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버드나무는 귀신을 연상시킨다?>
오래전, 일본친구와 퇴임한 교수님을 찾아가는 중에 있었던 일이다.
도착지에 차를 세우고 교수님을 기다리며 새로 지었다는 넓은 도청을 둘러보고 있었다.
마침 그곳엔 그림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고 그림에 관심이 있었던 나는 한 곳에서 발을 멈추었다.
그리고 내 눈에 들어온 멋진 작품을 보며 친구를 불렀다.
충청도 민요인 “천안 삼거리 흥~ 능수야 버들은 흥~, 제 멋에 겨워서 휘 늘어졌구나~ 에루화 좋다 흥~ ”을 저절로 읊조리게 하는 그림이었다.
물가에 세워진 한 그루 멋진 버드나무를 보며, 한 때 한국화에 빠져있었던 추억을 떠올렸다. 늘어진 나뭇가지를 먹 선으로 어찌 저리 멋들어지게 잘 표현할 수가 있을까.
먹선 위에 살짝 입힌 푸른색의 색상 또한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품격이 느껴지는, 한 여름날의 마음까지 시원하게 날려주는 작품이 아닐 수 없었다.
먹의 농담으로 그려야 하는 한국화는 칠할 때마다 먹의 선이 그대로 드러나서 두 번 세 번 덧칠하는 것이 어려운 점이 다른 그림과는 다른 점이다. 필력을 이용해 일필휘지로 난을 치듯 한 번에 표현해야 한다는 어려움을 알기에 그림을 그리고자 했을 당시와 그 마음을 마주하고 붓을 들었을 화가의 마음에 동화되어 한참을 들여다보며 친구에게 여러 얘기를 해 주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내 쪽으로 오던 일본친구가 내 앞의 그림을 보며 갑자기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닌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이유인즉,
일본에서는 물가의 늘어진 버들가지는 마치 영화 ‘링’에서 머리를 풀고 화면을 뚫고 나오는 귀신을 연상시키는 것이라 했다. 그런데 그 꺼림칙한 좋지 않은 작품 앞에 지그시 그림을 응시하고 서 있는 나를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버드나무를 인식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수양버들에 관련된 일화를 예로 들고 있다.
일본 에도시대에는 강변이나 물가에 버드나무가 줄지어 있었는데 밤에 강가를 걷고 있으면 버드나무 한 쪽에 하얀 기모노를 입은 여자가 울고 있는 등, 강가에서 죽은 귀신이 버드나무가 흔들리는 대로 귀신의 실루엣이 보이기도 한다는 소문을 시작으로, 유녀나 매춘부들이 아픈 몸을 이끌고 동네를 헤매다가 버드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해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따라서, 당시 버드나무 아래에는 시체가 굴러다니는 일들이 많았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귀신'과 '버드나무'와 '물가(우물)'는 무서운 단어로 각인되어 있으니, 수양버들이라고 하면 귀신이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떠오른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영화 ‘링’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영화 속 머리를 헤쳐 풀고 화면을 뚫고 나오는 귀신을 생각하니 늘어진 수양버드 가지와 흡사하단 생각에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우리나라 민요에는 어디까지나 '멋들러진 수양버드 나무'가 아니던가. 생각하기 나름이라지만 아무래도 그 친구의 말을 듣고 보니 신도의 나라 일본에서는 아름다움에 앞서 귀신쪽에 무게를 둘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것에는 물귀신에 대한 신앙등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에도시대(1603~1867) 당시, 병이 들면 사람들이 버드나무 아래로 모여들었던 이유는 수양버들 잎을 달여서 마시면 열이 내리고 통증이 가라앉기도 했다고 하는 수양버드 나무의 효험이 한 몫하고 있다.
실제 버드나무 껍질을 달인 물로 양치나 가글을 하게 되면 치통을 멎게 하는 등 진통이 멎는 등, 버드나무 껍질에는 항염효과가 뛰어난 성분이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버드나무 껍질에서 추출한 ‘살리신’을 주성분으로 만든 약품이 바로 우리가 가까이 두고 사용하는 '아스피린'이라고 한다.
기근에 전염병까지 창궐했던 에도시대 당시 사람들의 삶이 연상되면서 앞서 말했던 시체를 버렸던 ‘라쇼몽’의 누각이 오버랩 되었다.
우리가 버드나무를 부르는 “천안 삼거리”의 민요처럼 ‘휘휘 늘어진 가지’라 칭송해 마지않던 그 멋들어진 버드나무와는 너무나 큰 차이를 보여주는 문화가 아닐 수 없다.
일본에서 '버드나무 아래는 유령의 지정석'이라는 말도 있다하니,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말의 깊이가 되새겨지는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