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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상 May 02. 2024

영화 애프터썬 평론

선연하고 선연하며 선연해 보이는 영화



우선 엉켜 있는 플롯부터 정리하고 시작하자

(아마도) 31살이 된 소피는 아버지에 관한 꿈을 꾼다. 명멸하는 클럽 같은 실내 공간에서 여러 사람 사이에 엉켜 흥분 혹은 고통스러워하는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잠에서 깬 31살 소피의 옆에서 애인으로 보이는 한 여자가 일어나 생일을 축하한다. 침대에서 일어나 아버지와의 추억이 담긴 카펫을 밟고 거실로 나가서 어린 시절 자신이 찍었던 비디오를 돌려본다. 11살 때 자신과 아버지와의 튀르키예 여행이 담긴 영상들이다.


11살 소피의 모습이 담긴, 20년 전에 찍은 비디오들은 현재의 우리가 보기엔 화질이 터무니없이 떨어진다. 그런데 우린 영화 속에서 11살 소피의 모습을 4k로도 볼 수 있다. 정말 31살 소피가 과거의 영상을 하나 둘 돌려보고 있는 것이 영화의 내용이라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걸까. 그리고 어떻게 여행의 모든 것이 이렇게 세세히 기록되어 있을 수 있는 걸까.


그것은 선명한 영상들은 전부 31살 소피의 회상이며, 기억이기 때문이다. 그런즉 영화 속 모든 이미지가 곧 사실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특히 11살 소피의 시선 밖에서 벌어지는 사건들. 아버지가 자신을 재우고 베란다에서 담배를 태우며 몸짓을 한다던가, 아버지가 바다로 걸어 들어간다거나, 아버지가 카펫을 구매하고 그 위에 눕는 것 같은 이미지는 특히 사실이 아니다.


따라서 영화 속 대부분의 시간을 채우는 것은 31살 소피의 상상이 섞인 추억에서 비롯되며 영화는 곧 소피의 욕망 섞인 주관이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11살 소피는 너무 어렸다. 아버지가 속에서부터 무너지고 있다는 걸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아마 31살 소피의 시간에서 아버지는 편지 한 장 남겨두고 이미 돌아가셨을 거다. 그 여행 동안 아버지는 자기 파괴의 충동과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31살 소피에게는 이제 그것이 보인다. 그리고 31살 소피가 발견한 어두운 면은 검은 바다로 홀로 걸어가는 아버지의 이미지로 그려진다.


또한 11살은 애매한 나이이다. 마치 중동과 유럽, 동양과 서양 사이의 튀르키예의 지정학적 위치처럼.

11살의 소피는 자신의 정체성을 열심히 찾았다. 어른의 섹슈얼리티를 동경해 보기도, 어른들의 스포츠를 바라며 하늘을 바라보기도 한다. 또래의 이성도 사랑해 본다. 11살의 소피는 점점 어른이 되어간다.


그러나 이 또한 31살 소피의 기억. 그런즉 언제든 허구가 가미될 수 있는 것이다.

점점 어른이 되어가는 소피와 아버지의 관계는 어느 순간 역전된다. 소피에게 이불을 덮어주던 아버지에서 아버지에게 이불을 덮어주는 소피로, 소피에게 선크림을 발라주던 아버지에서 아버지에게 머드를 발라주는 소피로. 보호자와 피보호자의 관계는 역전된다.


당시 아버지와 같은 나이인 31살이 돼서야 당시 아버지의 아픔이 보이고, 그것을 보듬아주고 싶은 마음이 그녀의 상상 속에서 드러난다. 다시 31살 소피의 욕망이 관객에게 말을 거는 순간들이다.



기억은 단편적이다

마치 명멸하는 클럽 속에서는 순간순간만이 포착되며 광란의 몸짓에 연속성 따위 띄지 않듯이.

(그런즉 영화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클럽 같은 장소는 소피의 기억 속일 것이다. 마지막에 아버지가 문을 열고.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은 영상을 다 본 소피의 기억 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은유는 아닐까.)


단편적인 것은 또한 영상 매체의 속성이다. 현재의 전부를 담을 수 없다는 한계, 단편적인 컷들이 합쳐져 몽타주를 이루고 영상이 되기에 시공간을 넘나 든다는 장점.


<애프터썬>은 11살 때의 과거가 녹화된 영상을 재생하고, 부족한 영상의 내용은 31살 소피의 욕망으로 채워나갔다.

그렇게 영화는 두 단편적인 요소를 이용해 볼 수 없는 것(31살 소피의 과거)을 시각화했고, 관객들로 하여금 이 영화가 "곱고 예쁘고(嬋娟), 산뜻하고 아름다우며(鮮姸), 실제로 보는 것처럼 생생한(鮮然) 기억"이라고 착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선명한 영상이 전부 소피의 회상임을 인지하면 우리는 알 수 있다. 31살의 소피는 31살의 아버지를 보며 죄책감에 시달리고, 그리워하고, 위로받고 있다는 것을.




어젯밤 꾼 꿈을 들어다 본 적이 있는가. 과거를 들춰내본 적은. 그 사이에 스토리를 입혀 상상해 본 경험이 있는가.


모든 것은 단편적이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의 모든 것. 그 순간만이 우리 눈에 담긴다. 엄밀히 과거는 없는 것이니까. 그러니 무언가가 연속적으로 느껴진다면 그 사이에 우린 스토리를 입힌 것이다. 우리의 욕망을 입힌 것이다. 가치관을 입힌 것이다.


After Sun은 햇볕에 탄 피부에 바르는 선크림이다. 단편적 과거를 바라보며 치유라는 욕망을 담아 과거를 그려나가는 31살의 소피처럼. 자신을 태웠던 해를 추억하며 바르는 크림인 것이다.


우린 어떤 After Sun을 바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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