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란 감정은 섬세하고 개별적인 감정이라 겹치지 어렵다고 하는 백수린 작가의 에세이를 읽었다. 기쁨으로 다가가기는 쉽다. 무슨 내용인지 몰라도, 따라서 함께 웃으면 된다. 웃는 분위기 속에서는 내 경험도 웃음으로 불어난다. 슬픔은 어떤가. 괴로움과 근심에 가득 찬 사람에게 다가가 ‘나도 그랬어. 나도 잘 극복했어. 그러니 힘내’라는 말은 관계를 상하게 한다. 함부로 슬픔에 겹치려다 보면 들쑥날쑥 튀어나온 개별적인 경험들이 날카롭게 관계를 겨눈다. ‘내 경험은 당신과 달라.’, ‘함부로 내 슬픔에 이름 붙이지 마.’
황정은의 ‘모자’는 알레고리를 통해 가족을 나타내는 작품이다. 아버지는 세 남매를 홀로 부양하는 한부모 가장이다. 그에게는 이상한 습관이 있다. 순간순간 모자로 변하는 것. 모자로 변한 역사는 아버지가 어렸을 적부터 시작된다. 할아버지에게 혼났을 때, 최초로 모자가 되었다. 그 뒤로도 첫째가 아버지를 모른 체하고 지나쳤을 때, 다시 돌아와 보니 아버지는 또 모자가 되어있었다.
모자가 되면 어떤 기분이 들까? 아침에 일어나 감지 않은 머리를 숨길 때, 얼굴을 크게 드러내고 싶지 않아 얼굴을 가릴 때, 따가운 태양으로부터 얼굴을 보호할 때 모자를 쓴다. 가리는 목적으로 태어난 모자. 추함과 추해지는 것, 게으름과 게을러지는 것 사이에서 초라하게 선택을 기다리는 기분. 모자의 기분은 서늘하다. 나는 충남에서 근무하고, 고향은 거제라서 고향집을 가려면 4시간은 걸린다. 귀향은 큰 맘을 먹어야 한다. 큰맘 먹고 집에서는 학교에서 못다 한 게으름을 실컷 풀어놓는다. 머리는 헝클어진 채, 어제 입은 반팔도 재활용해서 생태적 삶을 실천한다. 그러다 아버지의 술 심부름이 있을 때, 부랴부랴 모자를 찾는다. 몇 개월의 기다림 끝에 모자에는 초라함이 먼지와 함께 소복하다. 오랜 시간의 기다림은 모자 위에 초라함으로 쭈글쭈글 눌러앉아있다.
<모자> 속에 나오는 아버지는 누군가에게 헌신하는 쭈글쭈글한 기다림이다. 직장을 잃고 자식을 보는 아버지의 마음. 어릴 적 내 아버지께서 집 임대료를 마련하기 위해 당신의 차를 파셨던 기억이 생생하다. 시트에서 쿰쿰한 먼지 내가 나는 초라한 차를 끌고 온 아버지는 모자 같았다. 나는 아버지의 차를 보고선 울었다. 당시에는 우리 집이 망하는 것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바뀐 차와 함께 올라왔던 것 같다. 며칠 뒤 아버지의 차는 다시 원래 차로 바뀌었다.
-네가 계속 우니까, 다시 달래 캤다.
내 울음은 당신께 수치심을 잔뜩 안겼다. 부끄러움은 변화를 일으키는 인간이 가진 근본적인 동기이다. 아버지의 감정을 지금도 헤아리기 어렵다. 수치심, 부끄러움, 슬픔. 섬세한 감정들을 자식이 없는 내가 설명할 수 없다. 아버지의 가난을, 나의 가난으로 해석할 수도 없다. 이 소설에서 둘째는 아버지처럼 모자가 되지 못한다.
내 가난한 수치심과, 가난한 슬픔으로 헤아릴 수 없는 모자들과 마주하는 삶. <모자>가 되려면 나는 얼마나 모자가 되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