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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상 Apr 19. 2024

영화 버드맨 평론

투명한 가상의 옷을 입고, 현실에 선 벌거벗은 임금님




리건, 할리우드의 스타, 버드맨. 그는 바닷속으로 추락했다. 왕년의 인기 대신 주름과 흉하게 붙은 살만 남았다만 그는 다시 비상을 꿈꾼다.


그가 가진 욕망은 오프닝에 나오는 레이먼드 카버의 시에서 드러난다.

"그럼에도 당신은 이 삶에서 얻고자 하는 것을 얻었나요? / 네 / 그게 무엇이었나요? / 내가 지구상에서 사랑받는 존재라고 느끼는 것"


그는 브로드웨이에서 다시 태양에 닿기를 원한다. 그러나 버드맨으로서가 아닌 로건으로서 자신이 여전히 건재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다.


그의 주변의 인물들은 그의 등반을 방해한다. 딸 샘, 비평가 디킨슨, 주연 배우 마이크.

어떻게 해야 밀랍을 지켜내 태양에 닿을 수 있단 말인가.



가상과 현실의 치정관계

연극은 가상假像이다. 실물처럼 보이는 거짓이다. 그러나 연극의 역할은 현실에 대하여 논하는 것이다. 그러니 연극은 인생의 축약판이기도 하다.



이상적인 연기자란 어떤 모습일까. 

'무대 위에서 진실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버드맨의 마이크가 그러하다. 그는 술에 취한 연기를 위해 무대 위에서 술을 마시고, 베드씬을 연출하기 위해 여자 배우를 겁탈하려 한다.

그는 무대 위에서 맡은 캐릭터의 인생을 그대로 담습 하는 듯, 가상을 현실로 인지한다. "나 말곤 아무도 진실에 관심 없는 건가?" 취한 연기를 위해 술에 취한 그가 동료 배우에게 내뱉은 말이다.


그러나 그의 현실은 너무도 초라하다. 길거리엔 그를 알아보는 사람 하나 없고, 발기부전에, 잠자리 상대에겐 사기꾼 소리나 듣는다. 그는 가상 속에서 진실되며, 현실에선 진실을 연기하고 있다.



이상적인 연기자의 다른 모습도 있을까.

'연기에 몰입하여 현실에도 그 영향을 끼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버드맨의 리건이 그러하다. 리건은 현실에서 초능력을 쓸 수 있다. 버드맨 당시 자신이 다루었던 능력들이 자신의 눈앞에서 자꾸 발현된다. 공중부양을 하고, 염력으로 온갖 물체를 집어 부순다.


그러나 그의 현실은 그저 택시값 안 내고 도망가는 퇴물이고, 물건을 손으로 집어던지는 분노조절장애이다.

그가 갖고 있는 가상과 현실의 괴리는 종이 한 장 두께에 불과하다. 

브로드웨이에서의 성공이라는 이상이 버드맨의 능력으로 시각화되는 것은 그가 가상을 통해 누린 영광이 여전히 그의 현실을 잠식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무엇이 옳은 연기인가. 가상 세계의 최전선에서 현실을 모방해내어야 하는 배우의 이상은 무엇인가.

버드맨에서는 영화에 대한 몰입을 전복시키는 순간이 자주 등장한다. 옥상에서 리건이 "Music!"이라 외치니 드럼 비트가 깔린다던가. <Doors and Distance>가 재생되는 롱테이크에서 뜬금없이 길거리에서 공연 중인 드럼 연주자가 나타난다던가. 

영화는 의도적으로 관객과 일정한 거리를 두려 한다. 이것이 가상이라고,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라고 말하는 듯. 연신 몰입을 깨부순다.


리건의 딸 샘을 통해 마이크와 리건은 배우로 다시 태어난다. (어쩌면 리건은 아니지만)

영화에는 샘과 마이크가 Truth of Dare 게임을 하는 씬이 있다. 모든 대답에 Truth로 시종일관 진실만을 고집하는 그에게 샘은 반대로 Dare만을 택하며 행동으로 보일 것을 은유한다그녀는 마지막 질문에서 마이크에게 Dare를 요구하고 그는 순응하며, 둘은 육체적 교감을 갖는다.


샘이 대마를 피다가 리건과 대화를 하게 되는 씬이 있다. 짧은 몇 마디 속에서 감정이 격해진다. "아빠는 세상을 무시하지만, 세상은 아빠를 벌써 잊었다고요. 아빠는 잊혀진 존재고 연극도 아빠도 이 세상에선 중요하지 않다고요!" 그녀는 그의 현실마저 잠식한 이상을 비난하며 대갈大喝한다.


그러나 리건은 그녀의 조언을 순응하는 모습은 아니다.




the unexpected virtue of ignorance 무지라는 뜻밖의 미덕

죽음은 편안한 것이다. 현실과 가상, 예술과 성공. 모든 괴리가 그 앞에선 동등해지고, 어쩌면 일체 된다. 그는 그렇게 모든 괴리를 안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건 맞을까.

그리고 그는 승리했다. 승리한 건 맞을까.


의도치 않은 총의 빗나감과 생존으로 의도치 않은 명성을 얻었다. 버드맨 마스크 같은 붕대를 풀러 새로 생긴 코를 훑어본다. 버드맨 슈트를 벗은 그는 알몸의 상태이다. 

가상과도 같은 투명한 옷은 사라졌을까. 아니면 말 그대로 투명해서 입고 있으나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걸까. 그는 무엇인가 깨달은 듯 보이지만 관객은 알지 못한다. 

병실 창문을 통해 빠져나간 그는 떨어졌을까. 하늘을 날고 있을까. 관객은 알지 못한다.


현실과 이상의 올바른 관계를 만들 수 있는 것은 나(관객) 뿐이다.



번외

"무지라는 뜻밖의 미덕" 그것은 누구에게 필요한 문장이었을까. 평론가와 세상의 일부는 리건이 총을 쏜 의도도 모른 채 새로운 연극 사조의 등장에 찬사를 보낸다. 진짜 무지한 건 말 한마디 끄적이며 남의 인생을 갈아치우는 언론과 곧대로 따르는 민중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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