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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사마리아인 증후군

행복이란 초라하고 가난한 내 인생의 자서전을 써 내려가는 것이다

by 최만섭

불길 속의 고통, 병원의 밤


2015년 3월 23일, 출근길에 갑자기 39도가 넘는 고열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다. 이후 고열의 원인을 찾기 위해 엑스레이, MRI, CT, PET, 혈액 검사, 심전도 등 쉴 틈 없는 검사가 이어졌다. 그러나 의사는 해열제를 투여하면 병의 근본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며, 끝내 해열제를 처방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보름 가까운 시간 동안, 몸을 휘감는 불덩이 같은 고열을 그대로 견뎌야만 했다.


그 무렵 나는 이미 오십견으로 어깨가 굳어,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침대에 몸을 누이는 순간, 등 아래에서 검붉은 불길이 타오르는 듯한 뜨거운 열기가 밀려왔다. 움직일 수 없었기에, 나는 마치 그 불길 속에 갇힌 듯한 무력감과 두려움을 느꼈다. 온몸을 덮치는 고열은 마치 산불처럼 느껴졌으며, 그 열기는 체온계로는 잴 수 없는, 겉은 타오르지 않지만, 속이 이글거리는 불길처럼 느껴져 더욱 끈질기고 고통스럽게 나를 잠식했다. 그 누구도 내가 누워 있는 침대를 활활 타오르는 불구덩이처럼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밤마다 나는 휠체어에 앉아 병실 창밖으로 흘러 나가는 붉은 불빛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밤을 지새워야만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의사와 아내는 간곡히 나를 설득했다. "이대로는 병세가 악화합니다. 억지로라도 누워서 쉬셔야 해요." 나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침대는 더 이상 편안한 안식처가 아니었다. 결국 나는 잠들지 못한 채, 환각 속에서 또 다른 나와 마주쳤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나'는, 침대 위에서 고통스럽게 신음하는 또 다른 '나'를 냉정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의 영혼은 육신 밖으로 밀려 나와, 불길 속에서 타들어 가는 몸을 가여운 듯이 응시했다. 나는 매일 밤, 몸과 영혼이 끔찍하게 분리되어 가는 공포를 견뎌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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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과 안도


각종 검사 후에 고열의 원인이 위암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나는 오히려 마음이 편안했다. 설사 지금 죽는다 하더라도 이 뜨거운 불길 속에서는 탈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안도감 때문이었다. 혹독한 고통을 겪은 암 환자들은 통증이 죽음보다 무섭다는 것을 깨닫는다. 실제로 암 병동에서는 치료를 포기하고 죽음을 택하려 했다가도, 극심한 통증 때문에 다시 입원한 환자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2015년 4월 8일, 위 절제 수술을 받기 위해 수술대에 실려 수술실로 옮겨졌다. 나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번개 치는 소리에 깜짝 놀라 깨어나니, 청색 하늘에서 하얀 햇빛이 마구 쏟아지고 있었다. 수술실의 전등은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찼던 현세(此岸-차안) 너머, **깨달음의 세계(彼岸-피안)**를 비추는 듯했다. 나는 이제껏 살았던 이 세상(此岸-차안)을 떠나 **새로운 세상(彼岸-피안)**에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다. 나는 결코 과거의 고통스럽던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했다.


공포와 생사의 경계


악성 종양 진단을 받고 수술받을 때까지만 해도 나는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자세였다. 그러나 수술 후유증으로 폐에 물이 차오르면서 숨이 가빠지는 것을 느끼며 밤을 지새워야 했을 때, 더 이상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했다.고통 속에서 맞닥뜨린 죽음의 그림자는 순응 대신 지독하게 견디기 힘든 공포로 변했다. 나는 매일 밤 악몽에 시달렸다. 아무도 없는 외진 곳, 수렁에 빠져 살려달라고 소리치며 발버둥 칠수록 목소리마저 몸과 함께 진흙 속으로 빨려 들어가 속수무책으로 죽음을 기다려야 하는 악몽이었다.


