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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만섭 Nov 05. 2024

경원(敬遠)

죽음은 온전히 신의 영역입니다


2월 마지막 금요일 저녁이었다. 일주일간 쌓인 피로를 씻을 단잠을 연상하면서 늦은 저녁을 먹는데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휴식을 뺏어 갈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은 여지없이 적중하고 말았다.


시골 할아버지 벌 되는 친척이 돌아가셨으니 고향에 들어가자는 형님의 전화였다. 나는 쌀쌀한 추위를 피하기 위해 엉덩이 밑까지 내려오는 아들애의 잠바를 걸치고 버스 정류장으로 나갔다. 자가용이 없는 못난 형제는 의정부서 적성까지 버스로, 적성에서 택시를 타고 장남면 원당리 고인의 장지까지 어렵사리 도착했다.  

 

돌아가신 분은 화를 내실 줄 모르는 분이었다. 누가 어떤 이야기를 하여도 대답은 항상 "그럼 그렇지!  그렇고말고! 였다. 그는 말 하는 것 보다는남의 말을 튿는것을 즐기는 인자한 시골 할아버지 였다.  지난해 가을 시제 때 그를 만났을 때에도 그는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열심히 경청하고 있었다. 




정 사각형의 커다란 얼굴에 광대뼈가 불거져 나와 더욱 깊어 보이는 그의 눈에 맺힌 눈물이 따가운 가을 햇볕에 반짝일 때에야 나는 그의 폐에 암세포가 너무 많이 퍼져서 퇴원해 집에서 요양 중이라는 것을 알았다. 죽기 몇 시간 전에도 그는 길가에 나와서 지나가는 동네 사람들과 농사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죽음을 맞이하는 그의 담담한 자세를 보고 나는 수십 년간 목회활동을 한 목회자가 임종의 순간에 아름답지 못하게 죽어 교계의 비판을 받았다는 기사가 생각났다. 


인생의 의미는 자연의 섭리와 신의 뜻에 순종하는 겸손일 것이다. 불가에서는 바짝 마른 장작에 기름을 부어 불을 지폈을 때 쌓이는 재같이 육신이 무너지고 혼백이 구천으로 날아가는 죽음을 아름답다고 한다.


비늘 하우스에는 30대 젊은이들이 서너 명씩 모여 포커를 치고 집안에는 오랜만에 모인 집안 친지들이 모여 그간의 안부를 물으며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고인의 조카 되는 분의 집에서 4-50 대 중년들과 같이 고스톱을 쳤다. 우리네 상가가 소위 말해서 잘 났다고 하는 패거리와 그렇지 못한 사람들로 갈라지는 것과는 달리 이곳은 같은 연배끼리 어울렸다. 


이 차분하고 어쩌면 정겹게 느껴지는 분위기는 고인이 비록 암으로 돌아가셨지만 사실만큼 사셨으니 호상이라고 느끼는 공감대 때문인 것 같았다. 나는 연탄을 쌓아 불을 붙여 놓은 마당으로 가서 담배 한 대를 물었다. 


태아를 보호하는 타원형의 보호막같이 따스한 연탄불 아래로 서너 명의 젊은이들이 서 있고 그 계란 같은 연기는 맑은 하늘 위에 빛나는 수많은 별과 손을 맞잡고 있었다.


내가 십 대였을 때 죽은 소녀는 저 하늘의 별이 됐다고 믿었었다. 그리고 들판에 누워 등 밑에서 서서히 올라오는 냉기를 죽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20대에는 신념과 정의를 위해서 기꺼이 목숨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나는 죽음만이 인생을 아름답게 만든다고 생각했을까? 아마 나 자신이 주사를 맞을 때 주삿바늘이 찔리는 순간이 두려워 눈조차 감지 못하는 겁쟁이라는 사실을 거부하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와 오기가 발동했을 것이다. 자연이 부여한 죽음에 대한 그러한 인위적인 해석의 여파로 인하여 나는 수십 년간 엄청난 죽음의 공포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나는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그날이 언제인지? 그 원인이 기력이 쇠하여서였는지? 는 모르지만 내가 책방에 들러 공자님의 경이원지(敬而遠之)에 대한 글을 읽고 난 후부터 인 것만은 확실하다.


 춘추 시대의 성인 공자에게 어느 날, 조금 어리석은 번지라는 제자가 물었다. "선생님, 지(知)란 무엇입니까?"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이 해야 할 도리를 다하고자 노력하고 혼령이나 신에 대해서는 존경하되 멀리한다면 이것을 지(知)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날 출근을 해야 했던 못난 형제는 새벽 5시에 일어나 2시간 동안 죽을힘을 다해서 달려, 가까스로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수많은 반상이 조각된 절벽 아래로 겨울 하늘을 품은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좁은 동굴 입구에서 세차게 불어온 바람이 암벽에 부딪혀 굉음을 내자, 강물도 흰 물결을 일으키면서 서럽게 울부짖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가슴속에서 올라오는 따스한 향수를 맡으며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그리고 내 생애 처음으로 생사를 초월한 신선이 내게 내민 작은 보물 상자를 받았다. 나는 초등학교에 막 입학한 어린애가 선생님이 주시는 상장을 받을 때 느끼는 뿌듯함과 따스함에 젖어 들면서 소리를 질렀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비록 제 운명이 평생 시련과 갈등 속에서 고독한 방랑자로 살아야만 한다고 해도, 저는 그 운명을 사랑하겠습니다. 그리고 죽음 이후에 마주할 세상에 대한 궁금함과 조바심도 내려놓겠습니다. 그 세상은 온전히 당신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2002년 3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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