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온전히 신의 영역입니다
2월 마지막 금요일 저녁이었다. 일주일간 쌓인 피로를 씻을 단잠을 연상하면서 늦은 저녁을 먹는데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휴식을 뺏어 갈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은 여지없이 적중하고 말았다.
시골 할아버지 벌 되는 친척이 돌아가셨으니, 고향에 들어가자는 형님의 전화였다. 나는 쌀쌀한 추위를 피하고자 엉덩이 밑까지 내려오는 아들애의 잠바를 걸치고 버스 정류장으로 나갔다. 자가용이 없는 못난 형제는 의정부서 작성까지 버스로, 적성에서 택시를 타고 장남면 원당리 고인의 장지까지 어렵사리 도착했다.
돌아가신 분은 화를 내실 줄 모르는 분이었다. 누가 어떤 이야기를 하여도 대답은 항상 "그러면 그렇지! 그렇고말고!"였다. 그는 말하는 것보다는 남의 말을 듣는 것을 즐기는 인자한 시골 할아버지였다. 지난해 가을 시제 때 그를 만났을 때도 그는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열심히 경청하고 있었다.
나는 정사각형의 큰 얼굴과 도드라진 광대뼈 아래 깊이 숨어 있는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눈가에 맺힌 한 방울의 눈물이 가을 햇살에 반짝이는 것을 발견하고서야, 나는 폐 전체에 암세포가 번져 치료를 포기한 그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었다.
그 순간 가슴이 울컥하며, 삶이 우리에게 안겨주는 무력감과 덧없음을 온몸으로 느꼈다. 그런데도 그는 죽기 불과 몇 시간 전까지 길가에 나와 지나가는 사람들과 농사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마지막 순간까지 삶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그의 태도가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
죽음을 맞이하는 그의 담담한 자세를 보고 나는 수십 년간 목회 활동을 한 목회자가 임종의 순간에 아름답지 못하게 죽어 교계의 비판을 받았다는 기사가 생각났다.
인생의 의미는 자연의 섭리와 신의 뜻에 순종하는 겸손일 것이다. 불가에서는 기름을 머금은 마른 장작이 활활 타올라 남긴 재처럼, 육신이 문득 허물어지고 혼백이 구천으로 날아가는 죽음을 아름답다고 한다.
비닐하우스에는 30대 젊은이들이 서너 명씩 모여 포커를 치고 집안에는 오랜만에 모인 집안 친지들이 모여 그간의 안부를 물으며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고인의 조카 되는 분의 집에서 4~50대 중년들과 같이 고스톱을 쳤다.
우리네 상가가 소위 말해서 잘 났다고 하는 패거리와 그렇지 못한 사람들로 갈라지는 것과는 달리 이곳은 같은 연배끼리 어울렸다.
이 차분하고 어쩌면 정겹게 느껴지는 분위기는 고인이 비록 암으로 돌아가셨지만, 사실 만큼 사셨으니, 호상이라고 느끼는 공감대 때문인 것 같았다. 나는 연탄을 쌓아 불을 붙여 놓은 마당으로 나가서 담배 한 대를 물었다.
태아를 보호하는 타원형의 보호막같이 따스한 연탄불 아래로 서너 명의 젊은이들이 서 있고 둥근 달걀 같은 연기가 하늘로 올라 빛나는 수많은 별과 손을 맞잡고 있었다.
나는 십 대 시절, 세상을 먼저 떠난 소녀들은 하늘의 별이 되었다고 굳게 믿곤 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고개를 들어 반짝이는 별들을 바라볼 때마다 그 찬란한 빛 속에서 그들의 아직 다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들려오는 듯했다. 들판에 누워 있으면 등 뒤로 스며드는 싸늘한 냉기가 어김없이 느껴졌다.
나는 그것을 ‘죽음’이라 불렀다. 죽음은 언제나 내 곁에 공포의 그림자처럼 따라오면서도, 동시에 알 수 없는 신비와 숭고함으로 다가왔다.
스무 살이 되었을 때 나는 더욱 과격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신념과 정의를 위해 목숨을 버린다면, 죽음은 단순한 끝이 아니라 승천하여 더 높은 차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작이 될 것이라 믿었다. 그렇게 산화하는 순간에야 인생은 가장 아름다운 정점에 다다를 수 있다고 여겼다.
왜 나는 그토록 죽음에 집착하며, 삶의 아름다움을 오직 그 끝자락에서만 찾으려 했을까? 아마 그 깊은 이면에는 나에 대한 두려움과 나약함이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주사를 맞을 때조차 바늘이 살을 파고드는 그 짧은 순간의 공포를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오히려 눈을 질끈 감는 대신, 눈을 부릅뜨고 그 바늘이 내 살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확인해야만 안심이 된다. 그것은 용기가 아니라, 두려움을 통제하려는 비겁한 습관임을 나는 알고 있다.
어쩌면 나는 이러한 연약함을 숨기고 부정하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사유의 대상으로 끌어올리며 일종의 숭배로 포장했는지도 모른다. 죽음을 응시함으로써 강해진 척했지만, 실은 그것이야말로 가장 나약한 나로부터의 도피였던 것이다
그 왜곡된 해석은 내게 오랜 대가를 안겼다. 자연이 부여한 죽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인위적으로 장식하며 신격화한 탓에 나는 수십 년 동안 죽음에 대한 깊은 불안과 두려움 속에 갇혀 살아야 했다. 죽음은 삶을 아름답게 완성하는 장엄한 의식이 아니라, 그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자연의 질서일 뿐인데도 말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나는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그날이 언제인지? 그 원인이 기력이 쇠하여서이었는지? 는 모르지만 내가 책방에 들러 공자님의 경이원지(敬而遠之)에 대한 글을 읽고 난 후부터인 것만은 확실하다.
춘추 시대의 성인 공자에게 어느 날, 조금 어리석은 번지라는 제자가 물었다. "선생님, 지(知)란 무엇입니까?"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이 해야 할 도리를 다하고자 노력하고 혼령이나 신에 대해서는 존경하되 멀리한다면 이것을 지(知)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날 출근을 해야 했던 못난 형제는 새벽 5시에 일어나 2시간 동안 죽을힘을 다해서 달려, 가까스로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수많은 반상이 조각된 절벽 아래로 겨울 하늘을 품은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좁은 동굴 입구에서 세차게 불어온 바람이 암벽에 부딪혀 굉음을 내자, 강물도 흰 물결을 일으키면서 서럽게 울부짖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가슴속에서 올라오는 따스한 향수를 맡으며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그리고 내 생애 처음으로 생사를 초월한 신선이 내게 내민 작은 보물 상자를 받았다. 나는 초등학교에 막 입학한 어린애가 선생님이 주시는 상장을 받을 때 느끼는 뿌듯함과 따스함에 젖어 들면서 소리를 질렀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비록 제 운명이 평생 시련과 갈등 속에서 고독한 방랑자로 살아야만 한다고 해도, 저는 그 운명을 사랑하겠습니다. 그리고 죽음 이후에 마주할 세상에 대한 궁금함과 조바심도 내려놓겠습니다. 그 세상은 온전히 당신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2002년 3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