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 전사만이 열어볼 수 있는 용의 문서에는 오로지 자신의 모습만이 비쳐 보였다. 그뿐이었다.
영화는 '극'인 1장과 그걸 본 동수의 시점에서 펼쳐지는 2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영화 내에서의 실질적 구분은 없으나 글의 편의를 위해 임시로 구분한다.)
위 포스터에서도 보이지만 놀랍게도 극장전의 한자 표기는 전할 전傳이 아닌 앞 전前이다.
그러니 극장전은 홍길동전 같이 '전해주는 이야기'가 아니라. '극장의 이전'을 말하는 것이다.
전前이라는 명사가 우리 일상에서 쓰이는 형태는 모호하다. "전에 살던 곳", "전에 다니던 회사". 같이 기준이 되는 때를 제시하지 않은 상태에서, 아주 가깝지도, 아주 멀지도 않은 과거를 다소 막연하게 이를 때 사용하기 때문이다.
일상 속 화법에서의 前의 전달 방식과 이 영화의 화법은 닮아있다.
마치 전前이라는 명사가 과거와 현재를 막연하게 잇듯이, 영화에선 가상과 현실을 그저 막연하게 잇는다.
영화와 같은 위치에 우뚝 솟은 남산타워, 실명으로 출연한 익숙한 배우들, 영화의 배경이 되는 장소에서 자꾸 만나게 되는 영실, 영화에서와 똑같이 <다시 사랑한다면>을 부르는 영실, 영화와 똑같이 갑자기 배를 움켜쥐며 모텔로 들어가는 영실의 수법(?), 영화와 똑같은 영실의 젖가슴.
그렇게 가상인 1장과 현실인 2장의 경계는 자꾸만 허물어진다.
그러나 이런 기준들을 좇으며 정신없이 영화를 보다 보면 우린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된다.
동수와 애증의 관계인 이선배가 병으로 앓아누웠을 때 동수는 영실과 술자리를 갖는다. 동수 자신이 비밀스럽게 얘기해 줬던 자전적 현실을 이선배가 맘대로 영화화했다며 불평만 늘어놓는 그에게 영실은 한 마디 한다. "근데 그런 게 지금 그렇게 중요해요?" 동수는 당황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중요한...거요?"
카메라는 장난스럽고 또 아마추어스럽게 동수의 얼굴을 줌 인한다. 그의 표정이 우리의 표정과 닮아 있기를 바라면서...
이제 헛된 것은 그만 좇자. 영실의 일침에서 느꼈듯. 우리가 집중해야 할 중요한 것은 현실과 가상의 간극이 아닌. 극장전劇場前, 극장의 이전에 대하여다.
그러니 가상에도 있고 현실에도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만 있는 것이 劇場前이다.
극장의 이전에는 무엇이 있는가. 물론 극 이전에는 광고가 있지만, 그 한 단계 이전에는 그걸 보는 동수가 있고 영실이 있다.
동수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 인물은 죽음을 앞둔 이선배에 대한 시기 그러나 우정, 영실에 대한 깊은 끌림 그리고 자살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그의 삶은 죽음으로 가득 차 있다.
1장의 극 속에서 영실과 함께 자살 기도 하는 상원(1장의 주인공, 어쩌면 동수)의 이야기가 정말 동수의 자전적 얘기라면 그는 꽤 오랜 시간 자살에 대하여 긍정적 고민을 해 온 것이다. 그러니 영실과 섹스를 한 날 영화에서처럼 그녀에게 권유한다. "우리 진짜 죽어버릴래요? "
극장 이전에는 그걸 보는 동수가 있었고, 동수에게 중요한 질문은 아마도 자살일 것이다. 자살은 사실 꽤나 진지한 질문이다. "이 세상이 정말 살 가치가 있는 것인가" 인간이 평생을 달고 살 천벌이다.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긴 이선배는 같은 말만 반복한다. "더 살고 싶어. 죽기 싫어"
1장의 극 속, 40개가량의 수면제를 털어 넣은 영실은 새벽에 극적으로 깨어났을 때 그것들을 전부 게워낸다. 필사적으로. 그리고 그날의 첫눈은 유독 아름다웠다.
1장의 극 속, 엄마에게 상처받아 혼자 옥상에 올라간 상원은 떨어져 죽지 못한다. 그리고 그날의 노을은 유독 빨갛다.
"우리 진짜 죽어버릴래요?" 동수의 질문에 영실은 이렇게 대답한다. "계속 누워 계실 건가요? 저는 갈게요." 놀라운 순간이다. 가상과 닮은 현실이 전복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동수의 현실이 1장의 극과 같다면 함께 자살을 기도해야 할 그녀는 현실에선 죽음을 거부한다.
동수는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아니. 어쩌면 죽어가야 할까. 1장과 같이 삶의 환희를 맛봤다가 다시 자살을 기도하고 실패할까. 혹은 그게 전복될까.
"이제 생각을 해야겠다. 정말로 생각이 중요한 거 같아. 끝까지 생각하면 뭐든지 고칠 수 있어 담배도 끊을 수 있어(담배를 피우며). 생각을 더 해야 해 생각만이 나를 살릴 수 있어. 죽지 않게 오래 살 수 있도록."
영화의 마지막 장면, 동수의 생각이 우리 관객에게 들린다. 마치 1장의 극에서 내레이션이 상원의 속마음을 알려주듯. 내레이션이 우리 관객에게 동수의 속마음을 읽어준다.
1장의 극에서 <어머니>라는 극을 보던 상원에서, 상원의 내레이션을 듣던 동수에서, 동수의 내레이션을 듣는 우리로 영화의 주체가 바뀐다.
그렇다. <극장전>도 극이다. 그리고 <극장전>의 劇場前은 우리. 나. 진짜 현실의 관객이다.
곧바로 헷갈리기 시작한다. 영화와 현실의 벽이 무너진다. 영화를 보는 동수는 영화는 보는 나와 닮아 있고, 죽음 속에서 허우적대는 인물들, 시기하고 격렬히 사랑하는 인물들은 나와 닮아 있다. 아 무엇이 현실인가.
어떤 영화는 우리의 삶과 굉장히 닮아 있다. 그러나 주인공의 비극에서 내가 보이고, 수육受肉의 신비가 격렬히 잡고 싶은 동아줄로 보일 때. 그럴 때일수록 우린 그전에 있는 자신을 바라봐야 한다.
거북목에 허리 굽힌 채 영화에 몰입한 자신의 자세부터 인지하자. 그리곤 이 세상이 살 가치가 있는지를 고민한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생각하라. 죽지 않게 오래 살 수 있도록. 담배도 끊을 수 있다. 어쩌면 윤회의 고리도. 지옥의 불구덩이도 피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