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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만섭 Oct 07. 2024

행복한 삶을 위하여

행복을 생각하는 사람에서 행복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제목 : 행복한 삶을 위하여


육십이 넘은 나를 가장 당혹스럽게 하는 질문은 "왜  당신은 글을 쓰느냐?"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나의 솔직한 대답은 세상에 대한 애증과 희망과 행복에 대한 필사적인 미련 때문이다. 몇 해 전 텔레비전에서 카드빚에 쪼들린 젊은 아낙이 고층 아파트에서 살려 달라고 애걸하는 두 아이를 창밖으로 던져 버리고 그녀 자신도 젖먹이를 품에 안은 채로 떨어져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뉴스를 보았다. 


오죽하면 그런 짓을 했겠느냐는 동정심과 함께 아무리 부모라도 인간의 생명을 빼앗는 행위는 용서할 수 없다는 분노에 사로잡히는 것은 나만의 소회(所懷)는 아닐 것이다. 나는 육십오 년 전 절망의 벼랑 끝에서 죽음 대신 삶을 선택한 나의 어머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육 이 오 전쟁이 발발하자 나의 어머니는 연로한 시어머니와 병든 남편을 앞세우고 젖먹이를 등에 업은 채, 일곱 살과 다섯 살 먹은 남매의 손을 이끌면서 피난길에 나서야만 했다. 


쌀 한 가마니를 실은 황소는 지뢰를 밟아 달아났고, 큰애는 지뢰파편에 허벅지를 맞고 길모퉁이에 내동댕이쳐졌다가 지나가던 미군 위생병에게 발견되어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소진된 늙은 시어머니와 병든 아버지의 유일한 희망은 편히 이 풍진(風塵) 세상을 마감하는 것이었다. "우리 모두 이 연못에 빠져 죽자!" 어머니가 한숨을 쉬면서 말씀하셨다.


 죽음같이 긴 침묵이 흐른 후에 큰 애가 울부짖으며 대답했다. "나 죽기 싫어요." 두꺼운 초록색 연꽃 잎사귀 위로 닭똥같이 굵은 이슬방울이 흐르고 있었다. 투명하고 맑은 새끼의 눈물을 본 젊은 아낙은 식구들의 어깨를 끌어안으면서 흐느꼈다. "내가 죽일 년이지. 왜 그런 못된 생각을 했을까?" 



다음날 토굴에 거처를 정한 어머니는 집을 나와 조그만 장터 생선가게 앞에서 적당한 어둠이 그녀의 얇은 낯을 가려 줄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주인에게 다가갔다. "아저씨 제가 새벽부터 가게 앞에 서서 지켜보았는데요. 제게 생선을 떼어 주신다면 팔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돈이 없거든요." 생선 장수 아저씨는 아무 말도 없이 양동이에 생선을 가득 담아 어머니 머리에 얹어 주었다. 어머니의 생선 장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생선을 주고 쌀도 받고 고구마도 받고 좁쌀도 받았다. 다정다감한 이웃의 인정은 어머니의 아픈 상처와 부끄러운 허물을 포근하게 감싸 주었다. 고달프고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어머니가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은 아침마다 마음 씀씀이가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설렘 때문이었다.


우리는 물 위의 풍랑을 극복할 때 느끼는 자긍심과 성취감만을 유일한 희망이라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수면(水面) 밑에도 고요하게 흐르는 고독이라는 희망이 존재하는 데 말이다. 비정한 세상을 탓하면서 생을 포기한 가련한 여인은 그녀의 풍만한 젖가슴을 풀어헤칠 따스한 봄바람은 절대로 불어오지 않을 것이라는 절망감에 빠졌었을 것이다. 나는 이 아낙에게 수면 밑 수궁의 찬란한 봄을 선사하고 싶다.

     

  

나는 지난해 봄에 위암으로 위 절제수술을 받았다. 


악성종양 판정을 받던 날, 집사람은 내 양손을 꼭 잡고 울면서 다짐했다. “당신이 가족을 30여 년간 돌보았으니, 이제는 우리가 당신을 살릴 겁니다!” 집사람과 아들은 모든 것을 접고 나를 간호하는 데에만 전력투구했다. 그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나의 몸은 조금씩 회복되어 갔다.


항암 치료가 끝나던 지난 12월에 도봉산 둘레길을 찾았다. 나는 길가에 늘어선 수많은 상수리나무가 스스로 내려놓은 봄. 여름 가을을 밟으면서 깊은 상념에 젖어들었다. 거친 숨을 고르기 위해 텅 빈 하늘을 바라보는 동안, 산봉우리에서 내려온 따뜻한 기운이 병마에 지친 내 몸과 마음을 푸근하게 감싸 주었다. 나는 오랜만에 찾아온 편안함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다석(多夕) 유영모(柳永模)


‘다석(多夕) 유영모(柳永模) 명상록’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세상에서 말하는 입신양명(立身揚名)이니 성공출세(成功出世)니 이런 것 다 집어치우고 진리에 들어가는 것만이 참삶이다.’ 유영모는 고백했다. ‘나는 단일 허공을 확실히 느끼는데 하느님 마음이라고 느껴진다. 허공은 무한하다. 우리는 전체인 단일 허공의 존재를 느껴야 한다. 참(眞)이란 허공밖에 없다.’


결국, 모든 사람이 갈구하는 행복은 ‘하느님 마음’과 소통할 수 있는 자기 인생의 언어를 스스로 찾아야만 가능하다는 생각이다. 유영모는 그 언어를 머리(망상)가 아닌 손(수행)을 통해서 구하라고 가르친다. ‘제삼독 이후수행(除三毒而後修行)’, 삼독을 버린 뒤에 길을 닦아야 하느님의 생각을 이룰 수 있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삼독은 참진치(貪瞋癡, 욕심과 노여움과 어리석음)를 말한다.



삶의 끝자락을 경험한 뒤, 내가 찾은 인생의 언어가 허공이라면 어머니의 언어는 인정이 아닐까?


나는 지난봄 병마(病魔)로 건강과 직장 등 많은 것을 잃었다. 그렇지만 내 인생의 시곗바늘을 발병 전으로 되돌리고 싶지는 않다. 하루하루를 수도승같이 먹고 생각해야만 하는 현재의 생활에 만족하기 때문이다. 아픈 만큼 성숙한다고 했나. 


만약 내가 혹독한 시련을 겪지 않았다면, 나는 아직도 행복을 실천하는 사람이 아니라 행복을 생각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2016년 4월 16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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