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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모님 전상서

인생은 한 편의 슬픈 영화일 뿐인가?

by 최만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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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2019년 1월 29일, 퇴근 후 집에 도착했을 때 집사람이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대. 드디어 올 것이 왔나 봐.” 말끝에 흐르는 울먹임이 내 심장을 깊게 찌르는 듯했습니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슬픔을 억누르려 해도, 눈물은 이미 마음의 문틈을 비집고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곱씹어도, 인생은 결국 한 편의 슬픈 영화와도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습니다.


한 소녀에서 어머니로, 한 세기를 버텨낸 여인


‘고 안정순, 1926년 2월 28일생 주민등록번호 260228’ 저의 장모님 신상명세서입니다. 14세의 어린 나이에 가난한 농부의 아내로 시집을 와서 신랑보다는 이웃집 아주머니를 좋아하고 살림살이보다는 시댁 작은어머니의 어린애를 업어주는 것을 재미로 삼았던 장모님의 인생은 파란만장했습니다.


장모님은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 그리고 유신독재와 촛불 민주화로 이어진 격랑의 세월을 온몸으로 치열하게 견뎌내며 살아남은 전형적인 한국 여성이었습니다.


병약한 남편은 비상한 머리를 가졌고 건강한 신부는 순박한 영혼의 소유자였습니다. 신부는 신랑이 시키는 대로 이른 새벽에서 밤늦게까지 들에서 뼈가 빠지라고 일을 했습니다. 나는 장모님을 뵐 때마다 펄벅의 소설 대지에 나오는 주인공 ‘왕릉의 처 오란’이 연상됩니다.


이른 새벽에 대지의 숨결을 맡을 수 있고, 집안의 대를 이을 수만 있다면 전쟁이 터져도 남편이 젊은 여인을 첩으로 들여도 개의치 않았던 오란과 같이 장모님은 그녀의 모든 것을 대지에 맡긴 체 그 고된 농사일에 온 힘을 다 받쳤습니다.


풍요의 끝에서 찾아온 시련


장인어른과 장모님의 정성과 노력이 더해져, 처가는 한때 동네에서 손꼽는 부농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하지만 흔히 말하는 *호사다마(好事多魔)*일까요. 순탄하고 평안할 것만 같았던 장모님의 인생은 30여 년 전 장인어른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시면서 균열하기 시작했습니다.


장모님은 딸 넷과 외동아들을 두셨는데, 불행히도 아들의 사업 실패가 가세를 송두리째 흔들었습니다. 장모님이 피와 땀으로 일궈낸 드넓은 농토와 100여 평의 집터는 결국 빚더미에 압류되어 남김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때부터 장모님의 삶은 마치 거센 풍랑 속에 휩쓸린 조각배와도 같았습니다. 단칸방 월세를 전전하며 온종일 양말 공장에서 일해야 했고, 밤이 되면 폐지를 주워 팔아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야 했습니다. 하루 세 끼조차 제대로 해결하지 못할 때도 많았고, 월세를 내지 못해 집주인으로부터 갖가지 모욕을 당하는 일도 잦았습니다.


땀과 눈물이 뒤섞인 그 세월은, 평범한 언어로는 다 담아내기 어려울 만큼 가혹하고 고단했습니다.


가난했지만 품위 있었던 삶


그나마 다행인 것은, 딸들의 도움으로 십여 년 전 시골에 13평 남짓한 임대주택을 얻어 편히 머무실 보금자리를 마련하셨다는 점입니다. 이처럼 고단한 삶을 살아오셨지만, 누군가 제게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분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장모님’이라고 답할 것입니다.


인도의 성자 간디가 글 한 자 모르던 어머니를 가장 존경했던 이유는, 해가 지면 금식하겠다는 자기 절제의 율법을 평생 한결같이 지켜낸 그 엄정함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제게는 우리 장모님이 바로 그러하셨습니다. 장모님께서는 모진 세월을 겪으시면서도 자신의 팔자를 원망하거나 남을 탓하는 법이 단 한 번도 없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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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런 장모님을 뵐 때마다, 혹여 전생에 큰 깨달음을 얻은 보살이 현신한 분이 아닐지 생각하곤 했습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어찌 그 거센 풍파를 원망 한마디 없이 온전히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옛사람들은 ‘깨달은 이에게는 태양이 두 개 뜬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은 이미 마음속에 지혜와 자비의 태양이 떠 있기 때문에 현실의 어둠이 스며들 자리가 없다는 뜻일 겁니다. 저에게 장모님의 삶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고요한 작별, 존엄한 마무리


장모님은 막내딸네 집에 머물다 돌아가셨는데, 사망 당일 아침에도 시래깃국을 맛있게 드시고 딸이 출근할 때 다정하게 인사까지 건네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막내딸이 회사에서 돌아와 보니, 장모님은 소파에 쓰러진 채 이미 숨을 거두신 상태였습니다. 점심 식사까지 챙겨 드신 뒤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시다가 심장마비로 조용히 세상을 떠나신 것입니다.


편안한 죽음, 곧 존엄사(Well Dying)라 부를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은, 역경 속에서도 오직 밝은 세상만을 바라보며 치열하게 살아온 한 가난하고 순박한 여인에게 신이 내려주신 축복이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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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강을 건너며


장례지도사가 장모님을 염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저는 쏟아지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밝은 미소를 띤 얼굴을 만지면서 아직도 살아서 움직이는 듯한 장모님의 팔을 주물러 드리면서 이제는 영원히 이 세상을 떠나는 장모님의 마지막 모습을 가슴속 깊이 새겨놓았습니다.


벽제 화장터에서 장모님 유골 단지를 받아서 장인어른 옆에다 모시고 나니 그때야 조금 마음이 안정되었습니다.


삶과 죽음이 본래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 분별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라고 아무리 되뇌어 보아도, 봄물 터지듯 밀려드는 슬픔은 막을 길이 없었습니다. 장모님께서 그 모진 풍파 속에서도 끝내 행복하게 살 수 있었던 원동력은 네 명의 딸들이었습니다.


딸들은 차례로 장모님 댁을 찾아가 연로하신 어머니가 드시기 편한 음식을 정성껏 마련해 드리고, 목욕을 시켜드리며, 그 옛날 장모님이 딸들을 얼마나 사랑해 주었나를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장모님에게 딸들은 영원한 안식처인 대지와 같았습니다.


빈손의 철학


비록 빈털터리로 죽음을 맞이했지만, 장모님은 누구보다도 풍요로운 마음으로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장모님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는 적나라한 인간 본연의 모습을 담담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장모님! 하늘나라에서 편안히 쉬십시오. 명복을 빕니다.


2019년 12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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