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버라: 더워라
경상도 방언은 옛말이 많이 남아있다. 단어도 단어거니와 음소 또한 옛말이 남아있다. 순경음 비읍이 경상도 방언에 남아있다고 교수님이 열성을 다해 설명하셨던 기억이 있다. 옛 말에서 'ㅂ' 소리는 '모음' 사이에서 순경음으로 소리가 났다고 한다. 지금은 순경음 비읍이 사라졌지만, 경상도 사투리에서는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단다. 대표적인 예가 '더버라'이다. 여기서 '버'의 'ㅂ'소리는 받침의 'ㅂ' 소리와도, 초성의 'ㅂ'소리와도 미묘하게 구분된다. 울리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와이리 덥노. 더버라'. 내 유년 시절, 친구들은 늘상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들의 존재를 통해 언어는 과거와 연결될 수 있었다.
나는 태권도를 다녔기 때문에, 어릴적 여름은 태권도장과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나는 태권도에서 공연단을 했었다. 그래서 노래에 맞춰 리듬 품새를 연습하기도 했고, 또 인제대학교 축제 때 짧게나마 무대 위에 오른 적이 있었다. 발차기로 격파도 하고, 옆돌기도 하고. 그렇게 서기 위해서는 연습이 필요했다. 그래서 여름이고 겨울이고 태권도에서 발차기, 품새, 마샬아츠 등을 갈고 닦았던 것이다. 에어컨을 틀어놓았었던 것 같은데, 늘상 더워서 양팔 위에도 송글송글 땀이 올라왔었다. 그때 가장 소원은 '어서 어른이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 훈련이 너무 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태권도장을 계속 다녔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다. 그만둘 수 있음에도, 나는 부모님께 그만두고 싶은 내 마음을 잘 전달하지 못했다. 당연히 다녀야하는 것처럼 태권도를 다녔다.
나는 지금 교사가 되었지만, 우리 동생은 지금 태권도 사범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동생으로 따지면 미안한 일들이 참 많다. 그때 마샬아츠 사범이 우리 동생에게 키가 작다는 식으로 놀렸을 때, 나는 동생의 곁에서 그 우는 모습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그만두자고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동생은 아마 누적된 상처로 지금까지 과거와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니 미안하다. 그러나 동생이 사범이 되었다는 것이 참 독특하다. 그때 그렇게 울고, 그렇게 억울했을 텐데도. 어쩌면 상처가 동력이 되었나 싶기도 하다. 상처가 있기에 동생은 그런 상처를 주지 않고 아이들을 가르치려고 애를 쓴다. 그래서 동생의 프로필은 늘 싱글벙글 웃는 아이들과의 사진으로 채워져있다.
내게 여름은 땀내와 미안함과 어른이 되고픈 소망으로 얼룩져 있다. 여름은 참 여름이다. 나무의 나이테를 만드는 것은 여름에 쭉쭉 자란 연한 빛과 겨울에 더디게 자란 진한 빛의 단면이다. 나무의 나이를 확인하려면 나무를 베어야 하지만, 인간의 나이를 알아보려면 단어를 쪼개어 보면 어떨까 생각이 든다. 여름이라는 단어를 쪼개면 쭉쭉 자라고 있는 연한 빛들이 '더버라, 더버라'하고 외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