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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를 품은 캔버스, 나를 살리는 용신

김환기 & 김향안, 낭만의 환상을 찢고 영원을 기획하다

by 덕원

이름을 버린다는 것은 존재의 호적을 파내는 일이다. 1944년, 천재 시인 이상의 미망인이었던 변동림은 가방 하나를 들고 나와 김환기라는 남자의 아내가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과거를 완전히 지워버리고, 남편의 아호였던 '향안(鄕岸)'을 자신의 이름으로 삼았다. 내가 당신이 되고, 당신이 내가 되는 기이하고도 서늘한 연금술적 결합(Alchemical Marriage). 한국 추상미술의 거장 김환기와 그의 아내 김향안의 신화는 그렇게, 한 여자가 자신의 실존을 스스로 도려내는 핏빛 결단에서 시작되었다.


우리는 흔히 예술가 부부의 삶이 영감과 낭만으로 가득할 것이라 착각한다. 그러나 이들의 삶을 지탱한 것은 뜨거운 에로스가 아니라, 가장 차갑고 단단한 현실적 투쟁이었다. 이 두 사람의 역사적 사랑을 에리히 프롬과 알랭 드 보통의 철학적 시선, 그리고 명리학의 용신(用神)과 인성(印星)이라는 코드를 통해 지독한 동반자적 사랑이라는 시각으로 해부해 본다.


1. 낭만주의적 비관론 - 사랑은 본능이 아니라 '기획'이다


알랭 드 보통은 현대의 낭만주의적 사랑관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낭만주의는 "말하지 않아도 직관적으로 통하는 완벽한 짝"을 환상으로 주입하지만, 현실의 사랑은 타인의 결함을 견뎌내고 밥벌이의 고단함을 뚫고 나가는 '지루한 프로젝트'라는 것이다. 드 보통의 '낭만주의적 비관론'에 비추어 볼 때, 김향안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현실주의자였다.


김환기가 파리 진출을 꿈꾸었을 때, 김향안은 "당신은 그림만 그려라"며 홀로 먼저 파리로 날아갔다. 불어와 미술사를 공부하고, 남편이 작업할 아틀리에를 구한 뒤에야 그를 불렀다. 1963년, 모든 명예를 버리고 뉴욕의 차가운 다락방으로 이주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극심한 빈곤 속에서 영양실조와 싸웠다. 백화점에서 옷을 수선하고 글을 쓰며 생활비를 번 것은 김향안이었다.


이들에게 사랑은 눈빛을 교환하는 낭만이 아니었다. 고독한 타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서로의 등을 맞대고 진지를 구축하는 생존의 기획이었다. 환상은 배제되었고, 오직 서로를 세상의 끝으로 끌어올리겠다는 묵직한 '프라그마(Pragma·실용적 사랑)'만이 그들의 뉴욕 시절을 견디게 했다.


2. 인성(印星)의 위대함 - 천재를 살려낸 절대적 용신(用神)


명리학의 뼈대로 이 부부의 구조를 짚어보면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김환기는 끝없이 우주와 이상을 향해 뻗어 나가는 나무(木)이자, 자신의 에너지를 밖으로 분출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식상(食傷)의 덩어리였다. 예술가의 식상은 천재성을 담보하지만, 자칫하면 그 폭발적인 에너지에 스스로 타죽거나 현실 감각을 상실하게 만드는 위험한 칼날이기도 하다.


이 위태로운 천재 곁에 김향안이라는 거대한 인성(印星)이 당도했다. 인성이란 무엇인가. 어머니처럼 먹이고 기르며, 외부의 타격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고, 흩어지는 재능을 문서와 기록으로 남겨주는 기운이다. 명리학에서 내가 가장 필요로 하고 나를 구원하는 기운을 '용신(用神)'과 '희신(喜神)'이라 부른다.


김향안은 김환기의 삶을 지탱하는 절대적 용신이었다. 남편이 방향을 잃고 불안해할 때마다 그녀는 "당신의 예술은 반드시 세계의 인정을 받을 것"이라며 심리적 '안전 기지(Secure Base)'가 되어주었다. 인성(김향안)은 식상(김환기)의 광기를 다듬어 그가 추상이라는 우주적 질서에 도달할 수 있도록 묵묵히 붓을 쥐여주었다. 그녀는 그의 뮤즈가 아니었다. 그녀는 그를 기획하고 완성한 거대한 창조주였다.