금강산 여행에서 격은 죽음과 공포에 대한 색다른 경험이 떠올랐다. 계곡물은 마치 신선과 가인이 살았을 법한 착각을 일으킬 만큼 아름다웠다. 그러나 신비로운 계곡의 풍경은 상팔담으로 오르는 험로 앞에서는 잊혔다. 아무런 안전장치도 없이 아주 작은 줄사다리를 타고 가파른 절벽을 올라야 하는 매우 위험한 모험이었다. 실수로 발을 헛디디거나 사다리 줄을 놓치면 수십 미터 낭떠러지로 떨어져 생명을 잃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오금이 저렸다.


그런데 이 무서운 등정 코스에 나이 많은 할머니들이 스스로 참가하는 광경을 보고 적지 않게 놀랐고,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중간 지점까지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고 나서야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마치 거대한 양탄자처럼 두껍게 깔린 초록색 나무의 넓은 잎사귀들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이 녹색 잎들이 만들어낸 위장 덕분에, 만일 내가 추락하더라도 저 크고 안락한 양탄자가 나를 안전하게 받아줄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똑같은 '떨어짐'이라는 죽음의 위협인데도, 시야를 가리는 나뭇잎이라는 위장막 하나 때문에 공포가 희석되는 순간이었다. 삶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란, 이처럼 우리 마음이 만들어낸 허상이고 망상일 뿐인 것이다.


조력자 증후군(helper syndrome)


폐가 등 뒤쪽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몸 밖에서 고무호스를 폐로 연결하여 폐에 고인 물을 빼내는 포크테일(PORK TALE)이라는 시술받고 난 후였다. 부분 마취를 하고 갈비뼈 사이에 고무호스가 들어갈 길을 낼 때마다, 마치 강판에 펀치로 구멍을 내는 듯 '탕! 탕!' 하는 소리가 내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시술이 끝난 후 나는 등 뒤에 연결된 두 개의 고무호스를 통해 폐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통에 받아내야만 했다.


암 병동에서 치료받는 동안, 나는 환우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리 암 환자들이 대부분 나처럼 마음이 여리고 '착하다'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문득 의문이 들었다. 과연 우리는 정말로 착한 사람들일까?

볼프강 슈미트 바우어(Wolfgang Schmidbauer)는 자신의 문제 회피를 위해 남을 돕다가 조직 활동에 중독되는 조력자들의 독특한 정신 구조를 '조력자 증후군(helper syndrome)'으로 정의했다. 이는 조력자에 대한 이상적인 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자는 취지로 쓴 문제작, **'무력한 조력자'**에 담긴 내용이다. 주로 성직자, 의사, 간호사, 사회복지사, 심리사, 언어치료사, 교사 등 남을 돕는 직업에 종사하는 이들에게서 이 증후군이 나타난다.


조력자 증후군의 특징은, 개인이 가진 본연의 감정이나 특성 때문이 아니라 타인이 기대하는 이상화된 조력자 상에 자신을 맞춰 행동함으로써 사랑받는다고 믿는다는 점이다. 자기 자신은 매일의 일상과 일기장에 기록되는 '현실' 그 자체이지, 결코 '이상'이 될 수 없다. 이러한 태도의 이면에는 억압된 감정 때문에 허기를 느끼며 거대한 자기애적 욕구를 일으키는 깊은 상처가 자리 잡고 있다. 이 책을 우리말로 옮긴 채기화 교수는,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부단한 성찰을 통해 자신의 결핍을 살피고 자신을 위로하는 힘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야 한다고 조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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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사마리아인 증후군의 깨달음


나는 지금까지 비록 가난했지만 착하고 정의롭게 살았다고 자부해 왔다. 회사의 적자를 해결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대표이사의 경영 방침에 맞서기도 했고, 경영 실적을 높이기 위해 매일 밤을 새웠다. 또한, 박봉을 불평하는 능력 있는 직원의 영어 학원 강의료를 보태준 적도 있었다. 문제는 나의 이러한 행위에 대해 머리(이성)는 수긍하지만, 가슴(감정)이 감당하지 못한다는 데 있었다.


이러한 괴리는 이른바 '스트레스'로 이어져 결국 위암이라는 중병에 걸리게 되었다. 마치 대형 차체를 감당하기에는 엔진 용량이 턱없이 부족하여 차량 자체가 파손된 격이 된 셈이다." 내가 나를 너무 잘 안다. 양심적으로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라고 말을 시작하는 사람들의 속내는, 대개 자신의 본심(本心)인 양심에 따라서 행동하고 실천하고 있음을 증명하여 신의 성실한 사람으로 존중받고 싶다는 바람이다. 더 나아가 자신은 선(善)한 삶을 추구하기에 세상에서 마땅히 인정받고 대우받아야 한다는 당위성을 주장한다.


