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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로유재 Aug 18. 2023

노숙의 밤, 12월의 JFK (1)

급작스런 뉴욕행


 2018년 12월, 갑작스럽게 마이애미로 출장이 잡혔다. 런던에서 마이애미를 가는 직항 대신, 뉴욕에서 경유를 하는 편이 끌렸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뉴욕에 있는 친구들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항공권은 출장비 지원이 나왔고, 나는 사비를 더 들이더라도 뉴욕을 즐기겠다며 일주일의 휴가를 준비했다.


 뉴욕의 12월 물가는 살인적이었다. 과장을 좀 보태면 런던에 비해 모든 것이 두 배 이상 비싼 느낌이었다. 숙소 가격은 말할 것도 없고, 미술관의 상설전시를 보려면 평균 20불-25불이 넘는 티켓을 구매해야 하는 사실은 충격이었다. 갑작스레 잡힌 출장을 빙자한 휴가였기에, 한정된 예산에서 꾸려나가야 했다. 꽤나 힘든 여행이 될 거라 생각했다.


 빌딩 숲 사이로 칼바람을 맞으며 걸어 다니는 경험은 녹녹지 않았고, 맨해튼의 겨울풍경은 삭막했지만, 그곳에서의 일주일은 기대 이상으로 안온했다. 모두 나의 친구들 덕분이었다. 뉴욕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친한 언니가 기꺼이 그녀의 집에 머물 수 있게 해 주었다. 덕분에 지금은 브루클린에 살고 있는 나의 유학시절 단짝 친구 L을 매일 만날 수 있어 좋았고, L의 부모님께서는 기꺼이 나를 보러 보스턴에서 운전해서 와주시기까지 했다. 다른 주에 살지만 잠시 뉴욕으로 출장 온 사촌동생도 만나고, 오래전 이미 그곳에 자리 잡은 나의 고등학교 친구와도 만나 회포를 풀었다. 뉴욕에서 활동하는 작가 선배, 동료들도 만날 기회가 있어 기뻤다. 그들은 모두 나를 갖가지 방법으로 한없이 따뜻하게 챙겨주었다. 그들에게 감사의 표시로 소소한 선물을 하고, 소박하게나마 나도 식사 대접을 하기도 했지만, 모든 걸 감안하고라도 나는 엄청나게 저비용의 뉴욕 여행을 하고 있었다.


 왁자지껄했던 뉴욕에서의 시간이 지나고, 어느새 마지막 날이 되었다. 다음날 오전 4시 비행기로 마이애미로 가려는 계획이었다. 이 애매한 시간대의 티켓이 앞으로 나에게 어떤 고통을 안겨 줄지 그땐 알지 못했다. 머물던 곳과 공항의 거리가 꽤 멀고, 탑승 시간에 딱 맞추어 간다면 새벽에 집에서 나가야 했기에 같은 집에 사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것이 뻔했다. 공항 근처의 호텔에서 머물며 여독을 풀고 비행기를 탈 계획을 세운 나는 이른 오후, 공항으로 향했다.


 택시 안에서 JFK 근처 호텔들을 찾아보니, 생각보다 너무 비쌌다. 비교적 저렴한 곳들은 이미 예약이 모두 차 있었고, 가능한 방들은 내가 예상한 가격의 두세 배를 웃돌고 있었다. 연말의 치솟은 뉴욕물가는 공항 주변마저 잠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 저비용(?) 여행에서 나는 절대 이런 거금을 쓸 수 없다는 오기가 발동했다. 반나절도 채 머물지 않을 곳에 지난 일주일 동안 뉴욕에서 쓴 비용을 지불할 수는 없었다. 즉시 휴대폰으로 ‘JFK 밤새기’ ‘JFK 노숙’ 등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공항 노숙에 대한 정보가 많았다. 각 터미널마다 누워있기 가장 최적의 장소를 짚어주는 글부터, 사진과 함께 시간대별 세세한 경험을 담은 글까지. 노숙 선배님들께서 올려주신 양질의 정보를 훑는 나의 손가락은 매우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한 가지 염려된 것은, 내가 미리 이 상황을 대비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침낭이나 목베개 같은 아이템을 준비하지 못한 점, JFK는 상당히 넓은 공항이고 터미널마다 구조가 상이하다는 점, 무엇보다 너무 급작스럽게 결정하게 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차창 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도시 불빛을 바라보며 차근차근 시뮬레이션을 돌려보았다. 나의 짐은 큰 캐리어 하나와 작은 배낭이 전부였고, 공항에 도착하면 오후 다섯 시경 일테다. 다음날 비행기는 오전 4시 출발. 그렇다면 거진 열한 시간 정도를 공항에서 보내야 한다는 것인데, 충분히 버틸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모르게 자신감이 솟았다. 당시 서른 살이었던 나는 아직 젊은 패기가 있었던 것이다. 다시 그날의 택시 안으로 돌아간다면, 지금의 나는 분명 다른 선택을 할 것이다. 하지만 모든 건 겪어봐야 깨닫는 법. 그때의 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 택시 안에서의 선택이 곧 나에게 어떤 시련을 가져다줄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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