4561.png "사랑은 운명적 발견이 아니라, 매일의 헐벗은 현실을 악착같이 견뎌내는 처절한 공동의 기획이었다."



3. 에리히 프롬과 아가페 - 찍혀진 점, 우주가 된 여자


에리히 프롬은 그의 저서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은 우연히 빠져드는(Falling) 감정이 아니라, 나의 온 존재를 던져 참여하고 생산해 내는(Standing) '능동적 투신'이라고 일갈했다. 김향안의 사랑은 바로 이 '사랑할 줄 아는 능력(Art)'의 극치였다.


뉴욕 시절, 김환기는 십만 개의 푸른 점을 찍어 불멸의 걸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완성한다. 화폭에 찍힌 그 무수한 점들은 작가가 이국땅에서 그리워한 고향의 산천이자,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의 얼굴이었다. 예술심리학적으로 이 점들은 '관계의 총합'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한다. 그 십만 개의 핏방울 같은 점들이 찍힐 수 있었던 거대한 푸른 캔버스, 그것이 바로 김향안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자아를 넓게 펼쳐 남편이 맘껏 우주를 유영할 수 있는 배경이 되어주었다. 그녀는 남편을 '소비'하지 않고 '생산'했다. 사랑을 감정의 영역에서 태도와 의지의 영역으로 격상시킨 위대한 아가페(Agape)였다.


4. 맺음말. 재생관(再生官), 죽음을 이긴 천을귀인(天乙貴人)


1974년, 뇌출혈로 쓰러진 김환기가 예순한 살의 나이로 뉴욕에서 세상을 떠났다. 평범한 아내였다면 여기서 눈물을 흘리며 무너졌을 것이다. 하지만 김향안은 슬픔에 갇히지 않았다.


그녀는 환기재단을 설립하고, 전 세계를 돌며 남편의 유작전을 열었으며, 마침내 서울 부암동에 '환기미술관'을 세웠다. 명리학에서 이는 '재생관(再生官)'의 발현이다. 나의 노력과 재물(재성)을 쏟아부어 남편의 명예(관성)를 찬란하게 부활시키는 기적. 그녀는 살아있는 남편을 내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죽은 남편을 미술관이라는 공간에 영원한 신화로 박제했다. 김향안은 김환기가 이 땅에 태어나 만난 가장 거룩한 천을귀인(天乙貴人)이었다.


현대의 우리는 사랑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앱을 켜서 스펙과 외모를 계량화하고, 나에게 이득이 되지 않으면 가차 없이 관계를 '로그아웃' 해버린다. 서로를 우주로 끌어올리려는 수고로움 대신, 나의 외로움을 채워줄 '가성비 좋은 소모품'을 찾느라 여념이 없다.


환기미술관에 걸린 그 푸른 점들을 보라.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온전히 껴안고 어디까지 고양시킬 수 있는지, 그 서늘하고도 장엄한 증거가 거기 있다. 김향안은 남편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으로 삼았으나, 결국 한국 미술사라는 거대한 별자리에 자신의 궤적을 가장 뚜렷하게 남긴 이름이 되었다.



4560.png "육신이 소멸한 자리에 그녀는 미술관을 세웠다. 그것은 돌과 빛으로 쌓아 올린 영원한 묘지이자 부활의 제단이었다."





[인문명리적 조언]


당신의 사주가 이리저리 흩어지고 불안한 식상(食傷)과 비겁(比劫)으로 요동친다면, 당신의 삶을 차분히 정리해주고 다독여 줄 '인성(印星)'의 인연을 찾아야 한다. 인성은 화려하지 않지만, 당신이 무너지려 할 때 바닥을 받쳐주는 대지다. 반대로,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면 당신 스스로 그 사람의 '용신(用神)'이 되어주겠다고 결단하라. 조건이 맞는 사람을 찾는 것은 얄팍한 거래지만, 상대를 나의 우주로 빚어내는 것은 위대한 구원이다. 기꺼이 누군가의 캔버스가 될 각오가 섰을 때, 진짜 사랑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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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원의 인문명리학입니다.. 저는 30년간 명리학계에 종사해온 베테랑으로서 명리학과 인문학의 융합을 통해 인간의 삶을 더욱 입체적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노력을 진행해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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