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는 ‘엔도 슈샤쿠’의 소설 “침묵(沈黙)”을 바탕으로, 역사상의 실존인물 ‘페레이라 크리스토반 신부(1580~1652)’의 배교사건을 중심으로, 일본에서의 기독교 박해(迫害)가 얼마나 심각했었는지를 방증(傍證)하고 있는 작품이다.
기독교 탄압에 있어 배교를 감행하기 위해 여러 끔찍한 고문방법을 동원했는지, 신앙과 인간의 생명 앞에 어떠한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인지, 작품은 침묵하는 신에 대한 믿음과 그 앞에서 신앙을 지켜내고자 하는 신앙인들의 처절한 모습을 잘 담아내고 있다.
일본의 기독교는 1549년 예수회 설립자의 한 사람인 ‘프란시스코 사비엘’이 일본 규슈지방의 가고시마에 첫발을 내디딤으로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예수회 수도사 두 사람과 일본인 통역 한 사람을 데리고 가고시마에 들어와 포교를 시작했는데 그것이 일본 기독교 포교의 시초였다.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자신의 통일 정책에 장해가 된다고 생각한 나머지 선교사 추방령이 내려지고, 10년 후인 1597년 2월 일본인과 유럽인 26명이 십자가 위에서 처형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으로 인해 포교의 기세가 꺾이는가 싶었지만 포교 활동은 조심스레 진행되었다.
이후 정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일본인 기독교인들이 외국인 지도자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것에 불안을 느낀 나머지 그들에 대한 탄압은 더욱 거세졌다. 또한 신앙인들의 처형 방법으로 화형(火刑)을 택했지만 신앙인들은 육체가 불타 죽기 전 성모 마리아를 칭송하는 외침으로 순교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목적 달성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해 많은 고문 방법을 고안해 낸다.
당시는 십자가형, 화형, 수책, 물고문 등의 처형방법이 있었으나 배교하는 선교사를 한명도 얻지 못했기에 고안해 낸 방법이 ‘구덩이 매달기’였다. 깊이 판 구덩이에 오물을 넣고 그 위에 사람을 거꾸로 매달아 놓고 죽는 시간을 연장시키기 위해 이마나 귀 뒤에 칼로 작은 상처를 내어 피가 조금씩 흐르게 하는 방법으로 고통의 시간을 늘리는 방법이었다.
강인한 사람 중에는 일주일 이상이나 고통의 시간을 견디기도 했는데, 이러한 고문 방법에도 신앙인의 씨는 마르지 않았고 수천 명의 사람들이 고문과 처형으로 순교를 택했다고 한다. 이는 은밀하게 신앙을 지켜온 ‘가쿠레 키리시탄(숨겨진 기독교인)’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원작소설 “침묵”은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탄생하였고 이를 영화로 작품화한 것이 “사일런스”이다.
영화 “사일런스”는 이러한 배경 속에서 고문에 못 이겨 배교한 신부 ‘페레이라’가 등장한다. 그러나 누구보다 신앙심이 깊었던 그의 배교 소식은 로마 교황청 뿐 아니라, 전 유럽 가톨릭 성직자들은 물론이고 카톨릭 사회 전체를 발칵 뒤집어 놓는 사건이 되고 만다. 유능한 성직자가 고문에 못 이겨 배교했다는 사실은 그들의 자존심에 심각한 상처를 내기에 충분했다. 이를 믿을 수 없었던 사람들은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일어섰고 그중 사제 두 명(로드리게스와 가르페)이 스승을 찾아 이를 확인하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일본으로 떠나게 되는 것을 보여주며 이 영화는 시작된다.
