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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만섭 Aug 11. 2023

장모님 전상서

인생은 한 편의 슬픈 영화일 뿐인가?



2019년 1월 29일 퇴근하여 집에 도착하자 집사람에게서 전화를 받았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데. 드디어 올 것이 왔나 봐!” 울먹이면서 가슴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슬픔을 억제하지 못한 울림은 나게 또다시 아무리 되짚어 생각해도 인생은 한 편의 슬픈 영화일 뿐인가? 하는 의구심에 잠기게 하였습니다.

 

‘고 안정순, 1926년 2월 28일생 주민등록번호 260228’ 저의 장모님 신상명세서입니다. 14세의 어린 나이에 가난한 농부의 아내로 시집을 와서 신랑보다는 이웃집 아주머니를 좋아하고 살림살이보다는 시댁 작은어머니의 어린애를 업어주는 것을 재미로 삼았던 장모님의 인생은 파란만장했습니다. 장모님은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 그리고 유신독재와 촛불 민주화로 이어진 격랑의 세월을 온몸으로 치열하게 견뎌내며 살아남은 전형적인 한국 여성이었습니다.

 


병약한 남편은 비상한 머리를 가졌고 건강한 신부는 순박한 영혼의 소유자였습니다. 신부는 신랑이 시키는 대로 이른 새벽에서 밤늦게까지 들에서 뼈가 빠지라고 일을 했습니다. 나는 장모님을 뵐 때마다 펄벅의 소설 대지에 나오는 주인공 ‘왕릉의 처 오란’이 연상됩니다. 이른 새벽에 대지의 숨결을 맡을 수 있고, 집안의 대를 이을 수만 있다면 전쟁이 터져도 남편이 젊은 여인을 첩으로 들여도 개의치 않았던 오란과 같이 장모님은 그녀의 모든 것을 대지에 맡긴 체 그 고된 농사일에 온 힘을 다 받쳤습니다.

 

장인어른과 장모님의 합작으로 처가는 동네 제일가는 부농이 되었습니다. ‘호사다마’라 하나요? 순탄하고 평안할 것 같았던 장모님의 인생은 30여 년 전 장인어른이 돌아가시면서 깨지기 시작했습니다. 장모님은 딸 넷과 외동아들을 두었는데, 아들의 사업실패로 그녀의 피와 땀으로 이룩한 모든 것, 드넓은 땅과 100여 평의 집터까지 빚으로 빼앗겼습니다. 그 후 장모님이 겪은 고난은 이루 말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단칸방 월세를 얻어서 온종일 양말공장에서 일하시고 폐지를 주워 팔아서 생계를 꾸려가야 했습니다. 월세를 못 내 갖은 수모를 당했습니다.

 

딸들의 도움으로 십여 년 전에 시골에 13평짜리 임대주택에 잠자리를 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그러나 누가 제게 이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는 분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저는 주저함 없이 우리 장모님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간디가 일자무식이었던 그의 어머니를 그렇게 존경했던 이유는 그녀가 해가 지면 아무것도 먹지 않겠다는 계율을 평생 단 한 번도 어긴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장모님은 그러한 고난을 겪으면서도 단 한 번도 당신의 팔자를 한탄한 적이 없습니다. 깨달은 이에게는 태양이 두 개 뜬다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이 밝아서 어두움이 찾아올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장모님은 막내딸네 집에 머물다 돌아가셨는데 사망 당일 아침에도 시래깃국을 맛있게 드시고 딸에게 출근 인사까지 정겹게 하셨다고 합니다. 막내딸이 회사에서 돌아와 보니 장모님이 소파에서 떨어져서 숨져있었습니다. 점심 식사까지 챙겨 드시고 소파에서 텔레비전을 보시다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편안한 죽음, 존엄사(Well Dying)는 역경에도 불구하고 오직 밝은 세상만을 바라보며 치열하게 산, 한 가난하고 순박한 여인에게 신이 내린 축복이 아닐까요?

 


장례지도사가 장모님을 염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쏟아지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밝은 미소를 띤 얼굴을 만지면서 아직도 살아서 움직이는 듯한 장모님의 팔을 주물러 드리면서 이제는 영원히 이 세상을 떠나는 장모님의 마지막 모습을 가슴속 깊이 새겨놓았습니다. 벽제 화장터에서 장모님 유골단지를 받아서 장인어른 옆에다 모시고 나니 그때야 조금 마음이 안정되었습니다.

 

삶과 죽음이 본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 분별이 만들어낸 망상일 뿐이라고 계속해서 읊조려도, 봄물 터지듯 슬픔은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장모님이 그 모진 풍파를 겪으면서도 행복하게 살 수 있었던 원동력은 네 명의 딸들이었습니다. 딸들은 교대로 노인이 먹기 편한 음식을 장만하여 장모님 집으로 가서 목욕을 시켜드리고 그 옛날 장모님이 딸들을 얼마나 사랑해 주었나를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장모님에게 딸들은 영원한 안식처인 대지와 같았습니다. 비록 빈털터리로 죽음을 맞이했지만, 장모님은 누구보다도 풍요로운 마음으로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장모님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는 적나라한 인간 본연의 모습을 담담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장모님! 하늘나라에서 편안히 쉬십시오. 명복을 빕니다.


2019년 12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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