열정으로 바라봐야 하는 것

시를 가르치는 선생님, 김용탁은 시를 쓰는 방법으로 모든 것을 제대로 보기를 제안한다. 알고 싶어서, 이해하고 싶어서, 대화하고 싶어서 보는 것이 제대로 보는 것이다. "무엇이든 진짜로 보게 되면 뭔가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게 있어요." 이것이 시를 쓰는 방법이다.


영화 속에서는 공공장소에서 전화벨이 크게 울린다거나, 통화한다거나, 수업에 늦어 의자를 끄는 소리를 내는 등 두드러지는 행동을 할 때 다른 주변 인물들이 그 대상을 바라보는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

제대로 바라보는 게 아닌 그저 시끄러워서 눈치를 주려고, 뭔 일인가 싶어서, 습관적으로 바라본다.


병원에서 나오는데 울고 있는 모자가 있다. 양미자, 욱이 할머니. 그녀는 지금 그런 차가운 시선으로 그 둘을 바라본다. 공공장소에서 통화하는 사람을 쳐다보듯, 어떤 연관도 없는 물체를 보듯.


손자와 동갑인 희진이의 자살. 그것에 자신의 손자가 연루되었음을 미자는 가해자 부모 모임에서 알게 된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시상을 찾으려는 평상시 움직임처럼, 방패라는 꽃말을 가진 맨드라미를 아는 것과 같이 공부해야 했으나 듣기 싫은 말에 귀를 닫고 화단에 핀 맨드라미나 제대로 보려 한다.

그녀는 정말 관심 있어야 하는 것에서는 멀어져 간다. 자신이 알츠하이머라는 사실보다 병원의 동백, 그 붉은 꽃이 고통의 꽃이라는 사실에 집중했던 것처럼.


그러나 미자가 제대로 보고 있던 그 동백이 조화라고 말하는 의사의 말에, 그녀가 의미 없는 곳에서 시상을 찾으려고 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시상을 찾으려 중요한 걸 잊고 살아가는 그녀가 드러난다.


그 시상은 용탁의 말처럼 언제나 그녀의 곁에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조금씩 곁에 있는 시상에게 다가간다. 점점 아래를 내려다보고 다가서기 시작한다.

희진이를 위한 성당의 미사에서, 희진의 가정을 방문해서 보게 된 희진이의 사진에서, 우연히 만난 희진이의 엄마에게서, 성당에서 훔친 액자로 손자의 반응을 시험해서.


미자는 자신을 꾸미는 걸 좋아한다. 겉면에 드러내기. 특히 그녀가 매일 입는 화려한 옷은 시골에 맞지 않는다는 소리도 듣는다. 또한 그녀에게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은 어릴 때 자기가 진짜 이쁘다는 것을 안 순간이었으며 , 젊은 시절 얘기나 뭐 외모 칭찬만 나오면 말이 늘고 함박웃음을 짓는다.


그런데 그녀가 시상을 얻고 자신의 시를 완성할 때의 복장은 편하고 후줄근한 잠옷이다. 자신에게만 집중하던 그녀가  처음으로 남을 제대로 바라봤다는 것이 자신을 꾸미지 않은 그녀의 옷에서 드러난다.



수업의 마지막날 결국 시를 쓴 사람은 미자뿐이다. 시 쓰기가 너무 어렵다는 다른 학생들에게 용탁은 말한다. "아뇨, 시를 쓰는 게 어려운 게 아니라 쓰겠다는 마음을 갖는 게 어려워요."

진정 어려운 건 자신이 직시해야 하는 것을 확실히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만 충족되면 자연스레 시상이 찾아오니 어떤 뛰어난 시인도 그 추상적인 절차를 완벽하게 미자에게 설명해 낼 수는 없었다.



미자의 글이 처음으로 시가 되었던 순간

영화 중반까지만 해도 3,000만 원의 위자료로는 아무 진전이 없던 피해자와 가해자들 간의 합의가, 영화의 후반 미자가 피해자 박희진의 집을 방문해 우연히 그 어머니와 대화를 하고 난 이후 같은 조건으로 체결된다. 그러니 그 영향은 미자에게 있을 것이다.


미자가 희진의 엄마를 만났을 때 치매 때문일까. 자신이 그곳에 간 이유, 이전에 봤던 희진이 엄마의 얼굴을 잊은 채 오면서 본 살구에서 얻은 시상을 이야기한다. "살구는 참 간절한 거 같아요. 지몸을 땅에 던져서 지몸을 막 깨지고 밟히게 해서 다음생을 준비하잖아요?"


박희진, 3학년 여자. 자살. 일기장에서 발견된 자살의 이유, 같은 학교 남학생 6명 성폭행. 그것은 살구의 것과 닮아있다.  희진이도 간절했을까. 지몸을 물속에 부르트게 하며 다음생을 원하고 있었을까.


그녀는 떨어진 살구를 통해 희진이를 더 깊이 관찰했다. 비록 완전히 시가 되진 못했으나 그녀의 주변에 맴돌고 있던 시상에 가장 가까운 관찰이었다. 그리고 그건 적어도 시로써 작용했다. 비유와 함축적인 생각으로 사람의 마음을 돌렸으니.



마지막 시

피해자와 가해자 간의 합의도 잘 되었으니 이제 위자료 3,000만 원만 넘어가면 모든 것이 끝이다. 가해자 부모들은 짜장면에 술이나 한 잔 기울인다. “이제 다 끝인가요.. 완전히.” 그러나 희진이를 더 깊이 바라본 미자는 감상이 그들과 다르다. 다른 가해자 부모가 대답한다. “성인이면 끝인데 이 미성년자의 경우 누가 경찰에 고발하면 수사를 해야 한다고 해요. 뭐 그래도 학교에서 얘기도 끝. 언론도 막았고 피해자 가족과도 합의를 했으니 됐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미자와 배드민턴 치던 손자를 경찰이 데려간다. 그리고 미자는 경찰과 비극의 배드민턴을 이어간다.

그 신고는 미자가 직접 했다. 그 사건이 이대로 끝나지 않기 위해선 경찰 조사가 착수되어야 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 시골에 몇 없을 뿐 아니라, 자신의 손자를 집어넣는 경찰과 한가로이 배드민턴을 칠 수 있는 할머니가 얼마나 있을까.


그녀는 그렇게 희진이에 대하여 더욱 깊이 바라보게 되었다. 그제야 시가 쓰인다. 완벽한 시상. 그녀는 편한 복장으로 열심히 적어 내린다.


그 시가 의도한 화자의 목소리로 시가 읽어지며 영화는 끝난다. 집으로 온 딸. 없어진 엄마. 미자처럼 나무를 바라보는 할머니. 훌라우프하는 아이들. 떠나는 버스. 여름의 학생들. 나비가 반가운 개. 버스와 달리기 하는 아이. 도착하는 버스, 어쩌면 떠나는 버스. 해 질 무렵 노는 아이들. 다리. 그 아래 검은 강물. 뒤를 돌아보는 희진. 물로 들어가는 카메라.


미자가 죽었을지. 살았을지. 죽었다면 치매로 인한 행동인지 자살인지 알 수는 없다. 영화는 그 어떤 것도 시각적으로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미자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남긴 시. '아네스의 노래'를 통해 그녀가 사과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녀는 시각적으로 그 시를 통해 희진이가 된다. 비로소 그녀를 완전히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마 마지막으로 그녀를 해친 건 그녀가 유일하게 바라보지 못한 시상인 자신이자 알츠하이머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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