(1) 페리이라 신부의 배교
1640년 5월 포르투갈 예수회 신부인 ‘로드리게스’는 ‘페레이라’신부가 배교했다는 소식을 듣고 순교를 각오하고 ‘기치지로’란 일본인의 안내로 가고시마에 잠입하는데 성공한다. 일본에 도착한 두 신부는 정부의 눈을 피해 조용한 곳에 숨어서 공동체를 운영하며 자기들 보다 더 깊은 신앙심을 갖고 있는 신앙인들을 보고 감격한다. 이를 본 두 신부는 밤에는 숨어있고 밤에만 마을 전체를 돌며 숨어있는 신자들을 돕기 시작한다. 그러나 소문은 마을 전체로 퍼져나갔고 자신을 안내해줬던 ‘기치지로’로부터 “자신은 성화를 밟아(후미에:踏み絵) 신앙인임을 부인했고, 신앙을 버리고 배교하지 않는 자신의 가족들이 가마니에 쌓여 화형을 당하는 장면을 보면서도 혼자서만 목숨을 부지했었다”라는 말을 듣는다.
이어서 이 마을에도 ‘기치지로’가 겪은 사건이 발생하는데 배교를 뜻하는 성화를 밟는 것으로 ‘배교’와 ‘순교’를 정하고, 성화를 밟지 못하면 배교의 뜻이 없다고 생각해 그들을 무차별 처형하기에 이른다. 그에 부족함을 느낀 막부(幕府)는 십자가에 침을 뱉고 ‘성녀는 창녀다’라는 말을 외치라 강요한다. 그리고 성화를 밟고 침을 뱉지 못한 자들은 즉시 배교의 뜻이 없다고 판단해, 바닷가에 묶어놓고 맨몸으로 모진 파도를 맞아야하는 가혹한 고문을 시킨다. 조수가 밀려간 바다에 기둥을 세우고 그 곳에 사람을 묶어 놓는 이 방법은 만조가 되면 해수가 목까지 차올라 대개 1주일 정도의 고통을 주는 것으로 이를 이기지 못해 죽는 처형방법이었다.
결국 기치지로의 밀고로 ‘로드리게스 신부’는 체포되어 ‘이노우에’ 심문관에게 취조를 받는다. 끌려간 곳에서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잡혀 있었는데 이노우에 수령은 배교를 하면 마을 사람들 모두를 살려주겠다는 제안을 한다. 하지만 로드리게스 신부는 마을 사람들 대신 자신을 죽이라 말한다. 그러나 순교하는 영광의 대가는 마을 사람들의 고통이라며 이노우에 수령은 사람들의 목숨을 볼모로 집요히 신부의 배교를 강요한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는 로드리게스 신부의 굳은 믿음을 알고 이노우에는 신부가 보는 앞에서 마을 사람을 하나씩 불러내어 목을 베는 비열한 방법을 택하고 사람들을 바닷가에 데려가 그가 보는 앞에서 신도들의 손발을 묶어 그들을 강 가운데 수장시킨다. 자신과 함께 일본에 왔던 ‘가르페 신부’역시 그들과 함께 수장되고 만다.
얼마 후, 로드리게스 신부는 마침내 그가 가장 존경해왔던 ‘페레이라’신부를 만나게 되면서 그로부터 배교를 하게 된 경위를 듣는다. 그가 배교한 것이 바로 구덩이에 거꾸로 매다는 그 끔찍한 고문과정에 옆에서 들려오는 무고한 일본의 그리스도교인들이 죽어가는 소리를 듣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렇게 그가 존경했던 페레이라 신부의 배교는 본인 고통의 문제가 아닌, 다른 신자들의 고문과 죽음을 견딜 수 없었던 배교였음을 알게 된다. 주님의 얼굴을 밟아 여러 사람을 살리는 일이야말로 주님이 원하고 있는 일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2) 고통의 순간에 침묵하는 신
페레이라 신부는 로드리게스 신부에게 자신이 배교한 이유를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배교한 것은, 이곳에 갇혀 있으면서 들은 저 신음소리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아무 것도 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필사적으로 기도했지만, 하느님은 아무 일도 하시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만일 로드리게스 신부가 순교를 고집한다면 그 사이 무고한 신자가 한사람씩 목숨을 잃게 될 것이며, 배교한다면 저 불쌍한 신도들을 구할 수 있을 것이었다. 신부는 고문의 가장 길고 어두웠던 밤이 끝나갈 무렵, 신부는 마침내 성화 앞에 섰고 목판속의 그리스도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으니 나를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들에게 짓밟히기 위해 태어났고, 너희들의 아픔을 나누어 갖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로드리게스가 가장 견딜 수 없었던 것은 고문에 의한 육체적 고통도 아니며, 신도들에게 가해지는 고문을 보는 정신적 고통도 아니었다. 다만 그 수많은 신앙인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신의 침묵’이었다. 로드리게스는 페레이라 신부의 배교를 이해하게 된다.