그러나 내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양심과 본심은 '나'라는 존재의 아주 작은 일부분일 뿐이다. 마치 거대한 빙산이 몸체를 깊은 물 속에 숨기고 있듯이, 나의 모체인 **본성(本性)과 성리(性理)**는 바닷물보다 깊은 마음속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매일 절실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매 순간 선정(禪定)에 들어 맑고 깨끗한 마음의 눈을 가질 때야 비로소 우리는 물속에 숨겨진 우리의 참모습을 조금씩 그려 나갈 수 있다. 내가 악성 종양에 걸린 주된 원인은, 내면의 선(內善) 대신 **외부로 드러나는 선(外善)**을, 빙산의 모체 대신 빙산의 일각을 선택하여 나의 참모습을 찾으려 헤맨 탓이다. 나는 이성적으로는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살고자 세상과 맞섰지만, 감정적으로는 이를 거부당하여 발생하는 가슴앓이를 겪었다. 나는 이것을 '착한 사마리아인 증후군'이라 부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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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마음의 치유


나는 이 증상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하여, 첫째로 내 몸과의 대화를 시작했다. 나는 병원 수술대에 누워서 몸이 내게 여러 차례 보낸 위암 전조증상을 무시한 것에 대하여 뼈저린 후회를 했다. 몸은 몇 번이고 면도날로 왼쪽과 오른쪽 가슴을 찌르는 듯한 통증을 가하면서 내게 대화를 요청했지만 나는 이를 무시하고 약국에서 담에 바르는 파스를 사서 붙이고 동네 한의원에서 침과 뜸질 치료만을 받는 등 정밀 검진을 외면하고 통증 완화를 위한 임시방편적인 치료만 받았다. 몸과 마음이 각각 다른 사람으로 살았으니, 악성종양이 터전을 잡기에 이보다 좋은 조건이 어디에 있었겠는가? 밤늦게 과식을 한 다음 날 아침에는 “밤새도록 그 많은 음식물을 소화하느라고 고생 많았지? 나는 그것도 모르고 정신 놓고 잠이 들었었구나. 몸이 미안하다. 앞으로 주의할게!”라고 몸에 사과한다.


두 번째는 마음과의 대화이다. 몸이 많이 회복되어서 사회생활을 재개할 준비를 하고 있다. 백방으로 일자리를 알아보지만, 60대 중반 나이에 직장 얻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워 세상이 원망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었고 텔레비전으로 고위직 공무원의 부정 축재에 대한 보도를 볼 때마다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제하지 못해 몇 날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한 어두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그것은 나의 부질없는 욕심과 조급함 때문에 생긴 울화이며 나의 자만심이 만들어 낸 망상과 분별이기 때문에, 만약 내가 이러한 망상과 분별을 가슴에 안고 산다면, 나는 또다시 생사의 갈림길에 설 것이란 판단하에 “망상! 망상! 망상!”이라고 크게 외쳐서 내 몸과 마음 밖으로 이들을 내쫓는다. 그리고 좌선하여 눈감고 입을 꼭 다물고 바늘구멍 같이 가는 숨결로 부드러운 ‘수프레모’ 커피 향을 음미하듯이 숨을 들이쉬고 내시면서 마음의 평화를 찾고 있다.


세 번째는 매일 새벽에 ‘자존감(自尊感)’을 화두로 명상에 젖는 것이다. 행복이란 이웃집 담장에 올라가서 화려하고 부유한 친구의 위인전을 집필하는 것이 아니라 초라하고 가난한 내 인생의 자서전을 써 내려가는 것이다. 착할 선(善)은 좋을 선이라고도 한다. 기도와 수행 후에 인내심을 가지고 신의 목소리를 기다리면, 신은 항상 환심과 함께 지혜를 주나니 세상사에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끝으로 나의 졸필이 ‘착한 사마리아인 증후군’ 때문에 고통받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2016년 11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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