영화의 모티브가 된 작품 『침묵』을 통해 작가 ‘엔도’는 신의 침묵을 통해 일본인이 갖는 특수성을 ‘초월’과 ‘침묵’이라는 키워드로 질문하고 있다 할 것이다. 여기서 침묵은 초월적인 ‘신의 침묵’일 수도 있고, 초월에 대한 ‘일본인의 침묵’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약함이라는 모티브가 관련되어 있는데 ‘약함’은 부조리한 세계의 악과 고통에 침묵하는 초월적인 ‘신의 약함’과 그 초월을 견디지 못하는 ‘일본인의 약함’이 있다할 것이다. 작품에서 ‘기치지로’야말로 이런 일본인의 취약성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주는 캐릭터가 아닐 수 없다.
“침묵”이란 원작 안에서도 ‘로드리게스’는 감동적이고 웅장한 순교 장면을 상상했겠으나 성화를 밟은 후에 순교의 지극히 단조로운 일상성을 목격하고 “머지않아 자신이 죽음을 당하는 날에도 세상은 지금과 조금도 다름없이 아무 관계없이 흘러갈 것이며, 자신이 죽은 뒤에도 매미는 울고 파리도 윙윙 날아다니겠지.”라 말하고 있다.
“순교자들을 집어삼킨 바다, 곧 아무 감동 없이 시체를 씻어 삼키는 바다, 항상 변함없이 펼쳐져 있는 침묵의 바다” 앞에서 ‘로드리게스’ 신부는 하느님도 저 바다와 마찬가지로 침묵만 지키고 있다고 말하면서 “만약 하느님이 없다면 이 바다의 단조로움과 그 무서운 무감동을 어떻게 견디어낼 것인가?”라고 반문하고 있다.
작가 ‘엔도’는 어느 좌담회에서 “신은 침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생애를 통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침묵’이라고 하는 표충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그 속에 ‘신의 속삭임이 있다’고 바꾸어 말한 바 있다. 결국 좌담회를 통해 엔도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신은 외형상으로는 침묵하는 것처럼 보이나 실은 인간들의 인생을 통해서 말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순교자와는 달리 연약함 때문에 배교했다고 하는 사실이 카톨릭 역사의 오점으로 남아 역사 속에 묻혀있어 그들의 침묵의 음성을 들려주고 그들을 복권시킨다고 하는 엔도 작가로서의 생각이 있다고 적고 있다.
따라서 “침묵”의 세계에 있어서의 침묵은 “외형상으로는 침묵처럼 보이나 실은 인간의 인생을 통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므로 침묵이라 할 수 없고, 인간의 연약함으로 인해 범한 과오는 역사 속에 묻혀 말이 없으므로, 이는 복권시켜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오래전 필자가 찾았던 나가사키에는 “침묵”의 작가 ‘엔도 문학관’이 세워져 있고 그 맞은편 작은 언덕위에는 ‘침묵의 비’가 새겨져 있다. 한적한 마을과 눈앞에 광활히 펼쳐진 바닷가의 모습. 그곳의 넓고 푸른 바다는 너무나 평온해 보이지만 박해 당시에는 영화에서처럼 해안에 기둥을 세워 신도들을 묶어놓고 수형이 집행 되었던 곳이었다 하니 고통의 바다가 아닐 수 없다. 영화의 장면마다의 신앙인들의 순교로 인해 피로 물들었을 아픔을 품고 잔잔하기만 한 푸른 바다가 침묵으로 던지는 질문들이 가슴에 들어왔다.
“인간이 이렇게도 슬픈데, 주여! 바다가 너무나 푸르옵니다.”
‘침묵의 비’에 새겨진 문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